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96
악녀는 두 번 산다 96화
아르티제아가 수도 인근에 도착한 것은 2월 하순, 이제 곧 3월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한 달 반 남짓한 여정이었다.
애초의 예상보다는 조금 기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아르티제아가 단출하게 움직이기 위해 짐을 줄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필요한 물건은 모두 그 자리에서 사들이고, 필요 없어진 것을 나눠주거나 버리는 식으로 움직였다.
에브론은 아직 눈에 덮여 있을 시기였으나 수도는 이미 따뜻했다. 북부 출신들의 체감으로는 완연히 봄이었다.
아르티제아는 수도에 바로 들어서지 않았다. 가까운 소도시의 여관을 하나 통째로 빌려 일단 걸음을 멈추었다.
수도로 들어가기 전에 그간의 사정을 파악해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호출을 받은 프레일과 안스가르는 곧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두 사람을 마중 나온 것은 헤일리였다.
“아니, 헤일리 경.”
프레일은 깜짝 놀라 그녀를 불렀다. 헤일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오랜만이에요. 그리고 이제는 ‘경’이 아니에요. 소식을 듣지 못하셨나요?”
프레일이 고개를 갸웃했다. 헤일리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대공 전하께서 영지에 계신데 굳이 수도까지 전령을 보내서 알릴 것까지는 없는 일이었지요. 전쟁에 관한 소식은 들으셨지요?”
“예.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황궁에도 보고가 들어갔으니까요. 카람이 공성 병기를 만들었다는 게 사실입니까?”
“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드릴게요. 그렇게 심각한 사태는 아니에요.”
“심각한 사태라서 헤일리 경이 오신 건 아닌 겁니까?”
프레일의 질문에 안스가르가 말했다.
“헤일리 경은 마님의 시녀로 오신 것 같군요.”
그는 아르티제아가 대공가의 가신들 중에서 시녀를 골라 뽑겠다고 계획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네, 그런 셈이지요.”
“비 전하께서 사람 보는 눈이 있긴 있으시지요. 헤일리 경은 그냥 행정관으로 끝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왔으니까요.”
프레일이 말했다. 헤일리는 답답하고 고지식한 사람이 많은 본성에서 대화가 잘 통하는 몇몇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용케 설득되셨군요. 복잡한 일은 하고 싶지 않으시다더니.”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어요. 일단 응접실로 가세요. 비 전하께서는 지금 목욕 중이시니 조금 후에 나오실 거예요.”
프레일과 안스가르가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아르티제아는 그런 식으로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자신에게 인사하기 전에 먼저 헤일리에게 본성 소식을 들으라는 뜻이었다.
셋 다 그것을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이었다.
헤일리가 두 사람을 응접실로 쓰고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본성의 소식을 간략하게 정리해서 알려주었다.
조르딘 가문의 소식에 두 사람은 탄식했다.
안스가르 같은 경우에는 오브리가 태어날 때부터 보아온 사이였다. 그는 눈물을 가볍게 훔치기까지 했다.
프레일이야 본성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브리를 잘 알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은 3년 전이었고, 그때에 오브리는 15살이었다. 철이 없는 꼬마 아가씨구나, 하는 생각이 있는 정도였다.
그는 그저 조르딘 가문과 여러 사정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안타까움과는 별개로 프레일은 냉정하게 말했다.
“세대교체를 할 때가 되긴 했습니다. 멜 경이 적당한 시기에 이어받은 셈이군요. 에브론도 이제 바뀌어야 할 때입니다.”
“비 전하를 위해서 말인가요?”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아시잖습니까, 헤일리 경? 충성심을 보이고 조용히 따르는 것만으로 살아남기에는 한계가 와 버린 거예요.”
프레일은 말했다. 그간 계속 수도에서 정보 수집 임무를 해온 그는 상황의 긴박함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아론 경도, 마거릿 님도 충실하고 유능한 분이지만, 황실의 이름만 들어도 몸이 움츠러드시는 경향이 있지요. 멜 경도 고지식하고 보수적인 편이지만, 아론 경보다는 젊고 융통성이 있으니까요. 게다가 대공 전하께서도 멜 경이 편하실 겁니다.”
“네. 제 생각에도 아버지가 먼저 물러나시는 게 옳았다고 생각해요. 아버지에게 다른 뜻이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고, 대공 전하께서도 변함없는 신뢰를 보여주셨지만, 자리를 단단히 차고앉은 선대의 공신이라는 게 원래 편안한 존재는 아니지요.”
“게다가 아론 경도, 마거릿 님도, 두 분 다 대공 전하를 보살펴야 되는 자식처럼 느끼는 경향이 있으셨으니까…….”
안스가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것은 그도 예외가 아니었다.
프레일이 말했다.
“비 전하를 모시는 데에 있어서, 대공 전하께서 선택하셨으니 충성해야 한다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저는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하고 있지 않아요. 시녀라지만, 실상은 인질에 가까운 걸요.”
“헤일리 경…….”
“조르딘에는 배신한 전력이 생겼어요. 비 전하께서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고 싶어 하시는 것은 당연하지요.”
헤일리는 그렇게 말하고, 덧붙였다.
“그리고 비 전하가 충성할 만한 분인지 어떤지는, 저도 지금부터 봐야겠어요.”
그녀가 보기에 세드릭은 감성적인 이상론자였다.
이상이 나쁠 것은 없으나 비현실적이었다. 에브론 대공으로서 현상 유지는 할 수 있어도 그 이상은 어려웠다.
그것도 에브론 대공령이 특수한 위치에 서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헤일리는 생각했다.
헤일리는 가족을 사랑하고 대공령을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세드릭에 대한 신뢰는 부분적이었다.
그녀는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충성심은 개인적이고 열정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속한 땅에 대한 아이 같은 본능적인 수준의 애정에 불과했다.
요컨대 대공령의 안위와 가족의 안전이 대립된다면 그녀는 망설임 없이 가족을 선택할 것이다. 멜이나 다른 기사들이 가지고 있는 충성심과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아르티제아는 조금 달랐다. 그녀가 요구하는 것은, 에브론 대공가라고 하는 테두리를 넘어서서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이다.
아이가 느끼는 것처럼 맹목적이었던 대공령의 상호 신뢰는 깨졌다. 세드릭도 현실을 보기 시작한 것 같았다.
헤일리는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영원히 본토에 종속된 채로 살아남기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을 게 아니라면 말이다.
자기들끼리 상처를 어루만지고 의지하며 정을 도탑게 하는 것에는 자위 이상의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대로 있었다가는 변화도, 발전도 없이 정체된 채로 서로 끌어안고 침몰했을 것이다.
헤일리는 에브론을 포기하고 있었다. 아무런 견해도 없이 하급 행정관에서 만족하고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달라질 수 있다면, 움직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프레일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헤일리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프레일 자신도 그렇고, 헤일리도 그렇고, 에브론 대공령의 문제점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앞에 나서서 에브론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인물은 아니었다. 신분이 좀 더 높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결국 에브론을 달라지게 할 수 있는 건 에브론 대공뿐이다.
“어쨌거나 헤일리 경이 오셨으니 이제 든든합니다.”
“‘경’은 이제 신분에 맞지 않아요.”
“그러면, 이제는 헤일리 님이라고 불러야 합니까? 아니면 헤일리 영애?”
“이 나이에 영애도 좀…….”
헤일리가 난처한 얼굴을 했다.
그런 대화를 하고 있는데, 아르티제아가 나왔다. 리시아가 그녀를 뒤따라 나왔다.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프레일과 안스가르는 정중하게 한쪽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아르티제아는 잠시 리시아와 다른 사람들이 인사를 나눌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 상석에 앉으며 모두에게 자리를 권했다.
“편안하게 앉아요.”
“먼 길 다녀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그리 고생스러운 길은 아니었어요. 대공령은 좋은 곳이더군요. 충성스럽고.”
아르티제아의 말에 안스가르가 고개를 숙였다.
이미 헤일리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으니, 그녀의 말에서 언외의 이야기를 읽어내기에는 충분했다.
송구스러웠다.
“수도의 사정을 듣고 싶군요. 겨우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선 안스가르부터 이야기해보세요. 대공저는 어떤가요?”
“비 전하와 대공 전하께서 안 계신데 무어 별일이 있겠습니까? 개축 공사는 무사히 끝났습니다. 정원 조경도 비 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마무리되었고요.”
“안스가르를 믿겠어요.”
설계는 아르티제아가 직접 했고, 관리 감독은 안스가르가 했다.
공사 목적 자체는 숨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조각조각 내어 일을 조금씩만 맡기고 전체 구상을 보지 못하도록 막았다. 새로운 설비의 위치를 알아내거나 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조경은 에브론 대공령에서 정원사를 직접 불러들여 정비했으므로 문제가 없었다.
“별장들도 차근차근 정비할 예정입니다.”
“알았어요. 모두 맡길게요.”
아르티제아는 부드럽게 말했다. 헤일리가 조금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르티제아는 대공가 사람들에게 대체로 온화하고 관대하게 굴었지만, 자기 위치를 낮추거나 굳이 겸손하게 말하는 일은 없었다.
세드릭을 제외하면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부드럽고 공손하게 존대하는 것은 안스가르 한 명뿐이었다.
‘그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안스가르는 세드릭의 양육자로서, 가장 오래되고 믿을 만한 집사로서, 대공가의 사람들도 모두 존중하는 상대이기는 했다.
하지만 아르티제아는 바로 곁에서 시중드는 하녀들에게도 쉽사리 마음을 열지 않는 이였다.
이렇게 안스가르에게는 다정하게 대하는 것이 헤일리에게는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하긴, 생각해보면 그런 상대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리시아 같은 예외도 있었다.
아르티제아가 이번에는 프레일을 바라보았다.
“자네도 이야기해 보게.”
프레일이 잠시 안스가르와 리시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헤일리는 몰라도 리시아는 이런 이야기를 듣기에 적절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아르티제아가 여기에서 물었으니, 굳이 사람을 물릴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마르타 백작 부인이 살롱을 열었습니다.”
헤일리는 잠시 생각한 다음에야 마르타 백작 부인이 누구인지 기억해냈다.
수도로 내려오는 동안에 아르티제아가 그녀에게 수도의 유력 인사들에 대해 암기하도록 시켰던 덕분이었다.
“황후 폐하의 시녀, 말씀인가요?”
“예. 황후 폐하께서 황후궁에 공간을 내주셨습니다.”
공간을 내주었다는 형식을 취했지만, 사실상 그 살롱이 황후의 뜻대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것도 없었다.
“황후궁이 열리고 벌써 석 달이 넘었습니다만, 그동안에 황후 폐하께서 만나주신 건 올해 갓 데뷔한 어린 영애들이 아니면, 어느 세력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 중에서도 가난하고 나이 많은 부인들뿐이었습니다.”
프레일이 명단을 하나 꺼냈다. 아르티제아가 직접 그것을 확인했다.
유념할 만한 이름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 어딘가의 세력에 소속되지 못할 만큼 보잘 것 없는 사람뿐이었다.
아르티제아가 미래를 생각해보아도 이중에 두각을 드러낸 자는 없다.
보통 생각하는 것과 반대의 방향에서 황후가 매우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녀는 황후궁의 문을 열어 자신이 건재하며, 언제든 사람을 만날 수 있음을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은거를 풀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