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87
악녀는 두 번 산다 87화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었다.
카람 작물의 농법을 연구하기 위해서 만든 마을은 20여 가구로 구성되어 있었다. 보통 마을처럼 대가족은 없었다. 그래도 인구수가 80인은 넘었다.
훈련된 군인이나 정보원 80인이 아니라 보통 마을 사람이 80인이다.
정보가 새어나가지 않는 쪽이 이상하다. 전원을 죽여서 입을 막는 것이 가장 확실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티제아가 정보 통제를 할 수 있다는 한나와 세드릭의 말을 믿고 살인멸구를 건의조차 하지 않은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몰살이라는 수단을 세드릭이 받아들일 리 없다는 점이다.
어차피 성사시키지도 못할 일이다. 오히려 그로 인해 자신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져 후일 발언권이 약해지면, 정작 중요한 때에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
둘째는 북부와 본토 사이의 교통이 불편하다는 점이었다.
두 번째 이유도 작지 않았다. 에브론 대공령의, 그것도 북부 끝에 사는 농민이 본토에 그 정보를 흘릴 경로는 사실상 없다.
에브론 대공령은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곳이다. 정보가 퍼지는 것도 매우 느렸다.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더라도 그것이 넓은 대공령을 가로질러 본토에 도달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설령 닿는다 하더라도 이미 그때에는 서부에서의 작업이 끝난 다음일 것이다.
아마 대공령 안에 황실의 첩자가 들어와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카람 작물과 톨드 북쪽 마을을 타깃으로 하여 정보를 수집하지 않는 이상 이 일에 대해 알아낼 확률은 낮았다.
‘사제라니.’
한나는 관련자들을 통제하는 것에 자신감을 보였다.
그러나 세상의 어느 누구도 막지 못하는 것이 있다. 신앙심이었다.
아마 사제에게 고해한 자는 자신이 기밀을 누설했다는 자각조차 없을 것이다.
신심 깊은 사람의 생각에, 고해는 비밀을 흘리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침대에서 잠들기 전에 기도를 올리며 신에게 고백한 죄가 비밀을 누설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물론 그 고해를 받은 사제는 입장이 달랐다.
“비 전하, 성전은 카람을 악마로 규정합니다. 카람의 것은 악마의 것입니다.”
사제는 핏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대공가의 가신이 나서서 그 악마의 것을 들여오려고 하다니, 악마와 내통한 것이나 다름없는 중죄입니다. 게다가 이번에 전쟁이 일어난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합니다.”
대공비의 앞인 것도 잊고 그가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천벌입니다. 악마의 것을 탐했으니, 악마를 끌어들인 게 당연합니다. 다른 때와 달리 카람이 갑자기 톨드 안쪽에서 나타난 것도 틀림없이 그 때문일 겁니다.”
“주교님께는 말씀드려 보셨나요?”
아르티제아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사원의 방침을 알기 위해서였다.
사제가 고개를 저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주교님께서는 무른 분입니다. 게다가 성전의 뜻을 받들기보다도 이 지역의 단합을 더 중요하게 여기실 분이라서요.”
“그렇군요.”
“물론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고, 아무리 악마의 종자라고는 하나 차마 죽어가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해서 카람을 돕는 자가 있다는 것도 알긴 합니다.”
“네.”
“그래도 그것이 금지된 일이라는 사실을 좀 더 엄하게 설교해야 한다고 말씀드려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조교님께서는 그릇된 선행도 선행이라고 하시더군요. 일단은 살아야 한다고 늘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사제가 다시 한 번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그다음에는 얼굴에 결의가 깃들었다.
“그래서 비 전하에게 말씀 올리는 겁니다. 저도 이곳 사람이니까 잘 압니다. 주교님도, 다른 사제들도…… 아마 대다수가 에브론을 위해서 이 일을 덮자고 말할 겁니다.”
“사제님.”
“하지만 이 일로 인해 전쟁까지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묻을 수 있겠습니까? 전쟁을 일으킨 자가 분명히 있는데요.”
“사제님께서는 제가 어떻게 도와 드리기를 바라시는 건가요? 전 이곳 사정에 무지하고, 카람에 대해서도 잘 몰라요.”
“본토의 대사원에 이 일을 알려주십시오, 비 전하.”
사제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이곳에서 대사원은 너무 멉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제가 대사원에 편지를 쓰더라도 중간에서 누군가가 그것을 가로채거나 할 것 같습니다.”
“사제님.”
“대사원에서 요구한다면, 주교님도 자기 이익 때문에 악마와 내통한 그 어리석은 자를 용서하지 않으실 겁니다. 하루라도 빨리 찾아내야 합니다. 비 전하, 가신의 탓으로 에브론 대공 전하께서 신께 버림받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르티제아는 가만히 사제를 바라보았다.
악의는 없어 보였다. 그는 진심으로 에브론 대공령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일이 본토에 알려지면, 카람과의 내통죄라는 이름을 뒤집어씌워 에브론 대공을 파문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리라.
‘그나마 나한테 의논한 게 다행이다.’
아르티제아는 생각했다.
“지금 당장은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그녀는 차분하게 그렇게 대답했다.
“전쟁의 원인이 정말로 그 때문이라는 것은 아직 확실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고해한 사람이 무언가 나쁜 뜻으로 사제님께 틀린 말씀을 드렸을지도 모르잖아요?”
“그 사람의 신원은 의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가신들 중 누군가가 대공 전하 몰래 저지른 일이라면, 섣불리 손댈 수 없고요. 보통 문제가 아닌 것 같네요.”
“예.”
“그러니까 우선은 저도 좀 알아보겠습니다. 그때까지 이 일은 비밀을 지켜주세요.”
“예. 비 전하의 신중하신 말씀이 옳습니다.”
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티제아는 일어서서 그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제가 조만간에 다시 찾아뵙지요. 배웅은 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사제가 그녀를 뒤따라 일어섰다. 아르티제아는 그를 방에 남겨두고 혼자 밖으로 나왔다.
탁.
문을 닫고 나자 기가 막힌 한숨이 새어나왔다.
“휴우.”
알폰스가 아무 말 없이 등불을 들어올렸다.
아르티제아는 빠른 걸음으로 사원을 빠져나갔다.
사제는 꽤 골치 아픈 존재다.
사원은 상당한 수준의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이룩하고 있었다. 북부 끝의 농부가 본토에 정보를 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사제가 다른 사원에 연락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이번에 전해달라는 편지는 가로챌 수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사원에 닿을 것이다.
아르티제아가 어중간하게 대답하면, 이 사제는 틀림없이 소식을 보낼 다른 방식을 강구할 것이다.
그리고 사제의 말은 농부의 말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본토 사람에게 카람과 교류한다는 것은 충격적인 이야기이니까.
카람 작물만이 문제가 아니라, 에브론 대공령에서 이루어졌던 모든 소통이 내통죄로 다루어질 가능성이 있다.
만일에 지금 이 말을 한 것이 사제가 아니라 다른 자였다면, 아르티제아는 간단히 그자를 죽여서 입을 다물렸을 것이다. 죽은 자는 말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사제를 상대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모든 사제는 대사원의 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죽으면 사망 사유를 알려야 한다.
그리고 사제가 납득할 수 없는 사유로 갑자기 죽으면, 대사원은 틀림없이 그 이유를 조사하려 할 것이다.
‘하루만 빨리 알았더라면.’
아르티제아는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랬다면 죽은 카드리올의 부하가 들고 있었던 남해인의 무기로 사제를 죽였을 것이다. 그다음 습격 사건이 있었을 때에 생긴 피해라고 말하면 간단히 처리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미 장례식이 치러졌다. 이 뒤에 시체가 바로 나와서는 안 된다.
그나마 이것이 고해 받은 사실이라서 다행이었다. 사제는 성전에 충실한 신심 깊은 원칙주의자로 보인다.
그러니 쉽게 고해 내용을 발설하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우선은 전쟁의 이유를 알아내는 것이 먼저다.
아르티제아는 무서운 얼굴로 밖으로 나왔다.
사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리시아와 하녀들이 불안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비 전하? 안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장례식이 전부 끝나면, 아가테 자작과 한나에게 내 처소로 오라고 해.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상관없어.”
“네.”
리시아가 바짝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르티제아는 빠른 걸음으로 본성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이 아르티제아의 거실에 모인 것은 자정을 훌쩍 넘어 새벽 3시가 되어갈 무렵이었다.
아르티제아는 상복을 벗지 않은 채로 벽난로 앞에 앉아 있었다. 생각을 정리하느라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모두가 착석한 뒤에 아르티제아는 제일 먼저 아가테 자작에게 물었다.
“톨드 관문의 상황은 어떤가?”
“마지막 전령이 알려온 바로는 아직 충돌은 없습니다. 다만 요새 앞에 집결한 전사 계급 카람의 수는 2만 이상 2만 5천 이하로 추산됩니다.”
“일반적으로 전쟁이 일어날 때에는 그것보다 훨씬 많은 수가 모이는 것으로 알아요. 하지만 2만도 적은 수는 아니에요.”
리시아가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아르티제아는 이번에는 한나를 돌아보았다.
“오늘 들은 이야기가 있네.”
“예?”
“톨드 북쪽 마을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하더군.”
아르티제아는 냉정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한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가 아가테 자작을 바라보았다. 아가테 자작은 머뭇거리며 리시아를 바라보았다.
“대공 전하께서 내게 숨기라고 말씀하셨나? 아니면 경들이 임의로 숨기고 있는 건가?”
아르티제아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리시아가 대신 대답했다.
“전 이게 무슨 상황인지 잘 모르지만, 대공 전하께서 비 전하께 본성을 잘 부탁한다고 말씀하신 것만은 확실하게 압니다.”
그러자 아가테 자작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비 전하.”
한나가 벌떡 일어서서 무릎을 꿇었다.
“예, 제 탓입니다. 마을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카람 아이를 납치한 셈이 되었습니다.”
“아이를?”
“멀지 않은 거리에 새로 생긴 카람 마을이 있었습니다. 양쪽의 아이들끼리 어울려 노는 일이 자주 있었다고 합니다. 당일에 마을을 해체하고 주민을 이동시키는 과정에서 그 아이들 중 몇이 함께 톨드 관문 안으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실수한 군사의 말로는 위쪽 눈을 가리는 두건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혼혈인 줄 알고 데려왔다고 하더군요.”
아르티제아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