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76
악녀는 두 번 산다 76화
봉화가 올랐다.
그것을 본 세드릭이 다급히 귀성한 것은 그날 저녁 해가 진 후의 일이었다.
사냥터로 떠났던 기사와 군사들이 무장을 풀지 않은 채로 본성 안으로 몰려들어왔다.
군홧발 소리가 성을 짓밟고, 횃불이 드리우는 붉은 그림자가 본성을 훨훨 불태웠다.
본성의 주민들은 대문을 열어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집에서 숨을 죽였다.
홀의 돌바닥에 시체가 줄지어 눕혀졌다. 칼을 맞아 죽은 경비병이 14명, 낯선 남해인이 4명이었다.
세드릭은 경비병들의 시신 위에 손수 에브론의 문장이 그려진 시트를 덮었다. 남해인의 시체는 확인 후에 밧줄로 묶어 끌어냈다.
그리고 세드릭은 외투 위에 걸친 방한용 망토 끈조차 풀지 않고 검을 찬 채 그랜드 홀의 상좌에 앉았다.
알폰스가 세드릭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낮에 덮어쓴 핏자국을 지우지도 못한 채였다.
그가 검을 내려놓고 가슴에서 휘장을 떼어 그 앞에 놓았다.
“비 전하를 지키기 못한 죄, 죽음으로 갚겠습니다.”
알폰스의 말에 세드릭이 노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쉽게 죽음을 입에 담지 마라. 목숨을 운운하기 전에 해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다.”
“송구합니다.”
상황은 파악되어 있었다.
한 무리의 남해인이 지난달에 들어와 한 달 가까이 사원에 머물렀다. 항구가 얼기 직전의 일이었다.
사원에서 그들을 만난 오브리가 본성의 구조를 상세하게 그려주었다.
성녀상의 통로를 통해서 강으로 빠져나간 남해인들은 대기시켜 놓았던 작은 배를 타고 강을 지쳐 하구로 내려갔다.
그 배는 썰매처럼 얼음 위를 달릴 수 있도록 개조되어 있었다고 했다. 배를 보관해온 창고를 빌려준 상인은 죽을죄를 지었다며 엎드려 빌었다.
“배를 개조한 자도 남해인입니다. 망가진 곳이 있어서 자기들이 직접 수리하겠다고 드나들었는데,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남해인이 오브리와 접촉할 때에 그녀를 감시했던 하인과 그 가족도 모두 죽어서 발견되었다.
카드리올은 그들의 입에서 말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해 가족을 인질로 잡고 있다가, 떠나기 전에 죽였던 것이다.
세드릭은 냉정하게 명했다.
“사원을 폐쇄하고, 그자들과 교류가 있었던 주민은 모두 구속하여 조사해라. 비밀통로도 확실하게 무너뜨려 막도록. 외부에 알려졌으니, 두 번 다시 쓸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알겠습니다.”
“항구에는?”
“일단 봉화로 완전 폐쇄령을 내렸습니다.”
“배에 썰매 날을 달아서 강을 내려갈 수 있다면, 바다에서도 가능할 거다. 얼어 있다고 해서 방심하지 말고 보급 창고를 단속해. 아무리 남해인의 배가 대단해도 보급 하나 없이 대해로 나갈 수는 없을 테니.”
“예.”
세드릭은 그다음에야 말했다.
“오브리를 불러와라.”
곧 오브리가 끌려왔다. 자기 처지를 알지도 못하고 사원의 방에 있다가 그대로 붙들려온 것이었다.
오브리는 흉흉한 본성의 분위기를 보고서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통쾌하다는 듯이 시원한 미소를 걸고 물었다.
“그 여자, 역시 도망갔어요?”
“오브리 조르딘. 네가 본성의 구조를 남해인들에게 알려주었나?”
세드릭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네? 아, 네.”
그제야 오브리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게 잘못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꼭 그 여자를 만나야겠다고 하더라고요. 저어, 그 여자가 원래 결혼하려던 애인을 버리고 전하와 결혼한 건 알고 계셨어요?”
카드리올은 그렇게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오브리의 안에서 이야기는 이미 그렇게 변형되어 있었다.
“전 그럴 줄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런 싸구려 같은 여자가 다 그렇죠.”
“…….”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전하께서 마음 쓰실 만한 가치가 없는 여자였어요.”
오브리가 세드릭에게 다가섰다.
위로해주고 싶었다. 얼마나 슬픔과 배신감을 느끼고 있을까.
생부도 모르는 천한 여자에게 그렇게 잘해주고 대공비의 지위까지 안겨 주었는데, 이렇게 배신을 하고 다른 남자와 도망을 갔으니 말이다.
정말 웃기는 여자라고 오브리는 생각했다. 변심을 했든, 다른 이유가 있든, 세드릭에게 이혼을 청하고 용서를 구하는 게 먼저가 아닌가.
하지만 카드리올이 도망을 전제로 말할 때부터 짐작하긴 했다. 틀림없이 입에 담지 못할 큰 죄를 지은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화를 내면서도 오브리는 마음속 깊이 만족했다. 이것으로 세드릭도 아르티제의 본색을 알았을 것이다.
오브리의 생각대로 세드릭은 슬픔과 배신감에 노하고 있었다.
다만, 그 배신감을 느끼는 상대가 아르티제아가 아니라 오브리라는 것이 달랐다.
오브리의 무엄한 말에 그랜드 홀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대경실색한 마거릿이 울부짖으며 달려 나와 오브리를 끌어안고 바닥에 엎드렸다.
“목숨만……,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오브리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아, 엄마. 진짜 왜 그래요? 그 여자가 가버렸으니까 이제 됐잖아요. 이렇게 야단 낼 가치가 없는 여자라고요.”
아론이 털썩 두 손을 다 짚고 바닥에 조아렸다. 감히 살려달라는 말조차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론의 뒤를 이어 조르딘 백작가의 딸들이 일제히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다.
기사로서 종사하는 장녀는 검을 풀고 망토를 벗었다. 관리로 일하는 차녀와 삼녀도 모자를 벗고 신분을 표시하는 휘장을 뺐다.
그 뒤를 따라 조르딘 성을 쓰는 방계 혈족들이 모조리 무릎을 꿇었다.
오브리는 그제야 상황이 자기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리번거리는 그녀의 앞에서 세드릭이 탄식했다.
“믿을 수가 없군. 내 성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전하…….”
“이곳으로 와서 며칠 되지 않았을 때에 비가 내게 충고하더군. 사람이란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도 배신하는 존재이니 좀 더 주의하라고, 그 때 내가 뭐라고 대답한 줄 아나?”
“저, 전하…….”
아론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웃어 넘겼어! 내 영지에서는 괜찮다고, 안전하다고! 자네들을 신뢰했으니까! 내 성에서 배신이 있으리라고 한 번도 생각지 못했으니까! 그러니까 당신도 안전할 거라고 말했어!”
세드릭이 노성을 내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늘 밖에서 뚫리는 것만 염려했지! 카람에게 쓸려내려 가는 것을 걱정하고, 황실의 음모를 걱정했다! 겨울이 오는 것이 두렵고, 죽음도, 싸움도, 늘 곁에 있는 것이라고 여겼지만, 그래도 오로지 딱 하나, 내 성, 내 집 안에서만은 안심하고 잘 수 있었어! 자네들을 믿었으니까!”
기사와 관리들이 그의 분노를 감당하지 못하고 일제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오브리 조르딘! 네 부모의 면을 보아 딱 한 마디만 변명할 기회를 주겠다. 왜 그런 짓을 했느냐!”
“저, 전하께서…….”
겁에 질린 오브리가 울먹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전하께서, 그 여자만, 쳐, 쳐다보고 계시니까……. 전하를 사모해요. 그런데 전하는…….”
그 말은 안 하느니만 못했다.
쩔그렁!
세드릭이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마거릿의 앞에 던졌다.
“대공비에 대한 하극상, 적과 내통하여 본성의 기밀을 유출한 배반죄, 에브론에 대한 대역죄, 모두 용서하기 힘들다.”
“부디, 부디, 목숨만…….”
“삼족을 멸해야 함이 마땅하나, 조르딘 백작가의 공적을 생각해 가문의 수치를 스스로 거둘 기회를 주겠다.”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마거릿이 오브리의 머리를 끌어안은 채 하염없이 울었다.
오브리는 멍하게 세드릭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어? 어?”하고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편들어주지 않았다.
아론은 감히 딸의 목을 스스로 베겠다고 말하지 못하고 엎드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장녀가 일어나 세드릭의 칼을 들었다.
뒤이어 차녀와 삼녀가 달려왔다. 두 사람이 마거릿을 붙잡아 끌어냈다.
“제가, 제가 대신 죽겠습니다! 제가 죽겠습니다!”
마거릿이 끌려 나가면서 울부짖는 소리가 저 밖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퍽!
비명소리도 없이 피가 솟구쳤다.
리시아가 고개를 돌렸다.
세드릭이 이어 말했다.
“아론 조르딘과 마거릿 조르딘의 작위를 박탈하여 톨드 관문에서 백의종군할 것을 명한다. 3년 동안의 유예를 두고 충성심을 확인한 후 향후의 처벌을 결정하겠다.”
아론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가테 자작.”
“예.”
“임시로 본성의 관리를 맡도록. 군기는 돌아와 단속하겠다.”
세드릭은 그렇게 명령하고 망토를 여미며 돌아섰다.
“어디 가십니까? 항구에는 이미 수색령을 전달했으니, 내일 오후에는 소식이 올 겁니다.”
“가겠다.”
그는 단호한 걸음으로 밖으로 향했다.
기사들이 우르르 그를 따라 나갔다.
한밤중이었고, 눈이 쌓여 있었다. 제아무리 추위에 익숙한 북부인이라도 밤새 말을 달리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세드릭은 망설이지 않고 말에 올랐다.
남해인들은 썰매로 개조한 배를 탔다고 했다. 그것이 하루에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얼어붙은 바다 어디에 진짜 배를 대어놨을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내 탓이다.’
그는 생각했다.
자신의 성이라고 해서 안심하는 게 아니었다.
아르티제아의 경고를 충분히 따랐다면 좋았을 것이다. 본성이라고 해도 안심하지 말고 제대로 호위를 붙였어야 했다.
신하들의 마음이 자신의 마음과 같으리라고 믿는 것은 오만이다.
자신이 선택한 반려이니 모두 존중하고 그녀를 자신과 같이 여겨 주리라고 믿었던 것도 착오였다.
오브리도 더 먼저 쫓아냈어야 했다.
오브리가 불충한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시녀를 다스리는 것은 아르티제아의 일이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간섭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르티제아가 조르딘 가와 자신의 관계를 생각해서 무르게 굴었고, 그것이 이번 일의 원인 중 하나였다.
그는 자신을 용서하기 어려웠다.
그녀가 강하게 내치지 못한다면, 자신이 했어야 했다. 눈이 녹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멀리 보내버렸더라면, 오늘의 이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옆에라도 있어야 했다.
후회만이 지독하게 남았다.
“전하!”
리시아가 황급히 달려나왔다.
세드릭은 말고삐를 당기며 말했다.
“염려 마라, 티아에게는 아무 일 없을 테니.”
그것은 저 자신에게 들려주는 말에 가까웠다.
“그게 아닙니다. 이것을…….”
리시아가 두 손으로 공손히 그에게 다이아몬드 팔찌를 받들어 올렸다.
세드릭은 망연히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비 전하의 침대 곁에 놓여 있었습니다. 늘 끼고 다니시던 건데……. 꼭 돌려드리세요.”
“알았다.”
세드릭은 그것을 받아 자기 품에 넣었다.
그리고 말에 박차를 가했다. 한 무리의 기사가 그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