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99
악녀는 두 번 산다 99화
아르티제아가 수도에서 가장 먼저 얼굴을 내민 곳은 황후궁이었다. 황후의 시녀이니 도리상 당연한 일이었다.
황후궁은 전과 조금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물리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황후가 산 자의 무덤으로 만들었을 때에도 황후궁의 정원은 고왔고, 지금도 그랬다.
하지만 분위기는 상당히 달랐다. 마르타 백작 부인의 살롱이 열렸을 때에 정원도 일부분 살롱 손님들에게 개방했기 때문이다.
겨우내 앙상했던 가지에 새순이 피어 정원은 연둣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른 시기에 맺힌 목련 꽃망울이 바깥공기를 마셔 작년보다 더 화사해진 듯했다.
황후는 아르티제아를 데리고 정원으로 나섰다. 볕을 찔 겸, 에브론 대공비가 수도에서 가장 먼저 찾아 온 것이 누구인지 보여줄 겸, 두 가지 목적을 다 가진 것이었다.
물론 실제로 이루어지는 대화는 그다지 애정 가득한 따사로운 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에브론 대공령에서 전쟁이 있다고 꽤나 소란하던데, 이렇게 혼자 돌아와도 괜찮은 게냐?”
황후의 목소리는 딱딱하고 차가웠다. 에브론 대공령을 걱정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수도의 황궁에 있는 황후에게 에브론 대공령의 전쟁은 멀리 있는 일에 불과하다. 설령 패전한다 하더라도 에브론 대공령 전체가 뚫릴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뚫리더라도 그다음에는 앨리아 장성이 있다. 수도가 위험해질 가능성은 희박했다.
전쟁은 정부와 군부 인사들에게는 몹시도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황후에게는 관계없었다.
사실 그녀는 앨리아 장성까지 뚫려 제국이 위기에 처한다 해도 그다지 상관없었다.
그러니 질문한 것은 투자자로서 물은 것이다. 황후로서가 아니라.
아르티제아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전 군사 문제에는 별달리 쓸모가 없으니까요. 본성에 앉아 에브론 대공령의 영민들과 목숨을 함께한다 해도, 결국 그들이 지켜야 할 사람이 하나 생겨서 자원이 낭비된다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하긴, 네 목적은 훌륭한 대공비가 되는 것이 아닐 테니.”
황후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어깨에 걸친 여우 털 인형을 만지작거렸다.
실감나게 생긴 인형처럼 여우의 얼굴을 거의 그대로 재현한 이 목도리는 길이가 아주 길었다. 황후의 목덜미에 머리를 얹고도 아주 길어서 등을 타고 엉덩이까지 늘어졌다.
추울 때에는 목도리로도 쓸 수 있을 테지만, 오늘 날씨는 모피 목도리를 두를 만큼 춥지 않았다.
황후는 여우 털을 만지작거렸다. 손에 닿는 감촉이 훌륭했다. 귀 언저리를 만지면 마치 진짜 여우나 강아지를 만지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물론 아르티제아가 에브론 대공령에서부터 가져온 진상품이었다.
아르티제아가 산책을 청한 것에는 그것을 남의 눈에 띄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사실이긴 하고?”
“카람이 톨드 산맥을 넘은 것도, 공성 병기가 나왔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마 황제 폐하의 첩자도 보고했을 겁니다. 다른 자들은 진위를 확인하느라 바쁘겠지요.”
아르티제아는 여유롭게 대답했다. 거짓은 하나도 없으니 꿀릴 것도, 따로 공작할 것도 없었다.
에브론 대공저는 언뜻 조용해보였지만, 물밑으로는 지금 아주 바빴다. 고용인들의 편지를 가로채거나 훔쳐 보려는 자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아르티제아는 올 때에 에브론 대공령에 있는 이들이 수도에 있는 고용인이나 기사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적지 않게 맡아가지고 왔다.
물품 같은 것은 서두르는 일정에 무게가 부담되어 가져오지 못했지만, 편지 정도는 맡아줄 수 있었다.
아르티제아는 그것을 전부 흔적 없이 뜯어서 확인했다. 행여 기밀이 새어나갈까 우려한 탓이다.
카람 작물 문제나 카드리올이 벌였던 일은 아예 소문 자체가 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나 카람이 톨드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 산맥을 넘어와 습격 사건을 벌였던 일이나 공성 병기에 대해서는 손대지 않았다. 대공저의 고용인들이 걱정하며 소곤대는 것도 막지 않았다.
“그렇구나.”
황후가 대답하고는, 만지작거리고 있던 손을 도로 내려놓았다.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정원 너머로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이쪽에서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지 궁금할 터이다. 그러나 아무도 다가오지는 못했다.
“불안하진 않더냐?”
“세드릭 님이 패전할까 봐요?”
“그래.”
황후가 흘끗 아르티제아를 바라보았다.
“제국의 방패이니, 불패의 장군이니 해봤자 결국은 사람의 몸이다. 세드릭은 앞에 나서는 편이니, 선봉에 나섰다가 불의의 사태가 생길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렇지요.”
아르티제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황후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아르티제아는 이상하게 걱정이 되지 않았다.
지금 전황이 실제로 전면전이 아니라서일까? 아니면 그가 더 어려운 상황에서 적과 맞서면서도 지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까?
아르티제아는 말했다.
“하지만 그러지 말고 후방에 남으라고 하셔도 들을 이가 아니니까요. 그것이 단순히 젊은 혈기나 충동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책무라고 세드릭 님은 생각하고 있고요.”
“음…….”
“선봉에 나선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자신의 백성과 신하를 지킨다, 전투에 임하여 물러나지 않고 책임을 다한다, 그것이 세드릭 님이 충성을 받고 인망을 모은 이유이며, 또 아랫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모습이니, 감히 방해할 마음이 없습니다.”
아르티제아의 대답에 황후는 아무 대답 없이 걸음만 옮겼다.
잠시 동안 두 사람은 볕을 받으며 걷기만 했다. 깨끗하게 치워진 오솔길은 포근한 흙으로 덮여 있었다.
아르티제아는 반걸음 뒤에서 황후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황후는 고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색도 곧 사라졌다.
“에브론 대공령에서부터 시녀를 몇 데려왔다면서?”
“네. 제겐 달리 친정에 믿을 만한 사람이 없으니까요. 친구도 없고.”
“…….”
황후가 잠시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았다.
“내 딸이 살아 있었다면, 너를 친구로 붙여주었을 것이다.”
“장황녀 전하께서 살아 계셨다면, 황후 폐하는 저 따위가 감히 황궁의 땅을 밟지 못하게 하셨을 겁니다.”
“그 말도 옳지.”
황후가 헛웃음을 머금었다.
장황녀가 살아 있었다면 아르티제아와는 나이 차이가 제법 났을 것이다.
그리고 설령 아르티제아가 밀라이라의 딸로 태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죽은 황녀에게 충성하기로 마음 먹었을지 어땠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조만간에 시녀를 데리고 찾아뵙겠습니다. 높은 신분도 아니고, 각별히 재치가 넘치거나 하지도 않지만, 행실이 바르고 마음이 고운 훌륭한 숙녀들이니 황후 폐하께서도 귀엽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아르티제아는 공손히 그렇게 말했다.
리시아라면 황후의 마음도 충분히 위로해줄 수 있을 게 틀림없었다. 이득이라거나 그런 것을 떠나서 순수한 마음으로 다정하게 대해 줄 것이다.
“에브론 대공가의 가신이라면 믿을 만하겠지. 너와 달리 말이다.”
아르티제아는 미소 지었다.
황후가 물었다.
“이제 신혼여행도 다녀왔으니 너도 에브론 대공비로서 사교계에 정식으로 활동할 수 있겠구나. 제일 먼저 무얼 할 생각이냐?”
그 질문은 서로가 이미 알고 있는 문제, 예컨대 보급품을 뜯어낸다거나 하는 문제에 대한 것이 아니다.
아르티제아가 개인적으로 처리할 일이나 곡물상 연합 문제 같은 대공령의 일에 관한 문제도 아니다.
황후는 겨우내 마르타 백작 부인의 살롱을 통해 자신이 깔아놓은 세력 구도를 어떻게 이용할 것이냐고 물은 것이다.
자신이 아르티제아의 생각대로 움직여준 대가를 치르라고 요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아르티제아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황후 폐하의 탄신연이라도 준비할까 합니다.”
황후는 놀라지 않았다. 3월이 되기 전에 돌아온 것이 그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생일은 3월 말경이었다. 지금부터 준비하면 빠듯하기는 해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18년 만의 생일 파티가 되겠구나.”
황후가 그렇게 대답했다.
그때 리시아는 마르타 백작 부인의 살롱에 있었다.
아르티제아는 그녀를 떼어놓고 황후궁에 오려 했다. 리시아는 그럴 수 없었다.
헤일리는 심부름으로 다른 곳에 갔지만, 그녀는 달리 맡은 일이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아르티제아의 시녀로서 기본적인 수행을 해야 했다.
세드릭이 곁에서 떠나지 말라고 했던 것도 있다.
어쩌면 반쯤은 형식적인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시아는 어쩐지 그 말이 몹시 신경 쓰였다.
그래서 따라왔다. 하지만 함께 황후를 알현하도록 허락받지는 못했다.
주인이 황후를 독대하는 것이다. 자신을 데려가지 않았다고 서운해할 것은 없었다.
사실 리시아는 조금 안심하기도 했다. 궁정 예법에 그다지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황후의 시녀 마르타 백작 부인은 리시아를 살롱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자신은 곧바로 황후의 시중을 들기 위해 돌아가 버렸다.
리시아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살롱에 덩그러니 남았다.
‘으……. 어려워…….’
에브론 대공령의 사교계라는 것은 가신들이 모여 비슷한 또래들끼리 인사를 나누게 하고 친분을 다지는 것이었다.
춤도 추고, 새로 기사로 서임되거나 관리가 된 사람을 소개받기도 하지만, 사교계라기보다는 오히려 친족 모임이나 동향인 모임 같은 느낌이 없지 않았다.
이렇게 낯선 사람들만 있는 곳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어찌나 다 예쁘고 우아한 사람들만 있는지 눈이 부셨다. 설레기는 했지만, 어려웠다.
리시아 또래의 여자 하나가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그 곁에서 몇몇 사람이 서서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한쪽에서는 시론을 열성적으로 토론했다. 또 한쪽에서는 커다란 책을 펼치고 감상을 나누고 있었다.
모두 문인이나 관리가 아니라 귀족이 상당히 끼어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리시아는 어디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벽에 붙어 선 채 괜스레 자기 차림새를 살펴보았다.
처음 외출 준비를 할 때에는 데이 드레스로 입기에는 너무 화려한 게 아닐까 싶었다. 소피에게 괜찮으냐고 네 번이나 확인했었다.
하지만 여기에 오니 너무 화려하지도, 소박하지도 않고 딱 중간 정도였다.
‘소피에게 고맙다고 해야지.’
그녀는 마음속으로 결심하면서 다과가 준비된 테이블 쪽으로 옮겨갔다.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 뭐라도 먹는 게 나아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 이거 맛있어!’
쿠키를 씹자 평생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향기로운 과일 맛이 났다.
이걸 한두 개 챙겨 가는 건 창피한 일일까? 하지만 아르티제아에게도 맛보여주고 싶었다.
두 개만 가져가서 하나를 아르티제아에게 주고, 그녀가 맛있다고 하면 나머지 하나를 주방에 맡겨서 만들어달라고 하면 좋지 않을까?
아니, 세 개 챙겨야겠다. 소피에게도 하나 줘야지.
그녀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슬쩍 손수건을 꺼냈다.
“실례.”
테이블 옆으로 다가온 젊은 남자가 물병을 집으려다가 리시아를 쳐다보았다.
리시아는 쿠키를 손수건에 싸려던 행동을 얼버무리며 무심코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숨 쉬는 것을 잊었다.
남자는 마치 정원에 놓아두는 사랑스러운 소년신의 조각상처럼 선이 고운 미모를 하고 있었다.
로렌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