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42
악녀는 두 번 산다 42화
에브론 대공저의 정원은 상당히 방치되어 있었다.
저택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주인이 보살피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후원에는 말과 사냥개가 방목되었고, 한가한 하인들이 숨어서 노닥거렸다. 오래된 낙엽과 나뭇가지도 제멋대로 얽혀 미감과는 전혀 상관없는 공간이었다.
세드릭이 체면을 따지지 않는 탓에 남의 눈에 띄는 곳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정문 쪽은 그나마 관리되고 있었지만, 기껏해야 제때 잔디를 깎고 나뭇가지를 쳐주는 정도였다.
“길을 새로 내야겠습니다.”
후원의 풀은 제멋대로 자라 있었다. 최근에 서둘러 풀을 깎아 오솔길을 냈지만, 고운 옷을 입은 여자가 편하게 다닐 만하지는 않았다.
세드릭은 민망한 얼굴이 되었다. 잘 드나들지도 않는 후원, 방비만 잘되어 있으면 상관없지 않겠느냐고 생각했었다. 말과 개를 풀어놓은 것도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르티제아와 같이 걷자니 마음 쓰이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것도 괜찮은데요. 정원이 아니라 숲에 온 것 같고.”
“…….”
아르티제아는 아무 생각도 없이 말했다. 세드릭이 얼굴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정원사를 소집해야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안스가르가 새로 고용할 사람들을 불러들였다고 이야기했어요. 지금까지는 정원사가 두 명뿐이었다고 하더군요. 이 저택은 넓으니까, 두 사람이 다 관리하기는 어려웠겠지요.”
“정원사를 멀리에서 불러온다고 합니까?”
“네. 대공령에서요.”
세드릭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쓰는 쪽이 낫잖아요. 정원의 구조는 특히나 보안에 중요한 부분이고.”
“저도 알긴 합니다만……. 그래도 우선 임시로라도 길을 깔게 해야겠습니다.”
“낭비예요.”
“언제 정돈될지도 모르는데요. 지금 상태로는 당신이 걷기 어렵지 않습니까?”
세드릭이 드레스 밑자락에 풀물이 드는 것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천이라도 하나 대면 된다. 구둣발로 걷기 좀 어렵긴 했다. 아르티제아는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고 뭉쳐진 풀무더기를 건넜다.
“가끔이니까요. 오히려 기분 전환이 되는 것 같은데요?”
“가끔이면 안 됩니다.”
아르티제아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의사가 권하지 않았습니까? 산책 정도는 매일 해주라고.”
“……신경 쓰고 있어요.”
“의사 권유만큼 충분히 신경 쓰지 않고 있지요? 오늘 안스가르에게 제가 혼났습니다.”
“매일 아침을 함께 먹고 있잖아요. 저에게 마음 써주시는 건 그걸로 충분해요. 해야 할 이야기도 그때 하고 있고요.”
“제가 자꾸 얼굴을 들이미는 게 귀찮습니까?”
“아뇨. 그렇지 않아요.”
아르티제아는 난처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귀찮다고 생각한 일은 없다. 다만, 자신에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해야 할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그랬다.
아르티제아는 세드릭을 잘 알지만, 세드릭은 그녀를 잘 알지 못했다.
계약 결혼이라 해도 결혼이다. 이혼을 한다 하더라도 갈라서서 영영 모르는 사이가 되자는 것도 아니다.
부부만이 아니라 주종 간에도 그에 합당한 이해와 신뢰가 필요하다.
아르티제아는 그것을 죽을 만큼 잘 알고 있었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뭐가요?”
“제가 솔직하게 모든 걸 말씀드리지 못해서요.”
아르티제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세드릭이 의아하게 물었다.
“제가 추궁하는 것처럼 들렸습니까?”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아르티제아는 망설였다.
그녀는 타인에게서 이해받는 것을 포기한 지가 오래되었다.
차라리 프레일처럼 자기와 동류의 사고방식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괜찮다.
자기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해시키려고 애쓰는 것도 괜찮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떠나서 인간적으로 이해해달라고 말하는 것은 망설여졌다.
내가 악랄한 인간이라도, 미래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믿어달라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아르티제아는 그렇게 청하는 것보다 그냥 자신이 악인임을 인정하는 게 편했다.
내가 지옥에 떨어질 악인이니, 나를 두려워하고 증오해서 내 뜻대로 움직이라고 하는 게 편했다.
세드릭은 믿어 줄 수 있는 사람임을, 적어도 그러려고 애써줄 수 있는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최후의 순간에도 손쉽게 그녀를 비난하는 길을 택하는 대신에, 세상을 위해 애써달라고 고개 숙일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앎’과 아르티제아의 경험은 일치하지 않았다.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리 없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조차도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제가 세드릭 님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혹은 악독한 짓을 저질렀다고 해도, 절대로 적의를 가지고 그러는 건 아닐 테니까…….”
아르티제아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뭔가를 알게 되시면, 이유를 한 번 물어봐 주세요.”
그렇게 해준다면, 머리를 풀어헤치고 교수대에 오르게 되더라도 기쁘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세드릭이 잠시 말이 없었다.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물어봐야 하는데, 이상하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분명히, 그런 일이 생겼을 때에, 자신은 그 이유 또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무심결에 손을 뻗었다. 내리 깔린 아르티제아의 속눈썹이 반짝거려서, 눈물이 맺힌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세드릭 님?”
“아니, 아닙니다. 아무것도.”
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손을 내렸다.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세드릭은 생각했다. 그녀가 자기 몰래 험한 일을 하리라고, 왜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다고도.
셋 다 이상한 생각이었다. 마치 옛날 일을 떠올리듯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르티제아는 그에게 계략을 꾸미기 전에 상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녀가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로산 후작가의 일까지 세드릭이 시시콜콜 간섭할 것은 없었다.
그녀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그 늘을 숨기려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세드릭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르티제아는 머뭇거렸다.
“길이 험합니다. 집 안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네.”
아르티제아는 조심스럽게 세드릭의 손 위에 자기 손을 얹어놓았다.
세드릭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자신에게 팔짱을 끼도록 했다.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은 지금도 들었다. 하지만 아직은 이르니 이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조만간에 제대로 길을 깔도록 하지요. 운동 삼아 산책을 할 거라면, 그게 좋겠습니다.”
“네.”
세드릭의 옆구리에 끼인 손과 손목이 따뜻해졌다.
아르티제아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나란히 걸으니, 정면을 향한 세드릭의 눈에 그 얼굴이 띄지 않아 다행이었다.
둘은 잠시 말없이 조금 더 걸었다.
세드릭이 문득 물었다.
“그러고 보니, 결혼식 준비에는 도와줄 일 없습니까? 아니, 도와준다고 해야 할까……, 제가 할 일.”
“없어요.”
아르티제아가 즉각 대답했다. 세드릭이 난처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단호하게 말할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초대장은 모두 작성하셨죠?”
“예. 황제 폐하와 로이가르 대공에게 보낼 것만 자필로 쓰고, 나머지는 안스가르가 책임지고 관리할 겁니다.”
“그럼 됐어요. 예복도 맞추셨고, 나머지는 제가 할게요.”
“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당신은 엄청나게 바빠 보이는데. 할 일도 많고요.”
그렇긴 했다.
결혼과 후계자 탄생, 장례는 귀족 가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이중에서도 가문 간의 결합이 이루어지는 결혼만큼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때도 없었다.
아르티제아에게는 그런 일들을 대신 처리해줄 부모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로산 후작가를 수습하면서 결혼식 준비를 해야 했다.
아르티제아의 결혼식 준비에는 웨딩드레스와 예물을 마련하거나 청첩장을 준비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여러 이해관계를 조절해가면서 미래를 위해 포석을 놓는 것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하루에 쓸 수 있는 체력과 정신력에는 한계가 있다. 아르티제아는 그다지 기운 넘치는 몸이 아닌 만큼 배분에 신경을 써야 했다.
명징한 정신력을 유지하기 위해 휴식도 해야 하니, 아무래도 보통 신부들이 신경 쓰는 문제들은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세드릭은 그게 안타까웠다.
“일이 바빠서 당신 자신을 위한 준비는 거의 못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죠.”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티아. 제가 잡무를 하고, 당신은 당신을 위한 준비를 해야지요.”
“잡무는 안스가르가 맡아주고 있어요. 가장 중요한 준비를 차질 없이 하고 있어요. 염려마세요.”
아르티제아가 그렇게 대답했다.
세드릭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답답한데, 이유를 정확히 잘 알 수 없었다.
그는 아르티제아가 좀 더 이 결혼에 마음을 써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하고자 하는 일보다 결혼식이 중요하다거나, 여자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결혼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결혼은 결혼이다.
아무리 기한이 딸린 계약 결혼이라고는 해도, 결혼이다. 그리고 아르티제아는 신부이다.
그리고 아르티제아가 결혼식에서 좋은 기억을 남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자기가 주역으로 있어본 적이 없는 소녀이기에 더더욱 그랬다.
한순간이라도 행복한 얼굴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이건 우리 결혼입니다.”
말주변이 없어서 겨우 짜낸 말은 그런 것이었다.
이 결혼식의 주인공은 계략도, 음모도 아니다.
‘우리 결혼’이다. 입으로 말해놓고 나니 새삼스럽게 구체적으로 느껴져, 심장이 쿵쿵거렸다.
“제가 초조해하는 것처럼 보이나요?”
“조금은.”
세드릭은 어떻게 해야 자기 심정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당신과 약혼하면서 서부군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습니다. 제가 처음에, 우선 서부군을 위해서 계약을 받아들이겠노라고 말한 걸 기억합니까?”
“네.”
“우리 목적은 일차적으로 달성되었습니다. 저는 서부군의 개선식을 허락받았고, 당신은 밀라이라에게서 빠져나왔지요. 그러니까 이제 천천히 생각해요. 적어도 결혼식까지는. 계약 기한이 2년이라고 해도, 실제로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세드릭이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르티제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얼굴에 오르는 화기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걱정 마세요. 잊고 있는 건 아니에요.”
‘우리 결혼’이라는 단어가 이상하게 귓속을 간지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