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92
악녀는 두 번 산다 92화
아르티제아는 난처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답장은 받고 가려고 했어요.”
하지만 세드릭의 말은 전혀 틀렸다고는 할 수 없었다.
세드릭이 말한 것은 단순히 편지 이야기가 아니다. 세드릭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날 작정이었느냐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럴 작정이었다. 가능한 한 다시 그의 얼굴을 보지 않고 떠날 작정이었다.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수도로 가면 한동안 세드릭을 만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뒤흔들리는 마음을 조금은 다질 수 있을 것이다. 초조함도, 욕심도 조금은 마음에서 쫓아낼 수 있을 것이다.
냉정도 돌아올 것이다. 아르티제아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에브론 대공령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변수가 분쟁을 일으켰다거나 대공령의 충성에 금이 갔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 아르티제아 자신이 흔들리고 있다.
지금에 안주하고 싶어진다. 얼마 남지도 않은 인간성을 마저 던질 자신이 없어진다. 위선자가 되려고 한다.
효율을 위한 살해는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고 갈등하고 있다.
그런다고 해서 그녀의 손에 묻은 피가 씻어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차피 반드시 죽여야만 할 자가 몇이나 남아 있다.
희생의 최소화는 최소화에 불과하다. 아예 희생이 없어지는 게 아니다.
효율이 나빠지면, 최종적으로 피해는 늘어난다. 아르티제아는 그것을 계산할 수 있었다. 애초부터 피 한 방울을 덜어낸다고 해서 붉은 손이 희어질 리도 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지금 당장 그에게 들켜 미움을 살까 봐 그것이 걱정스러워서 손발이 무거웠다.
어리석은 일이다.
세드릭의 옆에서 행복해지자고 결으로 온 게 아니지 않은가? 그가 하지 못할 일을 하기 위해 온 것이지.
훗날의 일을 생각해서도 그랬다. 세드릭이 황제의 관을 쓴 후도 생각해야 한다.
아르티제아는 그가 통치를 시작했을 때에 방해될 자들을 가능한 한 많이 치워 놓고 싶었다. 떠나기 전에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과연 자신이 제때 떠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과거로 막 돌아왔을 때에 아르티제아에게는 마음속으로 그려 놓은 완벽한 미래의 형상이 있었다. 서로 사랑하는 바른 황제와 선한 황후가 함께 세상을 더 낫게 바꾸기 위해 노력해 나간다. 그것은 틀림없이 온 백성이 원하는 가장 완전한 황실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고통스러워서 그때를 생각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미래를 생각할 수 없게 되면, 모략을 설계할 수 없다.
그러니 떠나야 했다.
아르티제아는 자신의 머릿속이 완전히 곤죽이 된 것 같다고 느꼈다. 그녀에게서 유일하게 쓸모 있는 부분이 망가지고 있었다.
“티아.”
세드릭이 손을 뻗어서 그녀의 뺨과 턱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아르티제아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닿기만 하는 가벼운 키스가 내려왔다.
역시 생각할 수가 없게 되고 만다.
입술이 떨어지는 찰나에 긴 한숨을 내쉬자 세드릭이 그녀의 아랫입술을 엄지로 쓸었다.
“지금은 제 생각만 하고 있어도 되지 않습니까?”
아르티제아는 또다시 난처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생각밖에 하지 못하게 되어서 곤란한 것인데 말이다.
“톨드 관문의 상황은 어떤가요?”
“지금 말 돌린 겁니까?”
아르티제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찻주전자를 끌어다가 빈 잔을 다시 채우며 말했다.
“그쪽이 본래의 용건이었잖아요.”
“당신이 떠나기 전에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고 말해도 본래 용건이 그쪽이라고 주장할 거지요?”
“어쩐지 오늘 저한테 좀 혹독하신 거 같은데요.”
“당신 탓입니다.”
세드릭이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아르티제아는 키스당하기 전에 고개를 돌렸다.
“말을 돌리고 있는 건 세드릭 님 쪽인 거 같은데요.”
“혹독하게 굴고 있는 건 당신 쪽이고 말이지요.”
세드릭은 그녀의 뺨에 키스하는 것으로 양보하기로 했다.
“전쟁 중인데 이렇게 자리를 비우셔도 되나요?”
“교전이 계속되고 있는 상태는 아닙니다. 일차적으로 한 차례 싸운 후, 카람이 포의 사정거리 밖까지 물러났습니다.”
“퇴각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고요?”
“저쪽에도 다른 목적이 있는 듯합니다.”
세드릭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말했다.
“카람에서 공성 병기를 만들었습니다.”
아르티제아는 샌드위치를 하나 더 입에 넣으려다가 그러지 못하고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카람에게 그 정도의 기술력이 있었나요?”
“없었습니다. 이번에 만든 공성 병기도 실질적인 쓸모는 없었습니다. 충차는 포격 한 방에 부서져 버렸고, 투석기는 정확도가 떨어지는 데다가 세 번 정도 바위를 날리고 나니까 부서져 버리더군요.”
세드릭이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설계 자체는 완전히 제대로 된 트레뷰셋이더군요. 그것을 제작한 대장장이의 솜씨는 몹시 떨어졌지만요.”
“소부대가 톨드 산맥을 넘어와 공격한 것도 처음이라고 하셨었죠. 산맥을 넘는 데에 시간이 걸렸을 것을 생각하면, 무작정 넘어왔다기보다는 일단 넘어와 잠시 숨어 있다가 톨드 관문에 병력이 집중되는 때에 맞추어 공격을 시작했다는 것이고……. 전례 없는 일이 두 가지나 생겼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내통자가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으셨나요? 교류가 있으니, 인간 중에 누군가가 카람 측에 전술이나 병기에 관한 정보를 전해 주었을지도 몰라요. 세드릭 님을 견제하거나 에브론 대공령에 위해를 입히기 위해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지요.”
아르티제아는 확인차 물었다. 세드릭이 부정했다.
“그럴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까요. 간단한 교역이나 개인적인 관계라면 또 모를까, 말이 통하지 않는 채로 인간이 카람의 땅에 들어가 지배 계층에게서 전쟁을 일으킬 정도의 신뢰를 얻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뇌물이라면 어때요? 적당한 병력으로 톨드 관문을 위협하는 대가로 돈을 준다거나.”
“무척 인간적인 시선이군요.”
세드릭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카람은 금은에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이곳에서 가장 귀한 것은 식량과 방한용품입니다. 카람의 지배층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자원이 눈에 띄지 않고 산맥을 넘어 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아르티제아가 생각하기에도 그랬다. 본토에서부터 북부로 그 정도 양의 자원이 이동했다면 필연적으로 정보망에 걸린다.
자원이 모자란 북부에서라면 더더욱 눈에 띄었을 일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카람이 개인적으로 인간의 전술을 배웠고, 그것을 자기 세력에게 설득시켰다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사실 그것 외의 가능성을 생각하기는 어렵죠.”
아르티제아는 숨을 들이켰다.
그렇다면 그자는 ‘돌아온 자’인 게 틀림없다.
아르티제아가 로이가르 대공을 축출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을 때에 에브론은 일차적으로 패전했었다.
최종적으로 세드릭이 카람의 왕을 죽임으로써 기적적인 승리를 얻어내기는 했다. 그러나 그 영향은 남았다.
한 번 무너졌던 톨드 관문의 요새는 전처럼 단단하지 못했다. 로렌스가 황제가 된 후에 다시 한 번 뚫렸다.
로렌스는 그레고르 황제와는 또 달랐다.
그레고르 황제는 보다 철저하게 에브론 대공가를 이용하고자 했었다. 그러기 위해서 에브론을 살려두었다.
어린 세드릭을 살려서 대공가를 잇게 하고, 선대 대공 부부를 복권시켜 명예도 되찾아주었다. 물자 보급을 중단하지 않았고, 로이가르 대공의 목을 교수대에 매달기도 했다.
그러나 로렌스는 냉철한 정치가가 되지 못했다.
원래부터 그는 세드릭을 싫어했다. 기질적으로 맞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리시아와 결혼한 이후로는 열등감과 질투에 사로잡힌 채 일방적으로 증오했다.
리시아가 죽은 뒤로 에브론 대공령으로 가는 물자는 철저하게 끊겼다.
상단의 교역조차 금지되었다. 그레고르 황제처럼 식량을 전략물자로 이용해서 에브론을 통제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증오심 때문에 말려 죽일 작정이었으니까.
아르티제아가 아무리 경고해도 소용없었다.
그러고도 세드릭은 몇 년을 버텨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에브론은 멸망했다.
세드릭은 근거지를 잃고 기사단과 더불어 떠돌게 되었다. 리시아도 죽었으니, 그로서는 더 이상 수도에 올 이유도 찾지 못했으리라.
국경선은 실질적으로 에브론 남쪽 경계선인 앨리아 장성에서 다시 정립되었다. 제국에는 막대한 군비가 필요하게 되었다.
톨드 관문이라는 군사적 요충지도, 백여 년에 걸쳐 카람을 막아온 에브론의 노하우도 잃었기 때문이다.
그 국경을 지키는 일은 제국을 피폐하게 만드는 데에 일조했다. 나중에는 체제가 완전히 무너지면서 국경 자체가 유명무실해졌지만 말이다.
카람은 북부를 차지했었다.
당시에는 그 의미를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북녘은 쓸모없는 땅이다. 그때에 아르티제아가 걱정했던 것은 세드릭이 반황제파의 구심점이 됨으로써 생기는 정치적 불안함이었다.
결국 제국 내의 권력 문제로만 그 일을 파악했던 셈이다.
그러나 시선을 돌려 카람 측에서 생각해보면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당시에 에브론 대공령의 영민을 앨리아 장성 밑으로 퇴거시키는 조치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아무리 인구밀도가 낮다 해도 영지 전체를 따지면 거주민의 숫자가 적지 않았다.
카람이 땅을 점령했다고 해서 일거에 영민을 몰살한다거나 식민지 체제를 만들어 격리시킨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자들과 카람 사이에서는 교류가 생겼을 것이다.
톨드 산맥으로 가로막혀 있는 상황에서도 교류가 있었다. 그러니 같은 땅에 산다면 더욱 교류의 양은 늘어나고 질도 빠르게 상승했으리라.
교류가 희박한 상황에서 어떤 카람이 갑자기 인간을 배워야겠다고 깨닫고 전술을 공부했을까? 그런 식으로 전에는 없었던 일이 갑자기 생겨났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새로운 문명과 접촉하여 학습한 카람이 되돌아왔다고 생각하는 쪽이 합리적이다.
아르티제아가 가장 염려하던 변수의 등장이었다.
“첫 교전 직후에 물러난 것도 그랬어요. 보통 카람이라면 일단 전투가 시작되면 흥분하여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물러서는 것이 그들 사이에서는 몹시 불명예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전략적 퇴각이라는 것은 거의 없는 일입니다. 저만이 아니라 요새 사령관도 그렇게 빠르게 퇴각하는 것은 처음 봤다고 하더군요.”
“요새 사령관은 50대이지요?”
“예. 10대 후반부터 전선에 섰으니 30년 이상을 카람과 싸운 셈입니다.”
“그렇다면 일천한 경험으로 말했다고 할 수는 없겠군요.”
“그렇습니다. 그 정도의 통제력을 가진 지휘관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겠죠.”
세드릭이 말했다.
“그게 누구인지도 짐작이 갑니다. 성벽 위에서 보았습니다.”
아르티제아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세드릭이 말을 이었다.
“처음 당신이 수도로 갈 거라는 소식을 받았을 때에는 시간을 끌어야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소부대일지언정 카람이 톨드를 넘어 공격해 왔고, 거기에 공성 병기까지 나왔다면, 실제로 이곳에서의 전황은 그렇지 않더라도 중앙에서는 큰 문제로 받아들일 테니까요.”
지리멸렬한 교착 상태를 유지할수록 중앙에서는 긴장할 것이다. 우습게도 그럴수록 에브론은 건드릴 수 없는 대상이 된다.
적극적인 교전을 하지 않고 농성만 하더라도 전쟁은 전쟁이다. 물자는 빠르게 소진될 테고, 병력도 피해를 입을 것이다.
세드릭은 그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아르티제아가 운신할 수 있는 범위를 넓혀줄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