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81
악녀는 두 번 산다. 81화
12. 대 카람 방어전
설원이 넓어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도 인적 없는 평야라고 생각했었다. 그것을 눈으로 덮어 버리니 소리조차 고요했다. 마치 텅 빈 곳을 방향도 모르는 채 가는 것 같다고 아르티제아는 생각했다.
물론 마차를 둘러싼 기사들이나 세드릭은 달랐다. 그들에게는 수천 번도 더 다닌 익숙한 길이었다.
똑똑.
나무 덧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아르티제아는 조심스럽게 덧창을 내렸다. 세드릭이 들여다보며 물었다.
“잠깐 쉴까요?”
“쉬어도 돼요?”
“숲 초입이라서 바람이 좀 덜 붑니다. 잠깐이라도 움직여 주는 쪽이 몸도 더 편할 겁니다.”
아르티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덧창까지 전부 닫고 작은 마차 안에 덜컹거리며 혼자 앉아 있자니 몸이 뻐근했다.
세드릭이 마차 문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 아르티제아는 조금 부끄럼을 타며 그 손을 잡았다.
그가 훌쩍 아르티제아를 당겨서 안아 내렸다.
세드릭은 바람이 덜 분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안 불지는 않았다.
아르티제아는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을 모아 쥐었다. 리본을 풀어서 다시 묶고 싶었지만, 벙어리장갑을 벗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얀 얼굴이 찬바람에 금세 새빨갛게 물들었다. 세드릭이 장갑을 벗어서 그녀의 외투 깃을 다시 여며주고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손 시리실 텐데.”
“잠깐이니까 괜찮습니다. 마차가 불편하지요?”
“괜찮아요.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었잖아요.”
관저의 사륜마차는 가지고 올 만한 게 못 되었다. 눈길을 가야 하는 것도 그렇지만, 마차 자체가 무거웠기 때문이다.
가는 길이 조금 더 고생스럽더라도 빨리 본성에 도착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은 아르티제아도 마찬가지였다. 본성이 걱정되기도 했다. 그래서 작고 가벼운 이륜마차에 혼자 타는 것을 택했다.
마차는 쉬지 않고 덜컹대는 데다가 벽이 얇아 외풍이 그대로 들었다.
하지만 사륜마차라고 해서 어차피 추위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작은 화로를 넣을 수 있는 본성의 마차가 그리웠다.
“처음 이곳으로 올 때에는 배를 타는 것보다 힘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아르티제아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에도 멀미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그러나 이 길을 뚫고 지나가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기지개라도 켜요. 저녁까지 계속 달려야 합니다.”
세드릭이 그렇게 말하고 장갑을 다시 끼었다. 그리고 아르티제아의 양쪽 팔을 잡았다.
아르티제아는 그가 왜 그러는지를 몰라 의아하게 올려다보았다. 세드릭이 싱긋 웃고 팔을 위로 쭉 잡아당겼다.
“아야야.”
굳어 있던 어깨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본성에 있는 동안에도 춥다고 산책조차 하지 않았으니까요.”
“거실에서 좀 걷긴 했어요.”
“방에서 빙빙 도는 게 무슨 운동입니까?”
아르티제아는 할 말이 없어서 염치없이 웃었다. 세드릭이 그녀의 팔을 내려주었다.
그러고는 이번에는 좌우로 쭉 펴 주었다.
“으읏.”
아르티제아가 신음하자 세드릭이 손에서 힘을 뺐다.
그가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했다.
시원했기 때문에 아르티제아는 조금 아쉬워졌다.
세드릭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표정을 밝게 고쳤다.
“다음에는 성 안 산책이라도 할까요?”
“……네.”
아르티제아는 볼을 붉혔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깊지 않은 숲이라 찌를 듯이 솟구친 침엽수림 사이로 하늘과 눈에 덮인 산맥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미래가 멀다는 생각이요.”
세드릭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그의 망토자락 안에 파묻힌 것처럼 되어서 아르티제아는 잠시 눈을 감았다.
바람만 막아주었을 뿐이지, 겉옷이 차갑기로는 세드릭이 더 심했다. 계속 말을 타고 달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몸이 따뜻해졌다.
아르티제아는 평생의 기쁨을 모두 몰아 한순간에 누리는 것도 별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초조해하지 마십시오. 이제 시작이니까.”
“네.”
“좀 걸을까요?”
그 상태 그대로 세드릭이 걸음을 옮겼다. 아르티제아도 느릿하게 그의 팔 밑에서 걸었다.
눈밭에서 뽀삭뽀삭 소리가 났다. 부츠 겉이 젖어들었다.
“먼저 가셔도 되는데. 혼자 가시면 시간을 훨씬 단축할 수 있잖아요.”
“괜찮습니다.”
“본성에 임시 조치만 해두고 오신 거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급할 것은 없습니다. 당신을 구하러 가겠다고 달려 나와서 혼자 돌아가는 것도 우습잖습니까?”
“절 구해주신 것 맞는데요. 뭐 어때요? 돌아가는 길이 힘들어서 급한 일 먼저 처리하러 가시라는 건데.”
“당신이 또 저를 피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고 오해할 겁니다.”
“그런 적 없어요.”
“티아, 제가 각별히 눈치가 빠른 편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둔한 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제를 리시아에게 떠넘기려고 했다는 걸 몰랐을 것 같습니까?”
할 말이 없어져서 아르티제아는 입을 다물었다. 세드릭이 한탄하듯 말했다.
“괜한 생각 하지 마십시오. 애당초 리시아에게 민폐입니다.”
“제가 뭘 했다고 그러세요?”
“남편에게 차를 대접하라고 어린 시녀를 떠밀었죠. 그런 일은 사이 나쁜 정략결혼에서나 있는 일인 줄 알았는데요.”
아르티제아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자신이 애정에 굶주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 번 바라기 시작하면 평생을 집착하며 바치게 된다. 일단 내밀어진 손을 잡아버리면 제 쪽에서는 결코 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과거에 세드릭과 리시아가 언제 사랑에 빠졌는지 확실하게 알지 못했다.
확실한 것은 세드릭은 리시아에게 청혼했었고, 리시아는 그 청혼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리시아가 성녀가 되고 나서 5년쯤 후의 일이었다.
그 결혼으로 세드릭이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리시아가 에브론 대공가의 가신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위신을 잃는 일이었다. 모반자의 마을 출신이라는 것까지 생각하면 위험부담까지 생겼다.
그래도 두 사람은 결혼을 결정했었다.
만일에 아르티제아가 신탁을 조작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결혼하여 함께 대공령을 지켰을 것이다.
리시아가 약혼을 파기한 것은 황후가 되리라는 신탁 때문이었다. 신탁 때문에 세드릭이 해를 입는 것을 걱정한 것이다.
세드릭은 리시아와 로렌스가 결혼한 뒤에 수도를 떠나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평생 어떤 다른 어떤 여자와도 함께하지 않았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결국 이번에도 자신이 그녀에게서 세드릭을 빼앗은 셈이다.
아르티제아는 복잡한 기분으로 세드릭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시간이 지나면 그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리시아에게 기울어질까?
그럴 것 같았다. 리시아처럼 아름답고 꺾일 줄 모르는 빛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보살피고 지켜보면서,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어쩌면 이번에는, 둘 다 어려운 처지에 몰리지 않아서 전과 같은 깊은 애정과 유대감은 쌓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면,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이 일이 모두 끝났을 때에 자신이 살아 있을지 어떨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그때까지만이라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만 해도 죄스러워서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렇지만 이제껏 저질러온 수많은 악행에 이 마음을 하나 더 얹는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미래는 이미 변했다. 세드릭을 온전한 상태로 리시아에게 돌려줄 수 없게 되었다.
이 결혼은 진짜 결혼으로서 성립해 버렸다. 평생 오로지 리시아에게만 마음을 주었던 남자는 이제 없다.
‘그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
그 말을 떠올리는 순간 온몸에 열이 치솟았다.
아직 둘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다. 아직은 자신이 훔친 게 아니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이대로.
세드릭의 마음이 자신에게서 떠나지 않을 때까지만이라도.
“티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세드릭이 그녀를 불러 물었다.
“생각이 깊은 것은 당신의 장점이지만, 이런 건 단점이군요. 너무 걱정이 많아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르티제아는 시선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세드릭이 그 시선을 붙잡아 그녀의 눈동자 안에서리는 온갖 종류의 감정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망토로 가려진 안에서 짧게 입술이 닿았다. 아르티제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꼭 감았다.
그 순간에만은 생각도, 죄책감도, 복잡한 마음도 없었다.
그녀는 세드릭의 입술이 떨어진 뒤에야 천천히 눈을 떴다.
세드릭은 그러모으듯 다물린 아르티제아의 입술에서 시선을 떼려고 애썼다. 평소에 핏기가 별로 없는 입술이 오늘따라 발갛게 보였다.
그는 충동적으로 다른 쪽 손을 뻗어 그 입술을 어루만졌다. 아르티제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저를 다른 사람한테 양보하려고 애쓸 필요 없습니다.”
“그게…….”
“제 착각이라면 괜찮지만요. 그러는 건 저한테 아주 잘못하고 있는 일입니다, 티아.”
아르티제아가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실은 반대였다.
죄를 지어도 좋으니 그를 차지할 수 없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조심스럽게 세드릭의 소맷 자락을 잡았다.
“그냥…… 익숙…… 하지 않아서 그래요.”
누군가가 자신을 우선시한다는 게 영원히 익숙해질 것 같지 않았다.
세드릭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이번의 키스는 아까 것보다 아주 조금 짙고, 조금 더 길었다. 아르티제아는 코로 당혹스럽게 숨을 뱉으며 세드릭의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균형을 잃은 아르티제아의 등을 세드릭이 받쳐 안았다.
그는 아쉬움을 남긴 채 한 번 아르티제아의 아랫입술을 물어 당겼다. 그리고 그녀를 반듯하게 세워주었다.
문득 주위를 돌아보자 기사들이 모두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있었다.
허공을 쳐다보는 자가 있는가 하면 자기 신발코의 얼룩에 열중해 있거나 나무껍질을 관찰하고 있는 자도 있었다.
세드릭은 헛기침을 했다. 아르티제아는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숙였다.
“이제 출발해야겠군요. 해지기 전에 숙소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네.”
“부츠 안은 젖지 않았죠?”
“네? 아, 괜찮아요. 아!”
세드릭이 그녀를 훌쩍 안아들었다. 아르티제아는 당황했다.
그렇지만 버둥거리는 대신에 그의 어깨를 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걸어야 된다고 그러시더니…….”
“눈밭이니까요.”
세드릭이 갈라진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조금만 더 가면 제대로 쉴 수 있으니까 참아요.”
“네.”
그때였다.
뿌우우!
멀리에서 정찰병이 부는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드릭이 경악했다. 그가 황급히 아르티제아를 마차 안에 밀어 넣었다.
“무슨 일이, 꺅!”
물어보는 그녀의 앞에서 마차 문이 탁 닫혔다.
세드릭이 외쳤다.
“거총!”
멀리에서 카르륵 하는 짐승의 포효가 울렸다.
그리고 그 소리가 마치 눈사태처럼 순식간에 밀려왔다. 아르티제아는 먼 소리와 가까운 소리의 차이를 확실히 분간할 수 없었다.
타당!
첫 발포 소리가 천둥처럼 마차를 뒤흔들었다.
“카람이 어떻게 여기에!”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