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59
악녀는 두 번 산다 59화
“세드릭 님은 좀 더 자부심을 가지셔도 좋아요.”
아르티제아가 말했다.
“세드릭 님을 만들어낸 것은 에브론 대공의 작위에 따르는 권위도, 제국이 떠안긴 명예도 아니라 세드릭 님 자신이에요.”
“티아.”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는 하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같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지요.”
그렇다면 누가 황제가 되어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아르티제아는 그것을 생각하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권력으로 희생을 강요하셨다면, 서부군이 세드릭 님을 따르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따라오겠다는 사람이 많았다면서요? 세드릭 님이 받아 주셨다면, 군사들이 고향을 등지고 가족을 이끌고 척박한 땅으로 이주했을 거예요. 그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알고 계셨습니까? 아, 프레일이 말했군요.”
“전공의 크기가 아니라 그런 믿음과 희망을 줄 수 있었기 때문에 세드릭 님이 영웅으로 대접받으신 거지요.”
에브론 대공령만을 생각했다면, 받아들이는 게 옳았다. 벽에 부딪친 인구증가율과 늘 위태로운 군사력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세드릭은 그러지 않았다.
에브론 대공령의 내부적인 사정도 있긴 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서부에서 훈련된 병력을 빼냄으로써 다음 몬스터 웨이브에서 민간인이 큰 피해를 보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세드릭 님을 믿는 사람이 이 대공령의 영민 숫자만큼 있고, 또 제국군에도 수없이 많아요. 그런 자신을 믿어주셔야죠.”
세드릭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아르티제아가 빙긋 웃었다.
“저도 거기 포함이고요.”
세드릭은 아르티제아에게서 눈을 돌렸다.
“당신은 가끔 저를 너무 당혹하게 합니다.”
“전 없는 말은 안 해요.”
“압니다.”
진심이 담긴 찬사를 들어본 적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아르티제아의 말은 유난히도 마음을 뒤흔드는 구석이 있었다.
힘든 싸움을 끝내고 살아남은 병사들의 환호성을 들을 때처럼 가슴이 부푼다. 자신이 자랑스럽기도 하고, 상대가 자랑스럽기도 하고,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기뻤다.
그런 자신이 부끄러웠다.
세드릭은 고개를 한 번 털어 감정도 함께 털어냈다.
“이런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하죠. 음식이 식겠습니다.”
세드릭이 빵 하나를 반으로 쪼갰다. 하얀 속살이 찢어지며 김이 펄펄 났다.
“자아.”
그가 아르티제아에게 빵을 건넸다.
“뜨거우니까 조심해요.”
“아, 고마워요.”
아르티제아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목덜미가 간질간질한 느낌이었다.
세드릭이 예법을 지키지 않고 간단하게 먹는 편을 좋아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수도의 저택에서도 서재나 거실에 음식을 가져다 놓고 먹기 일쑤였다. 배에서도 좁은 공간에서 이렇게 음식을 모조리 한 테이블에 늘어놓고 순서 없이 먹었다.
하지만 벽난로 앞에서 이렇게 나란히 접시를 놓고 앉아 있으니 지나치게 친밀한 느낌이었다.
아르티제아가 깨작깨작 수프를 전부 다 비우자 세드릭이 빈 그릇을 받아서 트롤리에 놓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메인 요리가 조금 담긴 접시와 포크를 건네주었다.
“다 먹어요. 그게 저를 위하는 겁니다.”
“노력해볼게요.”
아르티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수프가 진해서 그것만으로도 배가 차 버린 기분이었다.
“체온을 유지하려면 잘 먹어야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습관을 들여놔야죠.”
“속에서 잘 안 받아서…….”
“맛이 없는 건 아니지요?”
“그런 건 아니지만요.”
심리적인 이유인 것은 아르티제아가 제일 잘 알았다. 알아도 스스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조금이라도 먹어봐요.”
세드릭은 잠시 그녀가 먹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느릿느릿하게 먹는 속도에 맞추어 자신도 천천히 먹었다.
그러다가 아르티제아의 식사가 끝날 즈음 타이밍을 봐서 입을 열었다.
“내일은…….”
“내일 영지의 재정 상황을 좀 살펴보고 싶어요.”
둘은 거의 동시에 말했다.
세드릭이 움찔했다. 말을 가로챈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아르티제아가 머뭇거렸다.
“아, 죄송해요.”
“별건 아닙니다. 내일 가묘에 가려고 합니다. 당신이 괜찮다면, 같이 가자고 청하려고 했습니다.”
“아.”
아르티제아는 짧게 신음했다.
“죄송해요. 중요한 일인데 잊고 있었네요.”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일단은 대공비의 신분이니, 가묘에 참배해야 마땅했다. 그것은 가신들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다.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정식으로 예배를 드리거나 하려는 건 아닙니다. 오랜만에 돌아왔으니 처음에는 그냥 산책 삼아 혼자서 가볍게 다녀올까 했었는데요.”
세드릭이 열이 오르는 걸 가라앉히려고 뺨을 한 번 쓰다듬었다.
특별한 용건이 아닌데 같이 외출하자고 말하는 것이다.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이왕 가는 거, 같이 가면 어떨까 했습니다. 멀지 않으니까 당신에게도 기분전환이 될 것 같아서…….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도 있고요.”
“네…….”
아르티제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허락해주는 겁니까?”
“허락 같은 표현은 너무 거창해요. 시간이 있는데 세드릭 님의 권유를 거절할 생각은 없어요.”
아르티제아가 대답했다.
“그럼 오전 중에는 가묘에 다녀오고, 오후에는 같이 보고를 받도록 하지요.”
“네, 그렇게 해요.”
그러고 나자 할 이야기가 없어져서 잠시 침묵이 돌았다.
세드릭은 몹시 부끄럽고 어색해졌다. 발뒤꿈치를 초조함이 찌르는 것 같았다.
뭔가가 목구멍까지 들어찬 것 같았다. 말하고 싶은 것이 많았고, 그 중 무엇을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비일상에서 일상으로 돌아와도, 그에게는 여전히 세상이 달라진 채였다. 익숙한 곳으로 돌아오자 오히려 자신이 변했음을 더욱 실감했다.
결국 그는 그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초조한 기분인 채로 일어섰다.
아르티제아가 그를 따라 일어섰다. 세드릭은 그릇을 전부 치워 트롤리에 얹었다.
“그냥 두세요. 하녀들이 할 텐데요.”
“여기 두고 가겠습니다.”
아르티제아가 문간까지 배웅을 나왔다.
세드릭은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하고 싶지 않은데, 좀처럼 그렇게 되지 않았다.
“티아.”
“네.”
“고맙습니다.”
“네? 뭐가요?”
세드릭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아르티제아는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자 세드릭이 후우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부끄러운 마음은 여전히 들었다.
하지만 말해버리고 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져서 자연스러운 얼굴을 할 수 있었다.
“여러 가지로요. 이야기를 들어주어서도 그렇고.”
심정이 너무 복잡해서 한 마디로 정리해서 말할 수는 없었다.
세드릭은 누군가와 같이 돌아오는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혼자였던 적은 없었다.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 항상 옆에 있었다.
가신들은 그에게 아끼는 것이 없었다. 안스가르는 전쟁터까지 그를 따라다녔다. 목숨을 걸고 그를 지킨 이도 여럿이었다.
위태로운 사선에 서 있었다. 하지만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 만들어 내는 단단한 신뢰의 그물이 발밑을 받쳤다.
사랑하는 마음은 숨길 수도, 거짓으로 만들어낼 수도 없는 것이다. 얼굴도 기억하지 못할 나이에 부모를 잃었지만, 세드릭은 부모가 주는 사랑만큼이나 많은 사랑 속에서 자랐다.
이 에브론 대공령 전체가 그의 집이었다. 그렇기에 어린 시절에 수도에 볼모로 붙잡혀 있었을 때에도, 소년이 되어 갑작스럽게 제국의 방패라는 중임이 떨어졌을 때에도, 에브론이 싫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자기가 외롭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아르티제아와 함께 돌아와 보자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있다는 사실로 가슴이 가득했다. 그렇게 되고 나서야 이렇게까지 제 삶에 빈 공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르티제아로서는 필요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한 결혼이다. 게다가 2년의 기간 한정이다. 계약 상대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그 이상이었다.
아르티제아가 아니라도 언젠가는 누군가와 결혼을 했을 것이다. 아이도 낳았을 테고, 가정도 꾸렸으리라.
그렇지만 세드릭은 자기가 그렇게 했다면, 지금처럼 충만했을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결혼 상대를 존중하고 아꼈을지도 모른다. 여자로서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아르티제아에게 그렇듯이 존경과 흠모를 함께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곁에 있어줘서 기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세드릭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저를 선택해줘서 고맙습니다.”
“이상한 말씀을 하시네요.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계셨잖아요.”
아르티제아가 고개를 조금 돌리고 바닥을 내려다보며 의식적으로 냉하게 말했다.
‘상냥하게 말하지 마세요.’
그 말이 숱하게 마음속에서 메아리쳤다.
자신은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지금 당장 검을 뽑아 목을 베어도 할 말 없는 원수였다.
애초부터 선택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세드릭이다.
세드릭이 자신을 지하 감옥에서 꺼냈다. 무릎을 꿇고, 세상을 위해서 계책을 내라고 말했다.
그가 먼저 자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이번에는 자신이 무릎을 꿇고, 그를 위해 계책을 내기로 했다.
그것뿐이다.
아르티제아는 심장 뛰는 소리가 세드릭에게 부디 들리질 않길 빌었다.
세드릭이 웃었다.
“그랬죠.”
목소리는 행복스럽게 들렸다.
그래서 아르티제아는 순간적으로 무슨 대화를 하고 있었는지를 잊어 버렸다. 세드릭이 무엇을 그랬다고 말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세드릭이 손을 뻗어서 아르티제아의 손을 잡았다.
두 손의 온도가 달라서 아르티제아의 손가락이 간질간질하게 녹았다.
뭘 어째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숨이 가빴다.
“티아.”
아르티제아는 멈칫거리다가 겨우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얼어붙었다.
깊고 그윽한 눈동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아르티제아는 숨을 멈췄다.
그리고 검은 속눈썹이 스르르 내려가 그 안에 서린 다정한 빛을 가리는 것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것이 그녀의 입술에 살짝 닿았다.
아르티제아는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세드릭이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아르티제아는 달아나지 못했다. 잡힌 것은 손인데 마치 몸 전체를 붙들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녀는 눈을 꽉 감았다. 전신의 신경이 입술에 몰리기라도 한 것처럼 예민해진다.
몸이 뜨거워지면서 긴장으로 떨렸다. 얇은 잠옷 한 겹 너머로 끌어 안겼을 때의 감촉이 피부 위로 되살아났다.
입술이 떨어졌다.
세드릭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리고 다정하게 말했다.
“잘 자요.”
아르티제아는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드릭이 문을 열고 나갔다.
탁.
문이 닫혔다.
아르티제아는 멈췄던 숨을 겨우 들이마셨다.
비로소 온몸의 혈관에 피가 도는 듯했다. 뺨이 불타오를 듯이 뜨거웠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그녀는 비척비척 뒷걸음질 치다가 아무 의자에나 털썩 앉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