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80
악녀는 두 번 산다 80화
새벽녘에 문득 눈이 떠졌다.
아르티제아는 몽롱하게 잠에 취한 채 이불을 끌어당겼다. 찬 공기 때문에 벗은 어깨가 시렸다.
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알몸으로 침대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정신이 들었다.
아르티제아는 간밤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불 안이 썰렁했다.
아르티제아는 머뭇머뭇 돌아누웠다.
세드릭은 셔츠를 걸치고 벽난로 앞에 앉아 있었다. 부지깽이로 장작을 들쑤시며 불꽃을 돋우고 있었다.
붉은 난롯불이 그의 얼굴선을 더 깊어 보이게 했다. 불꽃이 어른거릴 때마다 눈매에 맺힌 그림자가 흔들거렸다.
고뇌에 잠긴 듯한 얼굴이었다.
아르티제아는 잠시 세드릭의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노와 열정이 가시고 나자, 이제는 후회하고 있을까?
그런 불안감에 사로잡히고 만다.
아르티제아 자신은 후회하지 않았다.
아니, 후회했다.
조금의 호감을 주고받은 것이나 가벼운 친애의 포옹은 외면하면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할 수 없다.
이러고도 헤어질 수 있을까? 헤어진 뒤에 아무렇지도 않게 신하로 남을 수 있을까?
그러지 못할 것이다.
아르티제아는 자신이 지난밤의 일을 평생 안고 가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역시 후회는 하지 않았다. 이것이 행여 죄일지라도, 단 하루의 일일지라도, 행복했으니까.
“아아…….”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생각해야 할 일이 많았다.
리시아에게 이 죄를 어떻게 갚을 것인가.
단순한 계약 결혼으로, 그의 아내라는 이름을 잠시 얻은 것만으로도 이미 큰 죄였는데.
카드리올에게 약속한 것도 그렇다.
그에게 제안한 것은 어차피 해야 할 일이긴 했다.
그보다는 그가 회귀 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게 큰 걱정이었다.
《빛나라》 같은 단순하고 작은 마법을 시험 삼아 해본 것 말고, 그런 대규모 마법을 실제로 시전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뭔가 잘못된 부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원래부터 마법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결함일지도 모른다. 애당초 완성된 마법의 예시를 가지고 공부했던 것이 아니다.
그때에는 완벽하게 마법진을 그렸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와 생각하면 아닐지도 몰랐다.
스스로 제대로 생각할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고문의 후유증이 남아서 제정신이 아니었을 지도 몰랐다.
혹, 카드리올 말고도 누군가가 또 기억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계획을 전면적으로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기존의 정보에 불확실성이 늘어난다. 카드리올처럼 자신을 적대시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과거의 자신을 아는 사람이 또 나타나면, 그래서 세드릭이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정말로 알게 되면…….
“티아.”
멍하게 생각에 잠겨 있는데, 세드릭이 그녀가 깨어난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가 부지깽이를 내려놓고 아르티제아에게 다가왔다.
“제가 부스럭거려서 깼습니까?”
“아니에요.”
아르티제아는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목이 쉬어서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세드릭이 침대 가에 앉아 이불을 다독다독 덮어 주었다.
그리고 어쩐지 복잡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동이 트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더 자요.”
“네…….”
아르티제아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세드릭이 바로 옆에 있어서 쉽사리 잠이 들지 못했다.
그녀의 호흡이 떨리는 것을 느낀 세드릭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후회합니까?”
“……아뇨.”
“당신이 실수였으니까 잊어달라고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드릭 님이야말로…….”
실수가 아니었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아르티제아는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올까 봐 끝까지 물어보지 못했다.
세드릭이 잠시 말이 없었다. 그래서 아르티제아는 무서워졌다. 불안감에 몸이 떨렸다.
그의 손이 아르티제아의 눈가를 덮었다.
세드릭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관자놀이에 입술을 댔다.
“저는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습니다. 이런 일로 실수한 적도 없고…….”
“세드릭 님…….”
“오히려…… 오래 전에 이렇게 했어야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래 전이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희미한 떨림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아르티제아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려 했다.
그렇지만 세드릭의 다음 말에 잊어버렸다.
“계약을 없던 것으로 하고 싶습니다, 티아.”
“네……?”
아르티제아는 놀라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것을 결혼을 취소하자는 뜻으로 알아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드릭은 그녀의 눈가를 덮은 손을 치워주지 않았다. 그는 아주 약간 손에 힘을 주는 것만으로도 아르티제아의 저항을 무마시킬 수 있었다.
“제가 했던 청혼을 그냥 청혼이었던 것으로 해주십시오. 계약 같은 것과 관계없이.”
아르티제아는 숨을 들이켰다.
세드릭이 여전히 그녀의 눈을 가린 채로 말했다.
“왼손을 주십시오.”
아르티제아는 머뭇머뭇 이불 안에서 손을 꺼냈다.
세드릭이 그녀의 왼손을 가볍게 잡았다. 차가운 금속이 손을 통과해서 손목에 걸렸다.
몇 달 동안 한 번도 빼지 않았으므로 아르티제아는 그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세드릭에게 받았던 다이아몬드 팔찌였다.
“저와 결혼해 주겠습니까, 로산 후작님?”
아르티제아는 숨을 멈췄다. 대답은 목구멍에 걸려서 나오지 못했다.
세드릭이 후 하고 희미하게 웃었다.
“이미 결혼식까지 치러버렸는데 의미 없는 말이지만요. 그냥 하고 싶었습니다.”
“……네…….”
“훨씬 더 전에, 이렇게 했어야 했습니다.”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아르티제아는 세드릭이 눈을 가려 주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눈물이 고인 눈도, 이불 속에서 떨고 있는 몸도 들키지 않을 테니까.
“전에 당신이……, 당신이 제게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의혹이 생긴다면, 이유를 한 번 물어 봐 달라고 했었지요?”
“네…….”
“대신 저도 부탁하겠습니다. 우리가 서로 어긋나는 일이 있어도, 당신이 제게 의혹이 생기거나 반대로 제가 당신에게 의혹을 느끼거나 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지금 하는 말을 잊지 마십시오.”
세드릭이 그녀의 눈가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몸을 구부리고 아르티제아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어떤 일을 했든, 설령 내 심장에 비수를 들이 대더라도, 내 아내는 당신뿐입니다.”
“…….”
아르티제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가 눈을 내리깔자 세드릭이 말했다.
“티아, 대답은?”
“알겠, 어요…….”
아르티제아가 어떻게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쿵쿵거리는 심장을 누르며 대답했다. 세드릭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달콤한 입맞춤이 아르티제아의 입술 위로 떨어졌다.
아르티제아는 움찔하면서 그의 셔츠 자락을 잡고 순순히 입을 열었다.
세드릭이 입술을 떼며 눈을 떴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미소를 지었다.
아르티제아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이제 자도록 해요. 일어나면 본성으로 출발해야 합니다.”
“세드릭 님도, 저어…….”
안 자느냐고 묻기가 부끄러웠다. 옆에 눕지 않을 거냐는 질문이 되고 말기 때문이었다.
세드릭이 말했다.
“방금 난로에 장작을 보충한 참이라서요. 불 옮겨 붙는 걸 확인해야 합니다. 먼저 자요.”
아르티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드릭이 그녀를 다정하게 토닥이고 일어섰다.
아르티제아는 이번에는 놀랄 만큼 쉽게 곯아 떨어졌다.
몸은 몹시 지쳐 있었고, 손발은 따스했다. 가슴 안은 여전히 쿵쿵거리고 제멋대로 소리를 냈으나 그조차 금세 잊었다.
세드릭은 벽난로의 화력이 올라갈 때까지 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러고 나서 침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르티제아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확인하고 나서 나직하게 고백했다.
“원한다고 생각했던 여자는 당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혹, 또 한 번의 삶이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잠든 사람은 당연히 대답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세드릭은 아르티제아의 옆에 누워 그녀를 끌어안았다. 후회와 행복을 함께 끌어안는 기분이었다.
* * *
다음날 아르티제아는 오전 일찍 깨워졌다.
그녀를 깨운 시장 부인은 송구스러워하며 말했다.
“하루라도 정양하고 나서 내일 출발하시면 좋을 텐데…….”
“본성에 생긴 일도 작지 않으니까. 미적거릴 수는 없지.”
아르티제아는 그렇게 말했다.
정양하는 것도 본성에 가서 하는 쪽이 나았다.
어젯밤에는 따뜻하게 잤다. 하지만 하루 종일 그런 식으로 세드릭이 붙어 있을 수는 없다.
관저의 난방 시설은 본성의 대공비 처소에 아득하게 미치지 못했다.
아르티제아는 망가진 옷 대신 시장 부인의 옷을 빌려 입었다. 그녀는 두 벌밖에 없는 모피를 둘 다 아르티제아에게 바쳤다.
아르티제아는 그녀에게 그 이상으로 보답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세드릭은 일찌감치 준비를 마치고 그녀와 식사를 함께했다.
잠시 푹 잔 것만으로도 피로가 모두 풀렸는지, 아니면 답답한 문제가 해결된 덕분인지, 시원스러운 평소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불편한 곳은 없습니까?”
“없어요.”
아르티제아는 얼굴을 조금 붉히면서 말했다. 사실 전혀 없지는 않았다.
“눈 때문에 정비가 안 되어서 길이 좀 험할 겁니다. 마차도 썩 좋은 것은 아니고.”
“빨리 돌아가서 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요. 본성 일도 염려되고요.”
“이해해줘서 고맙습니다.”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었어요.”
아르티제아는 조심스럽게 그렇게 말했다. 세드릭이 앞질러 말했다.
“남해인에 대한 이야기라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당신이 이유 없는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그것 말고요. 어젯밤에…… 신뢰가 허상이라고 하신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티아.”
세드릭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 세드릭 님의 신뢰가 허상 위에 세워진 거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티아…….”
“배신이 어디에서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제 생각이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에브론 대공령의 사람들은 진짜로 배신하지 않았으니까요. 다만 세드릭 님과 에브론을 위하는 방식을 다르게 생각하는 것뿐이에요.”
아르티제아는 간곡하게 말했다.
에브론이 정말로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오히려 자신 때문에 신뢰가 깨어지면, 정말로 배신이 생겨날 수도 있었다.
“사람의 생각은 모두 다르죠. 압니다. 새삼스럽게 실감했을 뿐이지요.”
세드릭이 말했다.
“염려 마십시오. 저는 아직 선의도, 정의도 믿고 있으니까요.”
그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아르티제아에게 키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