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91
악녀는 두 번 산다 91화
아르티제아는 멍하게 세드릭을 올려다보았다.
“들어가도 됩니까?”
아르티제아가 머뭇거리자 세드릭이 물었다. 아르티제아는 당황해서 뒤로 물러섰다.
안 된다거나 싫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 너무 놀라서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을 뿐이었다.
리시아가 떠난 것이 나흘 전이었다.
톨드 관문의 요새까지 말을 타고 사흘거리라고 들었다. 그러니까 리시아가 돌아오려면 적어도 사나흘은 더 걸리겠거니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시점에서 세드릭이 돌아올 수 있을 리가 없다.
분쟁이 그렇게 간단히 종결되었을 리가 없었다.
납치되었다던 카람 아이를 돌려보내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2만이나 되는 전사가 모였다. 그 정도 숫자가 모이면, ‘상황 종결되었으니 흩어져.’라고 말한다고 해서 끝나지 않는다.
개개인의 이익, 세력 간의 이익, 그 밖에도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만큼 모였으면 한 번 싸워 보자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어떻게 된 거예요? 언제 오셨어요?”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그럴 것이다. 세드릭은 흙먼지와 눈이 묻은 바람막이 망토까지 걸치고 있는 채였다. 본성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아르티제아의 방으로 직행한 모양이었다.
세드릭이 말했다.
“원래는 편지를 쓰려고 했는데, 좀처럼 펜이 나가질 않아서요.”
“네?”
“알려줘야 할 것도 있고, 당신과 의논하고 싶은 것도 있었는데, 첫 문장이 도저히 써지질 않더군요. 그래서 그냥 왔습니다.”
“뭔가 큰 문제가 생겼나요?”
그녀는 바짝 긴장하여 그렇게 물었다. 세드릭의 말을 단어 그대로 첫 문장이 써지지 않는다고 받아들이지 못했다.
몇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심각한 사태가 생겼는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세드릭이 멋쩍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 당신의 조언이 필요할 만큼 중한 문제이기는 합니다만, 우선 미뤄두죠. 이쪽이 더 급하군요.”
“네?”
아르티제아는 눈을 깜박거렸다.
“수도로 떠나기 전에 보러 오고 싶었습니다.”
절반은 사실이었지만, 나머지 절반은 거짓말이었다. 그냥 보러 오는 것만이라면 이렇게 급하게 올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고 싶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세드릭이 두 팔을 벌려 그녀를 껴안았다.
그가 아주 천천히 움직였기 때문에 아르티제아는 끌어안기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깜짝 놀라 몸을 경직시켰다.
그녀의 입술 위에 부드러운 감촉이 눌려왔다. 그게 키스라는 걸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두 발이 공중에 떠 있었다.
“몸무게가 더 가벼워지지 않았습니까?”
“그렇, 지 않아요.”
아르티제아는 간신히 대답했다.
세드릭이 한 팔로 그녀를 가볍게 안아 올린 채 다른 손으로 먼지 슨 자신의 망토 버클을 풀었다.
검과 권총이 매달린 벨트와 외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르티제아는 충동적으로 몸을 구부려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
세드릭의 얼굴은 약간 차가웠다. 밖에서 찬바람을 맞은 시간이 길었기 때문이었다.
“바쁜 일 없습니까?”
“없어요.”
“몸은요? 아픈 곳은?”
“없어요. 전 병자가 아니에요.”
아르티제아는 몸을 떨며 말했다. 체온이 몇 도나 올라간 것 같았다. 눈꺼풀까지 뜨거워져서 제대로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세드릭이 웃었다.
“다행입니다.”
“뭐가요?”
“지난번처럼 상태가 안 좋으면 버티지 못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말끝이 소곤거림처럼 작은 소리가 되었다.
가쁜 숨결이 뒤섞였다. 세드릭이 아르티제아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아르티제아가 눈을 떴을 때에는 사방이 어두웠다.
몸이 후끈거렸다. 이렇게 따뜻하게 잔 것은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정확히는, 에브론 대공령으로 오는 선박에서 내린 이래 처음이었다. 항구도시에서는 너무 지쳐서 잤다기보다는 기절한 듯한 상태였으니까.
우습게도, 맞닿은 몸의 감촉보다도 그 온도가 세드릭의 품에 안겨서 잠들었다는 사실을 실감나게 했다.
몸이 제법 편안했다. 평소에는 일어날 때마다 괴로웠던 손가락의 뻐근함이라든가 어깨 시림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으…….”
그래도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평소에는 있는 줄도 몰랐던 근육들이 여기저기에서 자기 존재감을 호소했다.
침대가 출렁거렸다. 아르티제아는 무심결에 돌아보았다.
옆에 누워 있던 세드릭이 팔을 뻗어 초에 불을 댕겼다. 그리고 아르티제아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르티제아는 멍한 기분으로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 옆에 이 남자가 누워 있다는 게 여전히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그러자 세드릭이 그녀 쪽으로 팔을 뻗었다. 배에 가볍게 세드릭의 팔이 감겼다.
아르티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도저히 똑바로 눈을 뜨고 그를 쳐다볼 자신이 없었다.
“이대로 아침까지 잘 자신 있으면 자도 되지만, 잠깐 눈을 뜨는 게 나을 겁니다. 아직 저녁이에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로 스며들었다. 아르티제아의 피부 위로 떨림이 스쳐갔다.
그녀가 눈을 감고 있자 세드릭이 이번에는 뺨을 어루만졌다.
“일어났으면서 아닌 척하지 말아요.”
팔이 다시 허리에 감겼다. 아르티제아는 주르륵 그에게 끌려갔다. 세드릭이 한 번 그녀를 꽉 안았다가 놓았다.
완전히 잠이 깨버렸다.
애써 눈을 뜨자 세드릭의 얼굴이 코앞에 보였다. 아르티제아는 이번에도 눈을 내리깔아 버렸다.
세드릭의 손이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눈 안 뜨면 키스합니다.”
뜨지도, 안 뜨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아르티제아는 머뭇머뭇 눈꺼풀을 들었다.
세드릭은 자기 말을 지키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에 다시 입술이 닿았기 때문이다.
숨을 제대로 들이쉬지 못한 아르티제아의 몸에서 힘이 빠지고 나서야 입술이 떨어졌다. 세드릭이 그녀를 베개 위에 내려놓고 다시 끌어안았다.
그의 어깨를 벤 채로 아르티제아는 잠시 누워 있었다.
세드릭이 게으른 얼굴을 했다. 지쳤을 때의 나른함이나 피곤함과는 달리 침대에 파묻혀 일어나기 싫어하는 얼굴이었다.
아르티제아는 생경한 기분으로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 얼굴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꼬르륵 위장이 졸아들었다. 공복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몹시 배가 고팠다. 이렇게 허기를 느낀 것은 흔치 않은 일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자 세드릭이 나태함을 저 멀리 던져 버리고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를 긁적였다.
“뭘 좀 먹어야죠?”
“……네.”
아무래도 꼬르륵거리는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아르티제아는 얼굴이 빨개졌다.
“잠깐 기다려요. 제가 나갔다 오겠습니다.”
“사람을 불러요. 하녀가 대기하고 있을 거예요.”
“어차피 옷도 갈아입어야 하고요. 그리고…… 지금 별로 방해받고 싶지 않은 기분입니다.”
아르티제아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실내는 어둑하고 따뜻했다. 벽에 걸린 흰 모피가 벽난로와 촛불의 빛을 반사하여 실내가 따스한 색으로 물들었다.
그 온기가 여운 같았다. 마치 세상에 오로지 둘만 남은 듯한, 애틋 하고 절실한 공간이었다.
아르티제아는 순간이나마 그 시간이 영원하기를 소원했다.
세상에 아무것도 없으면, 오로지 그와 자신만 존재한다면, 더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더 이상은 죄짓지 않고, 염치도, 수치도 없이 이대로 행복하게 그의 품에 묻혀 있을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영원히 문을 열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드릭이 일어섰다. 그리고 침대 곁과 여기저기 떨어진 외투와 부츠를 주웠다.
“열쇠는 어디 있습니까?”
그가 자신의 침실과 연결된 문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아르티제아는 이불을 몸을 가리며 조심스럽게 일어나 앉았다. 누운 채로 대답하는 것이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그 옆에, 서랍 속에 들어 있어요.”
아르티제아가 방문 옆의 작은 장식 탁자를 가리켰다. 세드릭이 탁자 서랍을 열어 열쇠를 꺼냈다.
잠겨 있던 문이 열렸다. 세드릭은 문을 열어둔 채로 저쪽 방으로 건너갔다.
열린 문으로 찬바람이 밀려들었다. 그가 옷더미를 바닥에 던지고 설렁 줄을 당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추워지니까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도로 눕고 싶어졌다. 하지만 아르티제아는 조심스럽게 침대 밖으로 나왔다.
세드릭의 침실 쪽에서 들어오는 찬 공기를 보니 잠옷을 찾으러 드레스룸을 뒤지러 갈 자신이 없었다. 하녀를 부르면 목욕물을 준비하고 옷을 가져다 입혀주기까지 할 테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맨몸 위에 가운을 걸치고 아르티제아는 벽난로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주물 주전자에 물을 채워서 손수 불 위에 걸었다.
곧 세드릭이 한 손에 샌드위치 접시와 우유병을 가지고 돌아왔다. 문이 닫히자 곧 훈훈해졌다.
“우선 간단히 먹어요. 집사가 제대로 저녁을 준비해서 가져온다는데, 제가 그러지 말라고 했습니다.”
“전 이 정도면 충분해요. 세드릭 님은 모자라시겠지만.”
“안 먹고 오래 버티는 것도 제 쪽일 겁니다.”
“생존 능력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잖아요.”
아르티제아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세드릭이 가볍게 웃어 흘렸다.
“먹을 건 뭐가 됐든 나중에 주방에서 가져다 먹으면 됩니다. 일단 앉아 있어요. 차 기다리겠습니까? 아니면 우유에 먹고.”
“차가 더 좋아요.”
세드릭이 다기를 챙겨왔다. 아르티제아는 벽난로 앞에 앉아서 그가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슬리퍼를 꿰어 신은 맨발이 눈에 박혔다.
“왜 그럽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시선이었다. 그냥, 그만큼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구나 하는 실감이 나서 낯설어졌을 뿐이다.
세드릭이 차를 우렸다. 아르티제아는 한 입 크기로 잘라진 샌드위치를 하나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아르티제아는 차가운 음식은 원래 잘 받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몸이 따뜻한 탓인지 잘 넘어갔다.
으깨진 감자와 노른자 사이에 도톰한 두께로 잘린 삶은 달걀 흰자와 사과가 들어가 있었다. 앞니에 그게 걸려 잘릴 때마다 산뜻한 맛이 났다. 겨자가 조금 들어갔는지 살짝 자극적이었다.
“차에 우유 넣을 거죠?”
“네, 그렇게 주세요.”
세드릭이 잔에 우유를 붓고 그 위에 진하게 우린 차를 따랐다.
아르티제아는 고맙게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웃었다.
“에브론 대공 전하가 우린 차를 다 받아 보네요.”
“그렇게 치면, 로산 후작이 끓인 물입니다.”
세드릭이 미소를 지었다.
샌드위치를 두어 개 집어먹고 나자 좀 살 것 같았다. 아르티제아는 그다음에야 물어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급하게 달려온 거, 정말로 중요한 일 아니신 거예요? 리시아는요?”
“천천히 올 겁니다. 혹시라도 당신이 저의 답장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떠날까 봐 걱정이 되어서 서둘렀습니다.”
세드릭이 찻잔 안에 설탕을 넣고 스푼으로 휘저으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