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98
악녀는 두 번 산다 98화
라이는 여관의 말구종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아르티제아는 느긋하게 새 찻잔에 차를 더 채우고 우유도 부었다. 오래간만이니 라이에게 손수 차라도 대접해줄 작정이었다.
“오래간만이군.”
라이가 모자를 벗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첫마디로 이렇게 말했다.
“살이 좀 찌셨습니다?”
“…….”
아르티제아는 허를 찔렸다.
그녀는 라이에게 대꾸하는 대신 프레일을 바라보았다. 프레일이 라이를 향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올렸다.
라이를 만나는 것은 우선시될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맡고 있는 역할 자체는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수도에 오자마자 만나야 할 만큼 시급한 문제는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프레일이 상황을 보고하고, 아르티제아가 판단을 마친 후에 이쪽에서 라이를 만나러 가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프레일은 사전에 허락을 받지 않고 이곳까지 그를 데려왔다.
라이 자신이 아르티제아를 접견하고 싶다는 강력한 희망이 있기도 했지만, 프레일이 보기에도 문제가 있어 보였다.
그래서 약간의 위험을 무릅쓰고 서둘러서 우선적으로 보고하기로 한 것이었는데…….
라이도 입을 뻐끔거렸다. 아르티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은밀한 일을 한다는 사람이 뇌를 거치지 않고 말을 하는군. 그런 버릇이 있는 줄 몰랐는데.”
“아뇨. 아뇨, 아뇨. 죄송합니다, 그게.”
라이가 격하게 손을 내저었다.
“보기 좋아지셨다는 뜻입니다!”
“체형을 지적했다는 게 문제가 아니야. 그렇게 생각 없이 말을 내뱉는 버릇이 있는 줄 몰랐군. 금화가 아니라 독병을 줬어야 했는데.”
라이는 등골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소리 지르며 화내는 사람보다 더 무서웠다.
아르티제아는 이번에는 프레일을 향해서 말했다.
“둘 다 살아남은 게 용해.”
“비 전하, 그게…….”
“프레일 경은 허술해서 꼭 한 가지씩 빠뜨리는 버릇이 있고, 라이는 말이 생각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못하는데, 용케 둘 다 죽지 않았어. 내가 어리석었네. 자네들에게 수도를 맡겨놓고 갈 생각을 했다니.”
프레일은 억울했다. 말실수를 한 것은 라이였다. 왜 자기까지 도매금으로 혼나야 하는가.
라이는 침묵만 했다. 진짜로 뇌를 거치지 않고 말이 새어나갔으므로 할 말이 없었다.
보기 좋아졌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나쁜 의도는 아니었고, 감히 아르티제아를 평가하려는 의도는 더더욱 없었다.
그냥 항상 그녀가 너무 마르고 혈색이 나빠서 안됐다고 생각했었기에, 무심코 말했을 뿐이다.
아르티제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라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실망 좀 시키면 어떻단 말인가? 가족을 손아귀에 넣고 있는 고용주이시긴 했다.
하지만 그것뿐인데 말이다.
“그래, 무슨 일인가? 어머니와 관계라도 가졌나?”
라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절 뭐로 보시는 겁니까? 제가 좋은 놈은 아니지만, 맡은 바 임무가 무엇인지 모르는 놈도 아닙니다. 감히 황제의 여자에게 손대는 얼간이도 아니고요!”
“하지만 유혹은 받았겠지?”
그러자 라이가 입을 다물었다.
그런 이야기를 전혀 들은 바 없는 프레일이 경악해서 라이를 쳐다보았다.
아르티제아는 태연한 태도였다. 은밀하게 들여보낸 수하와 자기 친모 사이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냉정한 얼굴이었다.
프레일이 물었다.
“비 전하, 설마 젊은 남자를 골라 들여보내고, 만약의 경우 빨리 잠적시킬 준비를 하라고 하신 건 그 때문입니까?”
“그게 어머니가 신뢰를 만드는 방법이니까. 그런 일이 생겼어도 놀랄 것은 없다고 생각했네.”
“저는 아닙니다.”
모욕당한 사람처럼 라이가 성을 내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지만 동정심이 들었겠지?”
“…….”
“당연한 거야. 어머니는 격정적인 성품이고 자존심이 드높은데, 아마 자네에게는 몹시 약해진 내면을 전부 내보였을 테지. 그런 미인이 약한 내면을 전부 내놓고 매달리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수 있는 남자 쪽이 더 드물 걸세.”
“후작님.”
라이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부정하지는 못했다.
아르티제아는 약간 미소를 지었다.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까지는 알 수 없으나 라이의 심리 상태는 대강 짐작이 가는 바였다.
라이는 혼자서는 대처하지 못하는 문제를 만났으면서도 프레일에게 의논하지 못했다.
실질적으로 다급한 문제는 아니면서, 절실한 상황이다. 게다가 반드시 아르티제아를 직접 보고자 했다.
거기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일목요연했다.
“나는 자네를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야. 자네가 일시적인 정욕이나 충동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닌 것은 알고 있네. 자네는 그것보다는 좀 더 실질적인 이익으로 움직이지. 그래서 자네를 택한 것이기도 하고.”
“…….”
“그렇다고 해서 마음의 움직임까지 어쩔 수는 없지 않나. 매력적인 이성에게 마음이 약해지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니까.”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라이가 결국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진심으로 부끄럽게 생각했다.
밀라이라가 아르티제아에게 어떤 어머니였는지 알면서 연민을 품었기 때문이 아니다.
만일에 지금 밀라이라의 처지에 있는 것이 경국지색의 미녀가 아니었다면, 자신이 동정은커녕 조롱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될 수 있는 한 빨리 몸을 빼고 싶습니다.”
라이가 말했다.
“현실적으로도 대부인의 신뢰가 너무 깊어졌습니다. 황제의 침실에서 빠져나와 공개적인 장소에서 제를 만나러 오기까지 했으니까요. 이대로라면 곧 위험해집니다.”
“이제까지 받은 청탁은 몇 건이나 되는가?”
현재 라이는 밀라이라가 가장 신뢰하고 있는 사람이다.
로산 저택에 은밀하게 드나든다고 해도, 완전히 비밀은 아니었다. 라이 자체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한때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강령술사가 밀라이라의 귀빈이 되었다는 사실은 아는 이가 많았다.
그를 하잘 것 없는 사기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적지 않은 청탁이 밀려들었다.
프레일이 서류로 정리해둔 청탁 내용을 건네주었다.
“사소한 문제는 들어줘. 정치적으로 위험할 수도 있는 내용이나 너무 큰 것은 손대지 말고,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돈을 우려내도록 하게.”
“예.”
“특히 어머니 옆에서 사라지라는 종류의 제안은 전부 받아들이는 대신 돈을 요구해. 로산 저택의 집사에게도 거액을 달라고 하고, 마지막으로 한 탕 하고 사라지는 것으로 하지.”
“끝까지 사기꾼 노릇에 충실하란 말씀이시군요.”
“그래. 그리고 떠나기 전에 사실을 밝히게.”
“사기꾼이라는 것을요?”
라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르티제아가 말했다.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알릴지는 내가 나중에 구체적으로 일러주겠네. 그다음 잠적하면 되네.”
“하지만…….”
“어차피 행방불명으로 처리할 테니 어머니가 보복할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아르티제아의 말에 라이가 긴장한 채로 주먹을 한 번 쥐었다가 폈다.
“정말로 그걸로 됩니까?”
“그래. 자네 역할은 그걸로 끝이네.”
아르티제아는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구상 속에서 라이가 맡을 조각은 거기까지였다.
“당분간은 아예 수도에서 모습을 감추는 게 좋을 거야. 동부에 한 번 다녀오게.”
“동부요?”
라이는 대체 얼마나 또 자신을 굴리려고 그러나 싶어 소름 돋아 했다. 아르티제아가 말했다.
“찾아야 할 사람이 하나 있네. 어차피 휴가를 준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가족에게는 못 갈 것 아닌가?”
“젠장, 그렇긴 합니다만…….”
“사람 찾고 나서 가족에게도 한 번 느긋하게 다녀오도록 해. 언제가 안전한 시기인지는 수도의 근황을 살펴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걸세.”
“정말로 그래도 됩니까?”
“이번 일 끝나면 돈 걱정은 정말로 없어질 테니 은퇴해도 괜찮고.”
아르티제아의 말에 라이가 조금 초조한 얼굴을 했다.
“왜?”
“그 돈, 다 제가 가집니까?”
“자네 능력껏 우려낸 돈인데, 왜? 나한테 나눠 주려고?”
“아뇨. 그건 아니고.”
라이가 즉답했다. 그러자 아르티제아가 웃었다.
“불안해서 그러죠. 후작님이 저를 순순히 놔줄 리가 없을 것 같은데. 은퇴하라고 해놓고 고향에 가는 길에 독살당하고 그러는 거 아닙니까?”
“수도에 두 번 다시 오지 않고 몸을 숨기면 될 일이야. 가족과 같이 사는 게 꿈 아니었나?”
“아니, 그, 뭐랄까.”
라이가 머리를 긁적였다.
“벌써 쓸모없는 사람 취급 받는 것도 좀 기분이 그렇습니다. 멋대로 찾아와서 남의 인생을 헤집어 놓으시더니.”
“인생을 헤집다니, 말이 거창하군. 돈 받고 일하는 사람에게 그 일을 맡기러 간 것뿐인데?”
“가족을 인질로 삼으셨잖습니까?”
“그럼 다 죽여서 입 막을까?”
라이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그는 아르티제아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몰랐다.
처음에는 밀라이라에 대한 복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은 이제 라이도 알고 있었다. 복수라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 톱니처럼 맞물려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라이는 늘 아르티제아에게 밀라이라에게 느꼈던 연민보다도 더 강하고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그것이 충동인지, 경외인지, 반발인지, 확실하게 정의할 수 없었다.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었다. 서운했다. 대체 무엇이 서운한 것인지 라이 자신에게도 불명확했다. 그럴 자격 같은 게 없다는 것도 알았다.
자신은 이 여자가 하는 위험한 일에 끝까지 도구로 쓰이고 싶었던 건가. 자신은 발을 맞춰 함께 가는 상대가 아니라, 기껏해야 휘두르는 작은 칼 같은 것일 텐데.
이 여자가 충성하는 것은 에브론 대공이다.
그 사실을 떠올리고 라이는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더 벌겠다면 남아도 괜찮아. 은퇴하고 싶다면 그래도 된다는 뜻일세.”
아르티제아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시선을 밑으로 내려 눈빛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굳이 라이를 배제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쓸모 있는 자이다.
배신했던 전적이 있다지만, 그때는 상대가 이미 황제의 관을 쓴 자였다.
지금처럼 가족을 확보하고 있다면 더더욱 걱정할 필요 없었다.
라이를 쓰지 않더라도 결국 그 자리에는 다른 부품을 갈아 넣어야 한다.
대체할 만한 인물이 흔한 것도 아닌데, 왜 은퇴를 종용하는가.
결국은 개인적인 감상 때문이다.
‘한 번쯤은 제대로 살 기회가 있는 것도 좋을 테니까.’
아르티제아는 찻잔 안을 들여다보았다. 우유를 넣은 찻물 같은 것에 추악한 눈동자가 비칠 리도 없는데, 마치 눈싸움을 하는 기분이었다.
“…….”
연금은 원래 주기로 한 보상이 아니냐며 몇 마디 더 빈정거릴 줄 알았는데, 라이는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그러면, 때가 되면 프레일 경을 통해서 지시해 주십시오.”
“그래.”
눈치가 빠른 남자라 곤란하다고 아르티제아는 생각했다.
라이가 꾸벅 절을 하고 물러 나갔다.
가슴 속에 스민 답답한 감정을 눌러 넣는데, 프레일이 그를 뒤따라 나오며 경고했다.
“헛된 생각 마, 라이.”
“안 합니다.”
프레일이 말하는 헛된 생각이 무엇인지 알아채기도 전에 라이는 그렇게 대꾸했다.
아르티제아의 말이 맞다. 그는 실익 없는 일에 관심 없었다. 하물며 불분명한 기분 같은 아무것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