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4
악녀는 두 번 산다 4화
“어떻게든 로렌스를 끌어내려야 해. 그렇지만 세력 차이가 너무 여실하다. 군무밖에 모르는 나와 내 부하들은 도무지 그 차이를 줄일 방도를 모르겠다.”
아르티제아는 멍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조각상 같다고 생각했던 세드릭의 얼굴은 이제 이글이글 타오르는 해처럼 변해 있었다.
그는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르티제아는 마치 고함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대가 현명한 사람인 것을 나는 안다.”
“…….”
“주군을 고르는 눈은 없었으나 가족의 정에 눈이 어두워진 것이겠지. 더러운 권모술수를 부렸지만, 그것이 로렌스를 위해서였다는 것도 알고 있다.”
“…….”
“이 상황을 뒤집고 타개할 수 있는 인물을 나는 그대 외에는 떠올리지 못하겠어. 로산 후작, 그대의 힘이 필요하다.”
세드릭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곧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구부려 엎드려 절하는 자세를 취했다.
아르티제아는 기겁했다.
사지를 퍼덕였으나 앉아 있는 것도 간신히 하는 일이라 넘어지고 말았다. 집사가 그녀를 붙들어 주었다.
세드릭이 고개를 들었다. 검은 눈동자가 불을 품어 마치 달구어놓은 석탄 같았다.
“그대도 이제 로렌스와 가족의 정은 없을 것이다. 제국을 돌아보고 후회하지 않았나?”
“…….”
“그대가 권모가일 뿐이지, 악마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안다. 로렌스와는 달라. 그렇게 해서 손에 넣은 권력으로 좋은 일을 해보려고 생각하지 않았나?”
아르티제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게 후회할 자격이나 있겠는가.
사람들이 하는 말이 옳다.
악마는 아닐지라도 악마와 계약한 마녀가 있다면 그게 바로 그녀일 터였다.
설령 마음이 바뀌었더라도 그녀에게는 이제 말을 할 혀도, 글을 쓸 손도 없었다.
피로와 고통에 지친 몸으로는 제대로 된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로산 후작, 그대에게는 아직 번득이는 두뇌가 남아 있다. 입으로 펜을 물고 글을 쓸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남의 도움을 받아 철자를 선택할 수도 있을 거야. 목숨이 남아 있으니 각오와 의지가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대가 필요하다.”
아르티제아는 한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시야가 흐려졌다.
우스운 일이었다.
그녀는 한평생 충성을 바쳐 온 로렌스에게서도 네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었다.
그녀는 세드릭을 알고 있었다.
적이었기에, 오히려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가슴에 품은 원한이 용암이 흐르는 계곡보다도 깊을 것이다. 산 채로 포를 떠내자고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에게 무릎을 꿇고 있다. 오로지 대의 때문에.
그렇지만 아르티제아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잘하는 것은 사람을 모함하고 환심을 사고 암살하고 음모를 꾸미는 일이다. 전략전술은 그녀가 다루어온 범위가 아니었다.
세드릭이 하지 못한 일을 그녀가 해낼 수는 없다.
설령 그녀가 정말로 신묘한 책사라고 하더라도, 지금처럼 세가 기울어진 상황을 극복해낼 방법은 없었다.
“그렇군.”
아르티제아가 고개를 저은 이유를 세드릭은 곧 이해한 듯했다.
“이미 그대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로군.”
그가 침통하게 말했다.
아르티제아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죽는 날까지 후회는 하지 않으려 했다. 처음 손을 피로 물들였을 때부터 그렇게 결심했었다.
뒤늦게 후회한다고 해서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죽은 자들도, 원망할 거라면 하필 이따위 세상에 태어난 운명을 원망 하라고 해라.
갓 태어난 아기가 아닌 다음에야 세상에 죄 없는 자가 어디 있는가.
아니다. 갓 태어나는 아기조차도, 그 출생으로 인해 죄를 짓는 일이 부지기수다.
그녀처럼. 그리고 또 로렌스처럼.
그런데도 후회했다.
실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먼지처럼 쌓인 후회들이 이제야 거대한 바위처럼 뭉쳐 심장을 쿵쿵 내리찍었다.
“무리한 말을 해서 미안했다.”
세드릭이 일어섰다.
“군영의 형편이 좋지 않아 좋은 대접은 할 수 없지만, 조만간에 사람을 붙여 시골로 보내주겠다. 여생은 부디 편안했으면 좋겠군.”
아르티제아는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날 밤에 그녀는 천막 안에서 혼자 웅크려 누운 채로 생각했다.
모든 것을 바로잡을 방법.
그런 것은 없다. 지금 상태에서는.
그러나 사실 아르티제아에게는 방법이 있었다.
그녀는 엉금엉금 기어서 요 위에 일어나 앉았다.
이 방법은 쓰지 않으려 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로렌스에게 죄 지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죄인이었다.
그러니 그냥 죽어 썩어질 생각이었다. 로렌스를 위해 저질렀던 온갖 악행을 끌어안은 채로 말이다.
하지만…….
‘계책은 없다. 그러나 방법은 있다.’
세력이 너무 기울어 돌이킬 수 없다면, 그 세력이 기울어지기 전으로 돌아가면 된다.
아르티제아는 반밖에 남지 않은 혀를 물었다. 그리고 요 위에 마법진을 그렸다.
마법은 이 세상에서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마법을 행사하는 방법은 아직도 전달되어 오고 있다.
농도가 진한 피와 정확한 마법진, 그리고 인신공양이다.
실상 마법이 사라진 가장 큰 이유는 인신공양 문제가 아니라 마법진을 정확하게 그릴 수 있는 사람이 적었기 때문이다.
마법진의 글자는 고대문자로 적혀 있다.
그것을 베껴 그리는 것은 할 수 있을지라도 원하는 대로 응용하여 쓸 수 있는 사람은 없다시피 했다.
하지만 아르티제아는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사어가 된 고대문자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몇 없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리고 사악한 일에 쓰기 위해서 마법진을 연구한 적도 있었다.
지혈이 잘 안 되었지만, 그래도 아르티제아는 여러 번 혀를 깨물고 입 안쪽을 짓씹어 피를 냈다.
뭉툭한 혀에서 흘리는 피로 글씨를 쓰기 위해서는 상당한 크기로 마법진을 그려야만 했다.
그녀는 밤새도록 마법진을 그렸다. 두 번의 기회는 없기에, 한 번에 정확하게 그려야만 했다.
도중부터 시야가 가물거렸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그녀는 혀를 더 세차게 물었다.
새벽녘이 다 되어 마침내 그리는 데에 성공했을 때에 그녀는 실혈 때문에 털썩 마법진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딱 맞는 인신공양이지.’
아르티제아는 힘없이 눈을 감았다.
그녀의 생명을 받아먹은 마법진이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천막 안의 이변을 깨달은 세드릭이 달려들어와 경악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미 작동하기 시작한 마법진은 제물을 내주지 않았다.
전격이 발생하여 접근하려는 자를 막았다.
‘다음 세상에서는, 뜻을 이루시길.’
그것이 아르티제아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마법은 이내 하늘 끝까지 닿는 빛의 기둥이 되어 밤하늘을 갈랐다.
* * *
눈을 뜨자, 한새벽이었다.
아르티제아는 이불 안에서 발을 꼼지락거렸다. 그다음에는 손을 움직였다.
마지막으로는 손가락으로 혀를 만 져 보았다.
“마법의, 해석이 틀렸나?”
그녀는 소리 내어 말해 보았다. 목소리도 멀쩡하게 나왔다.
마법진에 쓴 고대문자는 《아르티제아 로산의 목숨을 받아 그 대가로서 시간을 되돌린다.》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아르티제아는 당연히 자기가 죽을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살아 있다.
몸의 고통은 조금도 없었다. 가슴 안쪽을 쿵쿵 두드리는 듯하던 후회의 염만이 아직도 그녀의 심장을 뛰게 하고 있었다.
그녀는 생경한 기분으로 손을 높이 들었다.
달빛이 창으로 새어들어와 손톱을 푸르게 물들였다.
아르티제아는 말없이 그 손톱을 바라보고 있다가 시트를 걷고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등잔에 불을 붙이고 거울을 보러 갔다.
“돌아, 왔구나.”
거울 안에 있는 것은 환한 백금발에 청록색 눈동자를 가진 소녀였다.
그녀는 손끝으로 뺨을 더듬어 만져 보았다. 자신의 얼굴이 자신의 것 같지 않았다.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던가.
그녀는 한 번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마음 써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거울도 몇 번 본 적 없었다. 로렌스와도, 밀라이라와도 다른 얼굴이 싫었기 때문이다.
밀라이라는 그녀가 너무 못생겨서 꼴도 보기 싫다고 짜증을 부리곤 했다.
로렌스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는 일조차 좀처럼 없었다.
하긴, 오누이 간에 누가 상대의 얼굴에 관심을 갖겠는가.
로렌스의 차림새며 여자 문제까지 보살펴주어야 했던 아르티제아 쪽이라면 모를까.
아르티제아는 거울에서 다시 등을 돌려 침실로 돌아왔다.
자신이 돌아올 예정은 없었다. 그녀의 목적은 시간을 되돌려 세드릭에게 다시 한 번의 기회를 더 주는 것이었다.
자신만 없더라도 로렌스의 세력은 퍽 약화될 것이다.
밀라이라는 황제의 마음을 맞추는 솜씨는 빼어났지만, 성격이 급했다. 무슨 계교를 꾸미더라도 꼭 흔적을 남기고야 말았다.
로렌스는 애초부터 음모를 꾸미는 타입은 아니었다.
게다가 세드릭을 경계했던 것은 원래는 자신뿐이었다.
그가 아직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황제의 조카로 있을 때부터 아르티제아는 그를 견제하다가 손발을 다 잘라내고야 말았다.
그러니 자신이 견제하지 않으면, 세드릭은 아마도 결정적인 순간까지 힘을 온존하고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그를 해쳤는데도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로렌스에게 저항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돌아와 버렸다.’
그렇다면 뭔가를 해야 했다.
마법진이 잘못되어 돌아온 것이든, 다른 문제 때문이든, 살아남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대의 힘이 필요하다.」
아르티제아는 세드릭이 고개를 숙였던 것을 생각했다.
가슴을 돌로 내리치는 듯이 아파져서 아르티제아는 가만히 왼쪽 가슴에 손을 얹었다.
‘악마에게 무릎을 꿇은 대가로, 당신은 당신 대신 손을 더럽힐 악마를 얻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서약 같았다.
아르티제아는 책상 쪽으로 갔다.
책상 서랍 바닥에는 일기장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일기를 꺼내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제국력 482년 6월 2일》
8일 전에 아르티제아는 18살이 되었다.
로산 후작의 작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20살의 생일까지는 아직도 2 년 가까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