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74
악녀는 두 번 산다 74화
뒤에 남은 세드릭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잠시 앉아 있었다.
리시아가 몸 둘 바를 모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드릭이 그녀에게 물었다.
“역시 내가 뭘 잘못했나?”
“전 모르죠.”
이게 몇 번째인지 몰랐다.
세드릭은 이 며칠 사이에 아르티제아와 제대로 이야기해본 것 같지 않았다.
떠넘길 시녀가 생긴 탓인 건가. 세드릭은 검지로 미간을 문지르며 생각했다.
아니면,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뭔가 그녀가 실망할 만한 일이라도 저질렀던 걸까.
리시아가 말했다.
“고민하실 게 아니라 따라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래야겠다.”
세드릭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리시아는 혹시 자기 때문에 그런 건가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설마.”
아무리 생각해봐도 오해를 살 만한 일이 전혀 없었다. 자의식 과잉 이라고 생각하고 그녀는 그것을 잊어버렸다.
아르티제아는 서재에 가 있었다.
써야 할 문서가 몇 통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겨울이 끝나기 전에 계획을 다 정돈해두고 싶었다.
적절한 휴식 시간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돌아가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마음이 초조했다.
도통 식욕이 없었다. 달콤한 쿠키 몇 조각인데, 그것조차도 잘 넘어가지 않았다. 아르티제아는 하나도 다 먹지 못하고 내려놓았다.
아르티제아는 요즘에 일이 모두 끝난 이후의 일을 구체적으로 그려 보기 시작했다.
요행히 죽지 않는다면, 어딘가 동부의 한적한 시골에 별장을 하나 세우는 게 좋겠다.
거기에 갖고 싶은 책을 모두 사들여 모아놓는 건 어떨까. 매일 산책을 하고 책을 읽고, 보내지 못할 편지들을 쓰면서 살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리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님, 주인님께서…….”
세드릭이 허락 없이 문 안으로 들어와 거기에 서서 물었다.
“방해됩니까?”
“그렇게까지 말씀드리지는 않았어요.”
아르티제아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 돌아앉았다.
세드릭이 그녀가 입실을 허락한 것을 알고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티아.”
“뭐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할 이야기가 없으면 당신의 티타임에 끼어들면 안 됩니까?”
“굳이 그러실 필요가 없긴 하죠.”
“티아.”
“하실 말씀 없으시면, 전 제 일을 좀 해야겠어요.”
“티아.”
그가 강한 목소리로 불렀다. 아르티제아가 눈을 들었다.
세드릭은 그녀와 시선을 맞춘 것이 무척 오랜만의 일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눈을 맞추어도 그러지 않았을 때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늘 깊은 빛깔을 띠고 있던 눈동자가 지금은 반짝거리는 푸른 보석처럼 무감정하게 변해 있었다.
아르티제아가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용건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경청하겠습니다.”
세드릭은 결국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당신과 대화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나중에 시간 있을 때 해요. 절 응석받이로 만드실 필요는 없어요. 간식은 요새 리시아가 잘 챙기고 있고요.”
외면하면서 이렇게까지 말하면 세드릭으로서는 더 말을 붙일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더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내일 오전 일찍 사냥을 나갈 겁니다.”
“네, 알고 있어요. 신년의 행사 같은 것이라고 하셨지요.”
겨울 사냥은 한겨울에 식량이 부족하던 시기부터 이어져온 것이다. 식량의 중간 보충을 위한 일이다.
하지만 겨울 사냥은 위험한 일이니까, 기사들이 많이 모이는 자리가 생기면 같이 사냥을 나가는 관습이 생겼다.
자연히 신년 연회 직후의 일이 되었다. 이번에도 단합을 위해서 며칠 일정으로 사냥 계획이 잡혀 있었다.
“아마 5일에서 일주일 정도 일정이 될 겁니다. 날씨 상황이 좋으면 더 길어질 수도 있고요.”
세드릭의 말에 아르티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내린 직후라서 무척 위험할 것 같은데, 조심하세요.”
“티아.”
“저보다는 전하나 기사들이 훨씬 더 잘 알고 있겠지만요.”
세드릭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은 아르티제아의 손에 닿지 못했다. 아르티제아가 먼저 손을 피했기 때문이다.
“……달리 더 해주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세드릭이 물었다.
없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아르티제아는 하지 못했다.
세드릭이 그녀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아르티제아는 손을 마주 잡아 차가운 손끝을 숨겼다.
“알겠습니다.”
“네.”
“내일 새벽에 출발할 것이기 때문에 아마 따로 인사할 시간이 없을 겁니다. 며칠의 부재이지만, 성을 잘 부탁합니다.”
“네. 염려 말고 안녕히 다녀오세요.”
세드릭은 결국 그녀의 손을 잡지도 못하고, 손등에 키스도 하지 못했다.
그가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아르티제아는 그 등을 한참 바라보고 있다가 문이 닫히자 고개를 숙였다.
새벽에는 소란스러웠다. 집사는 사냥 행렬을 조용히 떠나보내려고 애썼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흥분한 개가 짖고, 기사들이 군사를 정렬시키느라 언성을 높였다.
아르티제아는 그날 밤에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가슴이 싱숭생숭했다. 송곳으로 심장 깊은 곳까지 구멍을 낸 듯 찬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세드릭이 뻗었던 손이 자꾸 생각 났다.
그의 마음이 제게 적지 않게 기울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손을 내밀어 뻗으면 그가 맞잡아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그게 제일 괴로웠다. 유혹에 질 것 같아서.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아르티제아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바닥에 놓인 푹신한 털 슬리퍼에 발을 꿰고 가운을 찾았다.
“으응? 마님?”
소파에 웅크린 채 잠들어 있던 앨리스가 잠투정처럼 말했다가 깜짝 놀라 일어나려 했다.
아르티제아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
“물을 드릴까요? 아니면…….”
“그냥 자렴.”
잠옷 위에 가운을 찾아 걸치고 그녀는 세드릭의 침실과 이어진 방문을 열었다.
세드릭은 이 문을 자기 쪽에서 잠그는 법이 없었다. 아르티제아가 열고 싶다면, 언제든 열 수 있었다.
침실의 주인이 이미 나간 지가 오래되어서 방은 썰렁했다. 하인들이 정리정돈까지 모두 마친 뒤였다.
그래도 사람의 흔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르티제아는 잠시 방을 둘러보고, 침대에 앉았다.
멀리서 뿔피리 소리가 들렸다.
아르티제아는 일어서서 창가로 다가갔다. 덧문을 살짝 열어보자 사냥 행렬의 횃불은 벌써 저 멀리까지 가 있었다.
바람이 너무 차가워서 그녀는 얼른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다시 자기 방 쪽으로 돌아왔다.
그가 있을 때에 이 문을 열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봐도 의미 없는 일이다.
그녀는 악독한 여자였다. 대체로 누구에게나 그랬지만, 에브론에 특히나 더 악랄한 자였다.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르티제아는 문을 다시 잠갔다. 그리고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그 사이에 체온이 떨어졌는지 손발이 시렸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지만, 입김이 손발에 이슬처럼 맺혀 오히려 더 차가워졌을 뿐이다.
아르티제아는 문득 자신이 아직도 다이아몬드 팔찌를 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청혼을 받았을 때부터 항상 끼고 있었기에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빼서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
잠은 다시 올 것 같지 않았다.
* * *
손님이 찾아온 것은 이틀 후의 일이었다.
“남해에서, 가죽상이?”
담당 재무관의 말에 아르티제아는 적지 않게 놀라 되물었다.
“예. 에이멜 왕국의 소규모 상단이라고 합니다. 신분패를 확인하는 데에 시간이 너무 걸려서 이제야 말씀 올리게 되었습니다.”
재무관이 송구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이 계절에 말인가?”
“바다가 어는 줄 몰라서 올라오긴 했는데 발이 묶였나 봅니다. 간혹 본토의 어선도 그러는 일이 있지요.”
“지금은 어디 머무르고 있나?”
“처음에는 여관에 머물렀는데, 겨울이 되면 여관도 영업을 중단해서……. 지금은 사원에서 보살펴주고 있다고 합니다. 빈 방은 많으니까요.”
흔한 일도 아니지만, 전에 없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재무관이 의심 없이 말했다.
“지금까지 에브론 가죽을 본토의 상단을 통해 받고 있었다더군요. 중간 상인이 감당할 수 없이 가격을 올려서 이제 직접 거래를 트고 싶다고 합니다.”
“그렇군.”
“전에 비 전하께서 가죽상과 흥정할 때에 잘 되지 않으면 직접 만나 보겠다고 하셔서 이렇게 말씀 올리는 겁니다.”
“알았네.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는군. 만나보지.”
아르티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중간 상인이 얼마나 폭리를 취해 왔는지도 알 수 있는 기회였다.
늦출 것도 없는 일이었으므로 상인들은 바로 그날 오후에 불려왔다.
아르티제아는 대공비의 접견실에서 그들을 만나기로 결정했다.
내부적으로는 세드릭이 그녀에게 전권을 맡겼다. 그러나 외부에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대공비가 공식적인 집무실을 차지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리시아가 그녀의 곁에 앉고, 알폰스가 뒤에 섰다. 재무관 네 명이 좌우에 자리를 잡았다.
접견실 입구 쪽이 어수선해졌다.
몸수색을 받은 상인들이 접견실 안으로 들어섰다.
“전부 선원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체격이 제법…….”
재무관 하나가 중얼거렸다.
아르티제아는 그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제일 먼저 앞장서서 들어 온 붉은 머리 남자를 보고 경악하여 벌떡 일어섰다.
“아……!”
그러나 그 이름을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이 시점에서 그녀가 알지 못하는 게 정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남자가 빙긋 웃었다.
“오랜만이군, 로산 후작. 이게 얼마만이지? 설마 벌써 날 잊지는 않았겠지?”
낯익은 눈빛, 낯익은 표정이었다.
아르티제아는 그가 이미 자신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이멜의 카드리올 전하.”
“기억한다니 안심이군. 아직 그대에게 맞은 뒤통수가 아직도 얼얼하거든.”
알폰스가 이상한 기미를 느끼고 움직였다.
그러나 카드리올의 부하들이 더 빨랐다.
한 남자가 목에서 손가락 한 마디 만큼 가느다란 나이프를 뱉어냈다. 그리고 그것으로 옆에 있는 동료의 배를 찌르고 위장에서 동그란 것을 꺼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알폰스가 이미 그자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리시아가 비명을 질렀다.
“안 돼요, 알폰스 경! 비 전하의 옆으로!”
그러나 둘 다 이미 늦어 있었다.
연막탄이 터지며 실내에 끈적한 보라색 연기가 가득 찼다.
그 연막탄은 에이멜의 해군이 자랑하는 백병전용 병기였다.
카드리올의 부하들은 모두 에이멜 왕국의 정예 중의 정예였고, 그 안에서도 앞을 대낮처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에브론 기사는 이 자리에 알폰스 하나밖에 없었다.
경비병들이 실내로 뛰어들었으나 새카만 연기 속에서 제 방향을 찾지 못했다.
카드리올이 아르티제아에게 달려들어 그녀를 낚아챘다.
알폰스는 감각만으로 그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그 앞을 여섯 개의 칼날이 막았다.
그는 자신을 가로막는 칼날을 꺾어 부수고 상대의 목을 베었다. 그러나 카드리올의 손에서 아르티제아를 돌려받지는 못했다.
리시아가 벽을 손으로 짚으며 밖으로 나갔다.
연막탄이 연속적으로 터졌다. 곧 복도까지 연기가 가득 찼다.
“기사를 불러! 본성의 모든 문을 폐쇄해!”
리시아가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