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89
악녀는 두 번 산다 89화
충차만이 아니라 투석기도 두 개 있었다.
리시아는 쌍안경으로 그것들을 살펴보았다. 셋 모두 조야한 수준이었다.
나무 바퀴는 허술했다. 충차에 달린, 성벽을 두드릴 통나무 앞머리에는 쇠를 덮어씌우는 대신에 겨우 쇠띠를 하나 둘렀을 뿐이다.
투석기도 역시 틀을 짜 맞춘 기술이 조악했다. 반동 때문에 저절로 부서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형태 자체는 충분히 세련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런 것이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이제까지 카람은 무기에 크게 의지하지 않았다. 성벽을 맨몸으로도 기어오를 수 있는 신체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성벽에 놓을 사다리조차 나온 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양상이 달라졌다.
“게릴라전에 이어 공성 병기라니…….”
리시아는 탄식하듯이 말했다.
“완전히 제대로 전쟁을 준비한 거네요. 카람 아이를 납치했다거나 그런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아니, 전쟁을 준비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아. 그랬다면 고작해야 2만을 모아오진 않았겠지.”
세드릭의 얼굴에는 여유가 남아 있었다.
“오히려 그보다는 그런 발상을 어떻게 해냈느냐가 궁금하구나.”
“백여 년을 톨드 관문에서 싸웠잖아요. 슬슬 맨몸으로는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은 게 아닐까요?”
“그렇다기보다는 누군가에게서 배운 듯한 형국이지. 통나무로 때려서 성문을 부숴보겠다는 발상이 처음으로 생겼다면, 통나무부터 들고 와야 할 텐데 충차를 만들었으니까. 투석기도 그래. 갑자기 카람이 저런 걸 만들 수 있을 것 같지 않구나.”
“가르쳐준 사람이 있다는 말씀이세요?”
교역상이 있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투석기나 충차의 개념을 설명하고 설계해서, 그것으로 전쟁을 일으키도록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세드릭은 침묵했다.
할 말이 없어진 게 아니라 말을 아끼기로 결정한 것이다.
공성 병기도, 소규모 부대로 산맥을 넘게 하여 국경 안을 어지럽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역사가 쌓이지 못한다는 카람의 한계를 넘어선 일이었다.
수명이든, 지혜이든.
그러나 카람 중의 누군가가 그것을 넘어섰다.
“어쨌든 전사 2만은 제대로 전쟁을 하기에는 부족한 숫자이지요. 카람도 알고 있을 겁니다.”
요새 사령관이 끼어들었다.
세드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르티제아의 편지를 폈다. 편지는 간결하게 본성에서 벌어진 내용을 설명하고 있었다.
사제에게 들은 이야기는 물론 뺐다. 톨드 북쪽 마을에 대한 정보가 유출되었다는 것, 그에 관한 뒤처리에 대한 내용이 제일 먼저 적혀 있있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곡물상 조합을 빨리 만들 필요성이 생겼고, 수도에 가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 주 골자였다.
세드릭은 처음에 리시아가 편지를 가져왔다고 했을 때에 의심을 했었다. 리시아에게 자리를 비우게 하고 할 일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내용을 보았을 때에, 그렇지 않았다.
모반자의 마을에 정보 유출을 했을 가능성이 있는 톨드 북쪽 마을의 주민을 수용하겠다는 것은 세드릭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었다.
사실 전원을 죽이지 않을 거라면 그보다 나은 방법이 없었다.
아르티제아는 아직 에브론 대공령에서 누구를 믿어도 좋을지 확실하게 결정짓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럴 법했다. 오브리의 일이 있었던 때로부터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충성스러운가와 신뢰할 수 있는가는 서로 다른 문제이다. 세드릭도 이제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세드릭은 그 편지를 도로 접어 품에 넣었다. 나중에 편지는 태워야 할 것이다. 남의 손에 들어가서는 안 될 정보가 몇 가지 적혀 있었다.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수도에서 만났을 때부터 오늘까지, 그래도 몇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손에 남은 것은 한 통도 없었다. 모두 태워야만 했기 때문이다.
남겨둘 만큼 애틋한 말이 적혔던 적도 없었다.
“오늘 하루는 요새에서 쉬고 가려무나, 리시아. 답장을 써야겠으니.”
“네.”
리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수도로 가시겠다는 건 막지 않으실 건가요?”
“겨울에 이동하는 것은 걱정이 되긴 한다만, 그것은 티아도 이미 알고 있을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만 할 정도로 목적이 중한 것이겠지.”
세드릭은 그렇게 말했다.
곡물상 조합을 만드는 것도, 카람 작물을 대사원의 제단에 올리는 것도 중요하다.
그것 외에도 톨드 관문에서 분쟁이 있는 동안에 에브론 대공비가 가질 수 있는 이점을 세드릭은 몇 가지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니 왜 수도로 돌아가려 하는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할 일은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둥! 둥! 둥! 둥!
카람이 북을 울리기 시작했다.
카! 카크! 카! 카아람!
카람 전사들이 일체가 되어 내지르는 고함소리가 하늘까지 뒤흔들었다.
세드릭이 그것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대치 상황을 좀 길게 끌어야겠지.”
“전하?”
세드릭의 말에 요새 사령관도, 리시아도 당황한 얼굴을 했다.
“적은 2만이야. 저쪽도 진짜로 뜻을 모아 전쟁을 하러 온 것은 아니라는 뜻이지. 아마도 일부 세력에서 투석기와 충차가 만들어져서, 실제로 쓸모가 있는가 어떤가 시험하러 온 것이 아니겠는가?”
요새 사령관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세드릭은 처음부터 그렇게 추측하고 있었다.
이 분쟁이 생겨난 원인에 관해서는 가장 먼저 보고를 받았다.
그러나 아이 납치 때문에 강경파 쪽으로 저울추가 기울었다는 것은 표면적인 핑계이다.
사실을 알자마자 에브론은 아이를 즉각 돌려보냈고, 상당한 양의 보상도 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되었다.
“지금이라면 포격 한두 번으로 공성 병기를 모두 부술 수 있습니다. 아예 그 효용을 카람이 모르게 하는 쪽이 낫습니다, 전하.”
“이미 카람은 병기의 효용과 전술의 의미를 알았어. 단숨에 부숴버리면 카람 안에 내분을 일으킬 수는 있겠지. 하지만 결과는 똑같을 걸세.”
“결과요?”
“두 번째, 세 번째 시도가 나올 거라는 것 말일세. 결국은 카람도 배우게 되겠지. 성벽을 부수기 위해서는 육체의 힘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그전에 우리가 달라져야 하네.”
막아낼 만큼의 자원을 쏟아 부을 힘이나, 혹은 화평을 시도할 만큼의 권력을 얻어야 한다.
세드릭이 손을 내밀었다.
“내 대궁을 가져오게.”
요새 사령관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부관 중 하나가 달려갔다. 세드릭의 활은 성벽에 인접한 제3차 사령실에 걸려 있었다. 총을 쓰는 요즘에는 그냥 장식용에 가까웠다.
세드릭은 오랫동안 쓰이지 않은 활의 줄을 조정했다.
총을 쏘는 게 아니라 활을 쏘기로 한 것은 그것이 카람에게 심정적으로 훨씬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총포는 카람에게는 미지의 존재이다. 두려움은 심어줄 수 있을지언정 진정한 전사가 이곳에 있음을 알려 주는 역할을 할 수 없다.
둥! 둥! 둥! 둥!
북소리가 멈추지 않고 울렸다.
충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새 사령관이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로 그냥 내버려두실 겁니까?”
“성문을 위협하게 할 수는 없지.”
세드릭은 활에 화살을 걸었다. 시위가 당겨지면서 그의 전신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내가 두 번째 화살을 쏘고 나면, 뒤이어 포격하게.”
“투석기는요?”
“하나는 놓아둬. 제대로 기능하는지 어떤지 먼저 보도록 하지. 방패는 모두 지급했겠지?”
“예.”
먼저 움직인 것은 카람이었다.
“카크! 카크!”
선두에 선 카람의 대전사가 고함을 질렀다.
“몰려온다!”
누군가가 외쳤다.
카람 한 무리가 충차를 떼로 밀고 달려왔다.
세드릭이 시위를 놓았다. 쌔애앵 소리를 내며 날아간 활이 카람의 큰 북 정중앙에 꽂혔다.
텅!
북이 찢어지며 나는 소리가 고함 소리를 갈랐다.
두 번째 화살은 북치는 카람들의 곁에 서 있던 깃대를 부러뜨렸다.
카람들은 깜짝 놀라 잠시 멈칫했다. 그 거리를 가로질러 활로 정확히 북을 쏘고 깃대를 부러뜨리는 것은 보통 전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포격이 이어졌다.
꽝!
첫 번째 포격이 충차를 단번에 부수었다. 충차를 밀던 카람 중 일부가 휘말려 피떡이 되었다.
꽝!
두 번째 포격이 투석기를 위협했다.
세드릭은 깃대 근처에 서 있던 젊은 카람을 보았다. 젊다기보다는 어린 얼굴이었다.
새삼스럽게 그자를 본 것은, 그 카람이 정확히 세드릭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드릭은 카람의 얼굴을 확실하게 구별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대공령을 떠나 있었던 시기가 긴 탓이다.
그러나 그 카람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의미 있는 시선이 세드릭의 얼굴을 훑었다.
보통은 카람 역시 인간의 얼굴을 확실하게 구별하지 못할 터이다.
옷이나 활을 잡은 것, 분위기 같은 것으로 누가 인간의 우두머리인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카람의 시선은 단순히 적대 세력의 우두머리를 보는 얼굴이 아니었다.
‘나를 알고 있군.’
세드릭은 그 시선을 맞받았다. 가슴 안이 뒤숭숭해졌다.
저자가 한계를 넘은 것이로구나.
이 자리에서 죽이는 게 나을까?
아니면 살려두어야 할까?
미래를 기약하는 일은 현상유지일까, 변화일까?
아르티제아라면 뭐라고 말할지 알고 싶었다.
카람 전사들이 웅성거렸다. 전투가 될 뻔했던 국면은 다시 한 번 대치 상황으로 들어갔다.
* * *
그 시각에 아르티제아는 알폰스 하나만을 동반해서 사원으로 향했다.
외투 위에 후드가 달린 털망토를 둘렀다. 얇은 레이스 장갑을 낀 손에는 보석이 달린 작은 손가방을 들었다.
마차도 없이 걸어서 가지만, 왜 그러느냐고 묻는 사람 하나 없었다. 아무도 모르게 나왔기 때문이었다.
가능하다면 알폰스도 없이 혼자 나오고 싶었다. 그러나 수도에서와 달리 그를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호위를 대신해줄 프레일도 없거니와 알폰스도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알폰스는 자기가 없다면 최소한 다른 기사 두 명을 붙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둘이나 동반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알폰스가 나았다. 게다가 그는 지난번에도 사원까지 따라왔었다. 사제의 얼굴도 이미 보았다.
대공비가 연락도 없이 사원에 오자 입구에서 맞이하는 견습 사제가 크게 놀라 고개를 숙였다. 아르티제아는 낮게 말했다.
“잠시 조용히 기도만 하고 갈 테니 알리지 말거라.”
“아, 예.”
견습 사제가 고개를 숙였다.
아마 진짜로 비밀스러운 방문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대공비가 사원에 와서 조용히 기도를 올리고 갔다는 것이 숨겨야 할 일은 아니니까.
그 정도는 그다지 상관없었다.
아르티제아는 후드를 벗지 않고 사원을 가로질렀다.
그녀가 향한 곳은 예배당도, 기도실도 아니었다. 그녀에게 카람 작물에 관해 알려주었던, 그 신실한 사제의 방이었다.
세드릭의 생각은 틀렸다. 아르티제아는 리시아를 떼어놓기 위해서 그녀에게 편지를 맡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