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84
악녀는 두 번 산다 84화
제대로 된 마차로 본성까지 가는 길은 속도는 느려졌지만, 훨씬 안정적이었다. 리시아가 챙겨온 솜옷과 외투도 따뜻해서 제법 편안했다.
아르티제아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그녀와 마주앉은 리시아가 부드럽게 말했다.
“콜린 경도, 네드 경도 괜찮을 거예요. 처치는 충분히 빨랐으니 상처가 아물기만 하면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부상자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야.”
아르티제아는 그렇게 말하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세드릭 쪽이다.
마차 안에 작은 손화로를 하나 가지고 있었다. 연기를 빼기 위해서 열어놓은 창으로 찬바람이 새어들어왔다.
“세드릭 님은 대체로 그렇게…… 부상자 치료를 직접 하셔?”
“네. 그렇다고 알고 있어요.”
리시아가 대답했다.
“군의가 있을 때에는 물론 군의가 먼저이고요. 소년 시절에……. 첫 출전을 열여섯도 되기 전에 하셨으니까요. 그때에는 직접 싸움에 나서지 못하셨으니 이런 것이라도 하겠다고…….”
리시아가 말을 끝맺지 않았다. 아르티제아는 그녀가 다 말하지 않은 것을 전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렇구나.”
황제가 세드릭의 부모를 모두 죽이고서도 그를 살려 놓았던 것은 에브론을 와해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대공가의 자손을 모두 잃어버렸다면 에브론은 그냥 제국의 일부이기를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주군이 있었기 때문에 한 덩어리로 똘똘 뭉쳐 버텨 왔다.
세드릭은 그 무게를 등에 짊어지고 있었다.
「제게 다른 사람을 희생시킬 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아르티제아는 세드릭의 얼굴에서 굳어진 무표정을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다음은 분노를 알았다.
기가 막혀 하는 얼굴도 알고, 고통스러워하는 얼굴도 알았다.
이제는 기뻐하거나 수줍어하는 얼굴도 알고, 달콤하게 다정한 말을 던질 때의 얼굴도 알게 되었다.
열정 가득한 얼굴도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눈물 흘리는 얼굴은 상상할 수 없었다.
아르티제아는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에 스쳤던 속눈썹은 젖어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감촉은 이상하게 심장을 술렁거리게 만들었다.
세드릭의 출생부터 성장 과정까지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다. 유모와 가정교사의 이름과 특성까지 외우고 있었다. 첫 번째 출전과 첫 번째 선봉장을 맡았던 전투의 결과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문서로 아무리 외웠더라도 알지 못했던 것을 이곳에 와서 자꾸만 보게 되고 만다.
“슬퍼하시던가요?”
리시아의 물음에 아르티제아는 생각에서 문득 깨어났다.
“응?”
“저희에게는 절대 그런 얼굴을 보이지 않으시니까요.”
“아…….”
리시아가 미소를 지었다.
“비 전하께서 이곳까지 와주셔서 감사드리고 싶었어요. 아버지도 늘 걱정하고 계셨거든요.”
“…….”
“대공 전하께서는 소년 시절에도 늘 괜찮아, 아직 할 수 있다,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씀하셨다고 해요.”
“리시아…….”
“고귀한 신분으로서, 에브론의 하나뿐인 기둥으로서, 마땅하다면 마땅한 자세이시긴 했지만, 그게 어른들에게는 늘 마음이 아팠던 모양이라서요.”
자기야 그때에는 어려서 잘 몰랐었노라며 리시아가 가볍게 덧붙였다.
“비 전하께서 이렇게 에브론을 받아들여 주시고, 또 전하와 함께 해 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아니…….”
아르티제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아마도 그것은 본래는 리시아의 역할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은 봐서는 안 될 것을 훔쳐본 셈이다.
그런데 리시아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똑바로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 * *
꼬박 하루가 더 걸려 도착한 본성의 분위기는 위태로웠다.
전에는 대공비의 마차가 지나간다고 기뻐하며 환호해주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안부 인사를 건네 오는 사람도 없었다. 제 할 일을 하다가 평화롭게 모자를 벗어 예를 다 하고 다시 일로 돌아가는 자도 없었다.
길을 가던 자들은 얼른 마차를 피했다. 인사를 하는 자들의 얼굴도 시커멓게 우울했다.
불안감이 안개처럼 내리깔려 있었다. 그것이 카람 문제 때문은 아닐 것이다.
‘역시 신뢰가 깨진 거구나.’
아르티제아는 마음속으로 한탄했다.
리시아에게서 상황 설명은 들었다.
오브리가 지은 죄는, 그 원인과는 별개로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본성의 구조와 비밀통로를 유출하는 것은 설령 성주의 가족이 저지른 일이라 해도 성벽에 효수될 정도의 중죄이다.
비상시 성의 목숨 줄이 될 물 공급 통로를 건드렸으니, 성주 본인이라 해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태였다.
자신이 아예 에브론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아르티제아는 생각했다.
오브리에게 거기까지 할 작정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쫓아내서 두 번 다시 수뇌부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의 책임이다. 자신이 오지 않았다면, 카드리올도 여기까지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론과 마거릿은 20년도 넘게 본성을 보살펴왔다. 조르딘 백작가는 상하로 두루 신뢰를 받고 있던 가문이었다.
아무리 그럴 만한 죄를 지었다고는 하지만, 그런 가문이 대역죄로 일거에 내쳐졌다.
지어진 이래 난공불락이었던 성이 뚫렸다.
그 원인이 된 대공비는 고작해야 결혼한 지 반년도 안 된 외지인이었다. 납치한 것이 옛 애인이었다는 소문도 조금씩이나마 퍼졌다.
영민들 입장에서는 불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르티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의 생에서는 그렇게나 만들기 힘들었던 균열이었는데, 이곳으로 와서 얼마 되지도 않아 자신이 만들어 버렸다.
이번에는 결코 그래서는 안 되는데.
“비 전하.”
리시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곧 마차가 섰다. 아가테 자작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마차 문을 열고 그녀를 에스코트해서 내려주면서 자작이 말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비 전하.”
“수고하는군. 경이 대공 전하를 대신해서 본성의 관리를 맡았다고 들었네.”
“예. 비 전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임시의 일이었습니다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당분간 군무를 제가 맡아 보아야 할 듯합니다.”
“경을 믿고 있겠네. 대공 전하께서는 바로 톨드로 가셨네.”
“봉화는 이쪽에서도 보았습니다. 지금 본성에서는 순찰대 위주로 편성하여 기사단을 운용하고 있습니다. 상황 변화가 생기면 보고드리겠습니다.”
“일반 마을은 괜찮은 건가? 돌아오는 길에도 사상자가 꽤 나왔는데…….”
“겨울이니까 괜찮습니다. 여름에는 일 때문에 나다니는 사람이 많지만, 지금은 대부분 목책 안에 있을 테니까요. 부대 하나가 사십 명 전후라 하니, 지원병이 도착할 때까지 무리 없이 버텨낼 겁니다.”
아르티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테 자작이 그렇다면, 그 말이 맞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해서 그녀가 뭘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지금까지 목격된 카람 부대는 모두 격파했습니다. 고단하실 테니 염려 말고 쉬십시오. 본성은 안전합니다.”
“고맙네.”
아가테 자작이 공손히 절을 하고 물러갔다.
그다음에는 앨리스와 소피, 리제를 비롯해서 하녀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마님!”
“저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다친 곳은 없으시죠? 우선 몸부터 녹이세요? 목욕물을 준비해 둘까요?”
“저녁은 드실 수 있겠어요? 호박 수프가 있는데 조금 가져올게요.”
아르티제아는 거의 떠밀려서 침실까지 향했다.
방에 들어가서까지도 떠드는 소리들이 죽지 않았다. 소란을 진정시키려고 리시아가 언성을 높였다.
“모두들 그만해! 비 전하께서 피곤하실 텐데!”
하녀들이 찔끔했다.
“소피는 갈아입을 옷 준비, 리제는 수프와 초콜릿을 가져오고, 다른 사람들은 목욕물을 준비하도록 해. 비 전하, 저도 잠시 옷을 갈아입으러 가 봐도 괜찮을까요?”
리시아가 한꺼번에 소란을 정리했다. 두통이 일어나려던 참이었기에 아르티제아는 진심으로 고마웠다.
“너도 오랫동안 밖에 있느라 피곤했을 텐데, 가서 쉬고 오도록 해, 리시아.”
“감사합니다, 비 전하. 곧 돌아올게요.”
리시아가 고개를 숙여 절을 올렸다. 그리고 방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방에는 앨리스만 남았다. 아르티제아는 잠시 있다가 그것이 리시아의 배려라는 사실을 알았다.
앨리스가 방긋 웃었다.
“리시아 님은 정말 좋은 분 같아요. 마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시고……. 지금도 제가 마님께 보고드릴 게 있다는 거 알고 배려해주신 거 맞죠?”
“잠깐 이리 와 볼래?”
앨리스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아르티제아에게 다가왔다.
아르티제아는 두 팔을 벌려서 그녀를 껴안았다.
“어쩐 일이세요, 마님?”
앨리스가 머뭇거리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측근하녀라지만, 이제까지 한 번도 아르티제아가 그렇게 직접적이고 깊은 접촉을 해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르티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그냥요?”
“그래. 그냥…….”
앨리스가 이상하다는 듯이 웃었다.
“우리 아가씨, 정말 많이 힘드셨구나.”
“…….”
“괜찮아요.”
따뜻한 손이 부드럽게 아르티제아의 등에 감겼다. 그리고 아이를 달래듯이 토닥였다.
“이제 진짜 괜찮아요.”
“앨리스.”
“이제 무사히 돌아오셨으니까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그 말을 해야 하는 것은 사실 앨리스가 아니라 아르티제아였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아르티제아는 그냥 앨리스를 힘껏 끌어안았다.
막 돌아와 앨리스를 만났을 때에 이렇게 하고 싶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아르티제아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세드릭을 그렇게 껴안아주고 싶었다는 것도.
그러나 지금도 이렇게 끌어안았을 때에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을 앨리스밖에 떠올릴 수 없었다.
리시아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을 풀어 내려놓았다.
그 권총은 본래 세드릭의 것이다.
수도의 장인 중에서도 가장 실력 있다는 자가 만들었다.
겉보기에는 단순했다. 그립에 금으로 대공가의 문장을 새겨 넣은 것을 제외하면 장식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성능으로 따지자면 아마 최고의 총 중 하나일 것이었다.
그것을 세드릭이 준 것은 톨드로 떠난 새벽, 아직 동이 트기 전의 일이었다.
「총 쏘는 법은 배웠던가?」
「약간은요.」
「너는 무엇이든 잘 다루니 배우기 어렵지 않을 거다. 연습해둬라.」
리시아는 긴장했다.
군주가 애용하던 무기를 직접 건네주는 것에는 예사롭지 않은 의미가 있다.
신뢰와 더불어 권위를 함께 주는 것이다. 하물며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면 더더욱.
18살밖에 안 된 남작의 딸에게 맡기기에는 과한 물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