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55
악녀는 두 번 산다 55화
“으스스해졌군.”
로산 저택 앞에서 내리면서 황제가 말했다.
한동안 소홀히 한 사이에 저택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정원 관리도 잘 되어 있지 않았고, 한눈에 보기에도 청소 상태가 별로였다.
“집사가 죽었습니다. 강도를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시종이 일깨워 주었다. 황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 만하군. 티아는 에브론 대공저에 있었고, 로렌스 그놈도 다른 집에 머무르고 있다고 했으니까. 밀라이라는 머리 싸매고 누워 있었을 테지.”
황제는 시종에게 눈총을 주었다.
“좀 신경 쓰지 않고 무얼 했느냐?”
“화, 황공합니다. 평소에 로산 저택의 일에 관여하는 걸 로렌스 님이 싫어하셨기 때문에…….”
“그건 그놈이 집에 있을 때 말이지.”
황제가 못마땅하게 말했다.
“괜찮은 놈 찾아봐. 인내심 있고 일 잘하는 놈으로.”
“예.”
시종이 깊숙이 고개를 조아렸다.
“로렌스 놈은 아직 피로연에 있지?”
“예.”
“사람 하나 안 보낸 건가?”
황제는 그렇게 말하면서 성큼성큼 계단을 밟았다.
적은 수의 고용인들이 깜짝 놀라 얼른 무릎을 꿇었다.
다수가 아르티제아를 따라 옮겨가 버렸기 때문에 저택에 남은 고용인이 많지 않았다.
황제는 밀라이라의 침실 쪽으로 올라갔다.
쟁반을 든 하녀 노라가 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황제와 시종의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노라는 예법에 서툴렀다. 로산 저택에서 오래 일하기는 했다. 그러나 세탁실에서만 일했다. 황제를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무릎을 꿇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쟁반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노라가 부들부들 떨자 하인이 얼른 대신 쟁반을 받아주었다.
시종이 물었다.
“무얼 하고 있느냐?”
“화, 황공합니다. 아, 아르티제아 아가씨께서, 그게…….”
“티아가, 무얼?”
“그, 그게……, 마님께서 속이 많이 상해서 돌아오실 거라고, 호박과 레몬으로 만든 수프를 준비해두라고 하셨는데, 그게…….”
노라는 떠듬거리다가 이번에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아르티제아가 앨리스를 통해 그녀를 부른 것은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내일이 내 결혼식이야.」
「예. 축하드립니다.」
「결혼 축하를 받자고 널 부른 건 아니고, 시킬 일이 있다. 내일 아침에 주방에 말해서 호박과 레몬으로 만든 수프를 만들어 달라고 해.」
「예?」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오시면 그걸 가져다드려.」
「아가씨, 저는 세탁실 하녀예요.」
「아마 어머니는 몹시 기분이 나빠서 너한테 관심을 가지시지 않을 거다. 술을 드실 가능성이 훨씬 높고, 어머니 앞에 진짜로 나설 필요는 없어.」
아르티제아는 말했다.
「침실 근처에서 기웃거리다가 황제 폐하께서 오시면, 내가 수프를 준비시켰다고 말해. 그거면 된다. 폐하께서 오시지 않으면 네가 알아서 하거라. 가져다드리든, 아니든.」
노라는 숨을 멈췄다.
「제가 그 일을 해드리면, 소개장을 써주실 건가요?」
「노라!」
앨리스가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인이 억센 손으로 노라의 팔을 잡아 꿇렸다.
아르티제아가 차가운 눈으로 노라를 내려다보았다.
「감히 네 주제에 나와 거래를 하려 하느냐?」
「아, 아가씨…….」
노라는 로산 저택에서 나오고 싶었다.
로산 저택이 기울어가는 것이 노라의 눈에도 보였다. 밀라이라는 후한 주인도 아니었을 뿐더러 잔인하기까지 했다. 붙어 있을 이유가 없었다.
대대로 일하던 고용인들은 벌써 한슨 일가의 인맥을 타고 로산 후작가의 다른 저택이나 사업장으로 옮겨갔다.
그렇지만 노라처럼 딱히 인맥도 없는 하녀들은 쉽사리 직장을 옮길 수 없었다. 소개장을 써주어야 할 빌이 죽었기 때문이다.
밀라이라는 갈수록 포악해졌다. 하녀들이 자꾸만 그만두려 했기 때문에 하녀장도 소개장을 써주지 않았다.
그래서 앨리스가 내민 손을 동아줄처럼 잡았다.
소피가 그렇게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아가씨의 하녀가 될 수 있다면 좋다. 그게 어렵다면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도록 소개장만 하나 써 주어도 좋았다.
이 기회에 확답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실수였다.
아르티제아가 말했다.
「이것은 네가 쓸모가 있는지, 내 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일일 뿐이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앨리스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아르티제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앨리스의 얼굴을 봐서 용서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황제 폐하를 직접 뵙고 말씀 올리는 일이다. 네가 네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쓸모가 있다면, 내게 굳이 상을 청할 필요조차 없겠지.」
그리고 이제 노라는 자기가 쓸모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냥 수프를 들고 기웃대다가 황제에게 사실대로 말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태연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황제의 앞이라고 생각하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황제가 노라를 답답해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시종이 얼른 대꾸했다.
“됐다. 수프는 내가 가지고 들어갈 테니 너는 돌아가라.”
“화, 황공합니다.”
노라는 고개 숙여 절했다. 그리고 무릎걸음으로 달아나듯이 그 자리를 떠났다.
황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티아가 낫군.”
“원래 딸들의 마음씀씀이가 더 섬세하지 않습니까?”
“짐의 자식 중에 티아만 한 아이가 있었다면 벌써 후사를 결정하고도 남았을 거야.”
“그렇게 높이 평가하십니까?”
시종이 놀라서 물었다. 황제가 한탄했다.
“티아는 자기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고 있어. 자존심이나 감정을 뒤로 미뤄둘 줄 알지. 지나치게 소심하고 겁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에게 황후에게 한 것을 보니 결단력도 있고 대범하기도 하군.”
황제가 문을 열라고 눈짓했다.
침실의 문을 열자 바닥에 빈 술병이 여러 개 굴러다녔다. 밀라이라의 측근 하녀조차 곁을 지키지 않고 있었다.
황제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긴 한숨을 내쉬고 표정을 풀었다.
밀라이라는 술에 진탕 취한 채 누워 있었다. 사람이 들어오는 기척을 느꼈지만, 반응하지 않았다. 그럴 기력도 없었다.
눈물이 마르지도 않고 끊임없이 흘렀다. 너무 기가 막히고 서러워서 죽고 싶었다.
「어머니 자체가 떳떳하지 못한데, 작위나 결혼 서약서의 이름 같은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로렌스의 그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밀라이라는 언제나 자부심 당당한 얼굴로 고개를 들고 다녔다. 세상의 값비싸고 화려한 물건은 모두 몸에 둘렀다. 자신의 말을 거역하는 사람을 용납하지 않았다.
밀라이라는 자기 손에 쥐어진 권력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일부러 사람을 짓밟았다.
사교계의 귀부인들이 무릎을 구부리고 인사하면 비로소 만족할 수 있었다. 마차를 타고 가다가 앞에 걸린 자를 죽을 정도로 매질해서 집어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떳떳하지 않다는 것을 밀라이라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밀라이라는 제대로 된 결혼식을 한 적이 없었다.
그녀의 결혼은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노인과 마주 앉아 서류에 서명하는 것이 전부였다.
부케도, 하객도 없었다. 어머니에게 받아야 할 순금 보주도 없었다.
결혼을 공증하러 온 사제는 더러운 것이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서명이 끝나자마자 제대로 축복의 말도 내리지 않고 서둘러 떠났다.
황제는 그날 밤에 그녀에게 새하얀 드레스를 입혀 주었다.
하지만 그 웨딩드레스의 치마는 온통 망사로 되어 있어 안이 다 비쳐 보였다. 광란 같은 정사의 흔적이 남아 남들처럼 소중하게 보관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총애의 증거이기는 했지만, 그녀가 떳떳하게 결혼했다는 증거는 아니었다.
「황후궁에서 시체처럼 지내는 여자가 무슨 아내냐? 짐의 처는 너이지.」
황제는 종종 그렇게 말하며 밀라이라를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얼굴로 보았다.
황제는 그녀에게 수많은 것을 주었다.
밀라이라는 황실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를 타고 다녔다. 황실 행사에 황제의 손을 잡고 들어가 아내 노릇을 하기도 했다.
황제는 가끔 그녀를 무릎에 앉히고 손에 국새를 쥐여 주었다.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서류에 직접 도장을 찍어본 적도 있었다.
밀라이라는 황제의 침실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황후의 자리만은 밀라이라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밀라이라는 두려울 게 없는 황제의 총희였다. 하지만 황제의 정부이지, 황후가 아니다.
황제는 밀라이라에게 기분대로 줄 수 있는 건 전부 다 주었다. 하지만 신의 이름으로 보호받는 정당한 권리는 하나도 주지 않았다.
황제가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침대에 들어가 있는 것은 밀라이라일 것이다.
그러나 황제와 같은 무덤에 안장되어 비석에 이름을 새기는 것은 황후일 것이다.
로렌스의 말이 맞다. 그녀는 떳떳하지 못한 몸이었다.
하지만 로렌스가 자신을 비난할 줄은 몰랐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더럽다고 비난해도, 로렌스와 아르티제아만은 그래서는 안 되었다.
“어떻게 그래. 나한테 어떻게…….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밀라이라는 신음하듯이 중얼거렸다.
황제가 다가와 밀라이라가 누워 있는 침대 가에 앉았다.
매트리스가 눌리며 몸이 기울어졌다. 밀라이라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황제가 부드러운 손길로 밀라이라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화가 났어?”
“……가세요.”
밀라이라는 갈라터진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를 이렇게 슬프게 하다니 아무래도 짐이 로렌스를 크게 혼내줘야겠군.”
“그러지 마세요.”
“그래도 또 로렌스를 걱정해?”
밀라이라는 흐느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폐하는 처음부터 다 알고 계셨죠?”
“짐이? 무얼?”
“티아가 황후의 시녀가 된 것도, 로렌스가 왜 저보고 오지 말라고 했는지도. 그러니까 오늘 결혼식에 함께 가자는 말씀도 안 하시고…….”
“아니야. 짐이 아무리 눈과 귀가 밝다고 해도 황후궁 안에서 있었던 일까지 어떻게 알았겠는가?”
황제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티아가 황후궁에 가서 결혼 선물을 받아온 것은 알았지. 헌데, 그렇게 인사 가는 건 신랑이 세드릭이니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그렇게 큰일까지 해냈을 줄은 상상도 못했어.”
“……티아를, 칭찬하시는군요.”
밀라이라의 중얼거림에 황제가 난처한 신음을 흘렸다.
“다들, 어떻게 저한테 이럴 수가…….”
흐느낌 소리가 또다시 커졌다.
“황후가 결국은 다 가져갔네요. 내 아들도, 내 딸도, 내가 그년보다 나은 건 그것밖에 없었는데.”
“마음 풀어. 자네한테는 짐이 있지 않은가? 애들은 어차피 자라면 다 떠나게 되어 있어. 짐이 무엇이든 들어줄 텐데, 뭐가 이리 서러워?”
황제가 밀라이라를 끌어당겼다. 밀라이라는 힘없이 그의 품에 안겼다.
‘그럼 절 황후로 만들어줄 수 있어요? 떳떳하게 해줄 수 있어요?’
밀라이라는 그런 어리석은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젊었을 때에는 몇 번 입 밖에 내어 졸라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밀라이라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황제를 믿지도 않았다.
사내 따위는 믿을 것이 못 된다.
지금 그는 자신을 사랑한다. 귀여워한다.
그러나 세월이 가서 미모가 시들면 버려질 것이다. 마음을 상하게 해도 버려질 것이다. 그를 즐겁게 해주지 못하게 되어도 버려질 것이다.
「남는 건 결국 핏줄뿐이야.」
아르티제아에게 그렇게 말한 것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 핏줄조차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