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54
악녀는 두 번 산다 54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이거 갖다 넣어. 그리고 내 잠옷 가져와.”
“설마, 그 오래된 회색 잠옷 입고 주무시겠다는 거예요? 첫날밤인데?”
“……그게 편해. 따뜻하고.”
아르티제아는 아주 잠깐 망설였다.
지금까지 입던 잠옷은 몇 년이나 된 옷이었다.
키가 크면서 소매와 바지가 짧아져서 천을 덧대 꿰맸다. 게다가 너무 오래 입어서 보풀도 일어나고 너덜거렸다.
그래도 이 분홍색 잠옷보다야 그게 백배 나았다.
“말도 안 되는 말씀 하지 마세요! 그리고 내드리고 싶어도 있지도 않아요.”
“왜?”
“신혼여행에 누가 그런 잠옷을 챙겨 와요? 새 안주인이 그런 잠옷을 입은 걸 보면 에브론 대공가 사람들은 또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소피.”
“세탁실에도 못 내놓는다구요. 처음에 대공저에서도 무슨 마님 옷이 다 이러냐고 다들 불쌍하게 여겨서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골이 아팠다.
그래. 그렇다 치자. 실내복이고 잠옷이고 모두 새로 만들 필요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에밀리와 소피에게 필요한 걸 전부 구비하라고 맡긴 게 아니겠는가.
하지만 설마 이런 걸 만들어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다른 거라도 가져와. 실내복이나 가운이 있을 거 아니니?”
“옷궤는 이미 전부 배에 실어놨어요. 이거하고 내일 아침에 입으실 옷만 남겨뒀어요.”
진퇴양난이었다.
“걱정 마세요. 저랑 마담 에밀리가 엄청 고심해서 마님에게 제일 어울리게, 예뻐 보이게 만든 거예요.”
소피가 활짝 웃었다.
“분명히 주인님도 새로 반하실 거예요.”
아르티제아는 어지럼증을 느꼈다.
알아서 하라고 맡긴 것을 절실하게 후회했다. 바쁜 시간을 쪼개서라도 확인을 했어야 했다.
하다못해 짐 싸는 거라도 봤어야 했는데.
“어서요.”
소피가 팔랑팔랑 잠옷을 흔들었다.
결국 아르티제아는 패전했다.
자정 가까운 시간에 배에 실은 옷궤를 내리라거나 수도의 저택에 가서 다른 옷을 가져오라고 패악을 떨 만한 성품은 못 되었던 탓이다.
살랑살랑한 잠옷이 다리에 휘감겨 자꾸 아르티제아를 이상한 기분으로 만들었다.
그 옷을 입고 신방에 들어가는 것은 더더욱.
신방은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다.
미리부터 환기를 잘하고 향초를 피워 놓아서 은은한 향기가 감돌았다. 창에는 부드러운 연주황색의 커튼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과하게 큰 침대가 하나 놓여 있었다. 당연하지만.
아르티제아는 이 순간까지 신방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밖에서야 뭐라고 하든, 식을 올렸든 안 올렸든, 이 결혼은 실질적인 결혼이 아니다.
세드릭을 신뢰하고 있기도 했다. 그는 정절이 뭔지 아는 남자다.
그렇기 때문에 신방에 드는 문제는 걱정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아르티제아는 먼저 나서서 에브론 대공령까지 가는 배편에서도 같은 선실을 쓰겠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은가. 연애 결혼하는 신혼부부가 신혼여행에서 각방을 쓴다면 외부에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는 말이다.
다시 말해, 외부적인 문제만 생각했다
생글거리며 웃는 소피와 잠옷 너무 예쁘다고 환호하는 앨리스의 손에 밀려 신방에 들어가고 나서야 아르티제아는 내부적인 문제를 깨달았다.
‘이걸 입고 여기 누워서 같이 자라고?’
그러기로 했으면서 새삼스럽게 미친 소리 같았다. 잠을 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선실을 같이 쓰자고 말했을 때에 세드릭이 왜 그렇게 이상한 얼굴을 했는지 아르티제아는 비로소 깨달았다.
“휴우.”
아르티제아는 방 안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타개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신부가 첫날밤에 신방을 나가 다른 곳에서 자면 무슨 소문이 퍼질지 알 수 없었다.
이 저택의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어 줄 수도 있었다.
대신 에브론 대공가 사람들에게 원치 않는 염려와 걱정을 살 것이다. 그 뒤처리가 더 문제가 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역시 헛된 생각이다. 세드릭이 옷 차림새 같은 것에 일일이 신경 쓸 것 같지는 않았다.
‘누더기를 입으면 불쌍하다고는 생각하겠지만.’
그래도 마음이 쓰여서 아르티제아는 침대에서 이불을 끌어냈다. 그리고 소파에 웅크리고 누워서 이불을 덮었다 .
몹시 피곤했기에 아르티제아는 금세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꿈결에서도 신경이 예민했다. 그 탓에 아르티제아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세드릭이 들어오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지금 자정도 넘었지요? 빠져나올 타이밍이 애매해서…….”
세드릭이 사과하다 말고 아르티제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멈추었다. 세드릭의 목덜미와 귀 끝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아르티제아는 그가 왜 그러는지 처음에는 몰랐다. 그러다가 이불을 떨어뜨린 것을 깨닫고 얼른 주워 올렸다.
그냥 옷감이 좀 얇을 뿐이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마음을 다져놨다. 노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부끄러워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런 결심은 아무 소용없었다. 민망해 죽을 것 같았다.
“그, 그게, 소피가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신부 잠옷이라고 하는 걸 만든 모양이에요. 이상하죠? 다른 옷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옷궤가 전부 배에 실려 있다고 하고, 이 밤중에 그걸 들어낼 수는 없으니까…….”
아르티제아는 변명을 속사처럼 쏘아냈다.
세드릭이 그러지 말라고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쓰다듬었다. 그래도 벌게진 안색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상하지 않습니다. 귀엽, 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아르티제아가 빨개질 차례였다. 반면, 머릿속은 하얘졌다.
세드릭이 머뭇거리다가 아르티제아 쪽으로 다가왔다.
“이, 이건 마담 에밀리가…….”
입이 제멋대로 더 변명하려는데, 세드릭이 뻗은 손이 아르티제아의 흐트러진 머리칼에 살짝 닿았다.
아르티제아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이불을 방어막처럼 껴안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침대는 세드릭 님이 쓰세요. 전 소파에서 잘게요.”
“티아.”
잠시 침묵이 돌았다. 세드릭이 작게 숨을 뱉었다.
그가 침대 쪽으로 가서 털썩 앉았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 아뇨.”
아르티제아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금 전에 무슨 일이 벌어지려고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같은 침대를 쓰는 게 불편하다면, 제가 소파에서 자겠습니다.”
“아뇨, 전 이불은 양보할 수 없어서요. 대신 침대를 양보할게요.”
“이불도, 침대도 둘 다 쓰십시오. 추운 날씨도 아니니 전 이불 필요 없습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주군을 소파에 재우고 어떻게 침대에서 편하게 잘 수 있겠어요?”
“하지만…….”
“제가 훨씬 작잖아요. 세드릭 님이 이 소파에 누우려면 다리를 반으로 접어도 잘 안 될 것 같은데요.”
“티아.”
세드릭이 그녀를 불렀다. 아르티제아는 이번에도 그가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말했다.
“불 좀 꺼주실래요?”
“……알겠습니다. 당신이 그쪽이 편하다면, 그렇게 하죠.”
아르티제아는 내심으로 안도했다.
곧 침실이 어두워졌다. 세드릭의 그림자가 침대에 누웠다.
아르티제아는 비로소 안심하여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 덮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이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피곤해서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는데.
아르티제아는 자기가 날숨과 들숨까지 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세드릭도 간간이 한숨을 내쉬며 불규칙한 숨소리를 내는 것을 알았다.
잠이 오지 않는다면, 대화를 하면 좋을 것이다.
오늘 결혼식에 대한 사후평가도 해야 했다. 원래는 자기 전에 세드릭과 같이 결과를 확인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다듬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림자뿐인데, 왜 이렇게 긴장되는 걸까.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세드릭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안되겠습니다.”
“네?”
“어차피 한동안 같은 방을 써야 하는데, 익숙해지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선실에서 이렇게 따로 잘 수도 없고요.”
아르티제아가 무어라고 대답하기 전에 그가 다가왔다.
그리고 팔을 뻗어 아르티제아를 이불째로 안아들었다.
“아!”
아르티제아는 놀라서 버둥거렸다.
세드릭은 수월하게 그녀를 침대까지 데려가 내려놓았다.
“안 봤습니다.”
아르티제아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잠깐 알아듣지 못했다.
뒤늦게야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어서 몸을 보지 않았다는 뜻이라는 것을 알았다.
“염려 마십시오. 아무 짓도 안 합니다.”
“그런 걱정을, 하는 게 아니에요.”
그 말은 진심인데도, 숨이 가빠서 목소리까지 떨렸다.
세드릭이 이불 안으로 들어왔다. 이불 안의 온도가 훅 올라갔다.
아르티제아는 주춤주춤 그에게 등을 돌리고 거리를 벌려 돌아누웠다. 침대가 넓어서 충분히 닿지 않고 잘 수 있었다.
하지만 세드릭의 손이 뒤에서부터 그녀를 부드럽게 감아 안았다.
“익숙해지세요. 저도 그러겠습니다.”
“네…….”
나직한 목소리가 뇌리까지 파고드는 것 같아서 아르티제아는 몸서리를 쳤다.
차가운 손발이 세드릭의 체온으로 데워지면서 간질간질해졌다. 아르티제아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숨을 죽였다.
또다시 침묵이 찾아들었다.
아르티제아는 이번에는 숨소리가 아니라 심장 박동 소리를 세게 되었다.
귀에 닿는 세드릭의 심장 박동 소리는 자신의 것보다 훨씬 힘찼다.
규칙적인 박동에 집중하는 사이에 비로소 졸음이 내려왔다.
긴장했던 시간이 길었기 때문인지 몸이 풀어지자 아르티제아는 순식간에 꿈의 경계선까지 끌려갔다.
“티아, 잠들었어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세드릭은 살며시 고개를 들어서 아르티제아의 얼굴을 살폈다.
색색거리는 호흡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따뜻해져서인지 온종일 창백했던 입술색도 분홍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세드릭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관자놀이에 입술을 댔다.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는데.’
아르티제아가 자신을 남자로 보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래도 문을 열고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에는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사랑스러운 모습이었으니까.
‘불측한 생각은 그만둬야지.’
이렇게 무방비하게 잠들어 버릴 정도로 믿어주고 있는데.
줄곧 안아주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이렇게 안아보니, 안아주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냥 자신이 안고 싶었던 것이었다.
생각만큼이나 가늘고 여려서 품에서 부서져 사라질 것 같았다.
체온은 따뜻했다. 세드릭은 자기가 그녀의 손발을 따뜻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는 오랫동안 신기루를 쫓다가 그것을 품에 안은 듯한 착각을 느꼈다. 꿈에서 깨어나면 그것이 모두 피범벅으로 부서질까 봐 겁이 났다.
세드릭은 한숨을 내쉬고 가볍게 아르티제아의 왼쪽 손목을 쥐었다. 잠자리에 들 시간인데도 그녀는 다이아몬드 팔찌를 끼고 있었다.
심장이 제멋대로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