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Who Accidentally Stole Their Hearts RAW novel - Chapter (102)
악녀인데 하트 받아버렸다 102화(102/177)
나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1황비 전하께서는 저와 저하가 친하게 지내는 걸 싫어하실 텐데요?”
“으음,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확실히 싫어하실 것 같네.”
곤란한 듯 콧잔등을 찡그렸던 루비스탄이 이내 씨익 웃었다.
“하지만 내가 뒤늦게 반항기가 와서.”
“저런.”
“그래서, 안 될까?”
루비스탄이 고개를 기울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흠. 무슨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내게 나쁠 건 없지.’
나는 생긋 웃었다.
“저하께서 저를 친밀히 불러주신다면 더없이 영광이에요.”
“그럼 니케도 나를 루비스탄이라고 불러줘. 황자는 너무 딱딱하잖아.”
“네, 그럴게요. 루비스탄 저하.”
.
.
니케아르샤가 정원을 빠져나간 후.
풀숲 사이에서 루비스탄의 보좌가 나왔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뭐가?”
“황자 저하의 미모 말입니다. 델로시프 공녀는 꽤 정략적인 인물로 보였는데, 곧바로 경계를 푸네요.”
“…….”
“하긴, 무려 황자님이 어렸을 적의 추억을 꺼내는데 설레지 않을 영애가 어디 있겠습니까.”
루비스탄이 입매를 길게 늘였다.
“그렇게 보였어?”
“네?”
“내 눈엔 전혀 아니던데.”
니케아르샤는 속으로 끊임없이 계산기를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꽤 루비스탄의 마음에 들었다.
“내가 탐낼 정도의 인재라면 당연히 겉모습 따위에 현혹되지 않아야지. 하지만.”
“…….”
“갑자기 궁금해지네.”
루비스탄의 시선이 먼 곳을 향했다.
“니케가 홀린 듯 누군가를 쳐다보는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아서.”
그의 시선 끝이 니케아르샤의 뒷모습에 머물렀다.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 * *
한낮임에도 어둑한 방 안.
라파엘은 상의를 다 벗은 채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좀 실망했어. 니케한테 그렇게 쉽게 질 줄이야.”
그 말에 이불에 감싸여 있던 인영이 꿈틀꿈틀 자세를 바꿨다.
새하얀 이불 사이로 남보랏빛 머리카락이 흘러나왔다.
“나도 의외이긴 했어. 분명 막시민 왕세자는……. 뭐, 이미 지난 일이잖아.”
“지난 일? 신문 기사를 봐.”
라파엘이 침대 주변에 여기저기 널린 신문을 턱짓했다.
전부 니케아르샤에게 찬사를 보내는 기사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어제는 2, 3황비가 황궁에 니케를 초대했대.”
“델로시프 공녀가 경합에서 이긴 순간 다 예상했던 일이잖아?”
“협정까지 이렇게 깔끔히 마무리할 줄은 몰랐지. 막시민 왕세자가 칼을 갈고 제국에 온 줄 알았는데 이렇게 쉽게 물러날 줄이야.”
“어떻게 왕세자를 구워삶은 걸까 궁금하긴 해.”
이불 사이에서 빠져나온 새하얀 손가락이 신문에 난 니케아르샤의 사진을 훑었다.
“일이 이렇게 됐는데도 참 한가하게 말하는군.”
“그러는 자기는 너무 초조한데.”
“……니케가 역대급 각성자가 아니냐는 말이 힘을 더 얻고 있어.”
상급 각성자인 시세리아를 이겼으니 그런 소문이 더 횡행할 법도 했다.
무엇보다 센리안의 후계인 막시민 왕세자가 감탄한 각성자 아닌가.
라파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대로는 곤란해. 확신이 들면 권능자들이 니케한테 벌떼처럼 모일 테니까.”
“흐응, 손을 써두는 게 좋긴 하겠네.”
이불에 파묻혀 있던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라파엘에게 짧게 키스했다.
라파엘이 속삭였다.
“잘 해주리라 믿어, 내 각성자님.”
“흥, 진짜로 내 권능자가 된 후에나 그렇게 부르지?”
“아직 넌 준비되지 않았으니까. 네가 준비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어.”
라파엘이 여자의 턱 끝에 입을 맞췄다.
여자가 킥킥 웃었다.
“어쩔 수 없네. 이번에야말로 델로시프 공녀를 밟아주는 수밖에.”
라파엘이 미소 지었다.
“너무 과격하게 굴지 마. 니케는 내 친구니까. 아주아주 소중한.”
* * *
보름 후.
황궁의 중앙탑 회의장.
“안건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으니 잠시 쉬어가도록 하지요.”
“그럴까요.”
진행자의 말에 경직되었던 분위기가 풀렸다.
귀족 몇이 델로시프 대공에게 헤헤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델로시프 대공께서는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시겠습니다.”
“예, 그토록 훌륭한 따님을 두셨으니 부러울 뿐입니다.”
틈새를 노리듯 쏟아지는 딸의 칭찬에 델로시프 대공의 입꼬리가 움찔 올라갔다.
“델로시프 공녀가 이번에는 고아원을 지원했다지요? 참으로 다정한 영애입니다.”
그 말에 바쇼라 백작(시세리아의 부친)이 헹, 하고 코웃음을 쳤다.
“고아원 지원 같은 거야 여느 귀족가에서도 다 하는 것 아닙니까. 칭찬이라기엔 너무 궁색하군요.”
아부하느라 온갖 걸 다 끌어오냐는 뜻이었다.
귀족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바쇼라 백작이 비죽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고아원에 돈 몇 푼 기부하는 거야 누구나 하는 일이지만, 불이 난 걸 몸소 막은 건 다르죠.”
“아아, 아이라헬 영애가 불이 난 고아원에서 사람을 구했다죠? 정말 대단합니다.”
그 말에 리빌톤 백작(아이라헬의 부친)이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우연히 딸아이가 봉사하던 중에 화재가 발생했을 뿐입니다. 그보다는 델로시프 공녀가 이번에 국경 지역의 안전을 위해 기금을 모집했다죠? 참 기특합니다.”
바쇼라 백작이 낄낄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돈을 모아서 낸 건 기특하죠. 하지만 직접 권능자들을 데리고 몬스터 토벌에 나선 아이라헬 영애만 하겠습니까.”
“딸아이는 그저 각성자로서 역할을 완수했을 뿐입니다.”
리빌톤 백작이 겸손히 답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깜짝 놀라 쳐다봤다.
“그게 정말입니까?”
“아이라헬 영애가 강한 공격계 권능자를 각성시킨 건 알고 있었지만……. 벌써 토벌에 나섰다고요?”
아직 신문에도 나지 않은 일이었다.
바쇼라 백작이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몬스터를 토벌하며 이민족과 이야기도 잘 되었다더군요.”
“이민족과 이야기요?”
“이민족이 가지고 있는 프레안 말입니다!”
“……!”
그 말에 귀족들이 깜짝 놀라 리빌톤 백작을 바라보았다.
프레안.
마도장치의 회로를 구성하는 물질로, 현대 기술에서 없어서는 안 될 자원이었다.
다만 제국에는 프레안 광산이 없어서 항상 물량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이라헬 영애가 프레안을 들여오는 겁니까?”
“혹시 물량이 어느 정도 될지…….”
“저희 상단에 유통을 맡겨주시죠!”
귀족들이 우르르 리빌톤 백작에게 몰려갔다.
델로시프 대공에게 손바닥을 비비던 자들까지 전부.
바쇼라 백작이 힐끗 대공 쪽을 보며 이죽거렸다.
“기껏 델로시프 공녀가 애를 썼는데. 이거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델로시프 공녀보다 아이라헬 영애가 다방면에서 뛰어난 것을.”
말을 마친 바쇼라 백작 역시 리빌톤 백작에게로 떠났다.
로르아 공작이 황당하다는 듯 숨을 토해냈다.
“허, 정작 리빌톤 백작은 점잖게 가만히 있는데 바쇼라 백작이 더 난리라니.”
“…….”
“바쇼라 백작이 독이 바짝 오른 모양이오. 경합에서 딸이 니케에게 졌으니.”
“…….”
델로시프 대공은 말이 없었다.
로르아 공작은 그 모습을 보다 위로의 말을 건넸다.
“너무 상심하진 마시오. 귀족들이 이권에 따라 박쥐처럼 왔다갔다 거리는 게 하루 이틀이오? 좀 지나면 대공가의 저력에—”
“내 딸이.”
“……?”
델로시프 대공이 낮게 읊조렸다.
“내 딸이 제일 사랑스러워.”
“…….”
아, 예.
로르아 공작도 부인에 대한 팔불출로 유명했다.
‘하지만 델로시프 대공은 정말…….’
로르아 공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대체 뭘까.’
나는 고민에 잠겼다.
어제 황궁에서 돌아오신 아버지께서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역시.”
—라고 하시며.
‘무슨 의미였을까?’
고민해 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한참 끙끙거리는데 셀레나가 내 등을 쳤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별거 아냐.”
“그래?”
고개를 갸웃하던 셀레나가 “어!” 하고 외쳤다.
“아이라헬 영애다. 기도회에 자주 참석한다더니 진짜였네!”
그 말대로 가벼운 차림을 한 아이라헬 영애가 대기도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픽 웃었다.
셀레나가 왜 갑자기 기도회에 가자고 하나 했더니.
“아이라헬 영애 보려고 오자고 했구나?”
“으응, 좀 멋지잖아. 불길 속에서 아이들 구하는 사진 봤어?”
“아하, 그래서 오늘 기도회에 사람들이 많은 거구나?”
고루한 기도회는 인기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대기도실이 가득 찰 정도였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 역시 다 아이라헬에 관한 것뿐이었다.
“이번에 권능자들을 이끌고 몬스터 토벌을 다녀오셨다지?”
“그냥 토벌만 하신 게 아니라 이민족과 프레안 거래를 추진하셨다잖아.”
“기도회 끝나면 말 걸어볼 수 있을까?”
확실히 핫하긴 핫하다.
하긴, 요즘 신문 어디를 펼쳐도 아이라헬의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니…….
“모두 두 손을 모아주십시오.”
이윽고 기도회가 시작되었다.
엄숙한 와중에도 셀레나는 동경이 가득한 눈으로 아이라헬을 힐끔거렸다.
그러다 못 참겠는지 내게 속닥거렸다.
“아이라헬 영애도 얼마 전 황비궁에 초대받았대.”
이건 내가 꽤 관심 있는 주제였다.
“어느 황비?”
“세 황비 전부.”
“전부? 아이라헬 영애는 어느 계파야?”
“아마 중립일걸?”
그럼 1, 2, 3황비 모두 아이라헬을 탐낼 수 있다는 뜻이다.
‘음, 하필 시기가 이래서 곤란하네.’
나는 달콤한 냄새를 폴폴 풍겨서 세 황비들이 빠질 덫을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아이라헬이 나보다 더 달콤한 냄새를 풍기고 있으니…….
그때, 잠자코 있던 에디타가 입을 열었다.
“난 아이라헬 영애 좀 별로야.”
“어?”
“니케가 좋은 일을 하는데 아이라헬 영애 때문에 계속 묻히잖아.”
에디타와 나는 꽤 친해져서 말을 놓게 되었다.
불퉁한 표정으로 말하는 걸 보니 좀 귀엽기도 했다.
셀레나가 황당하다는 듯 에디타를 바라봤다.
“그럼 아이라헬 영애보고 선행도 하지 말라는 거야?”
“자꾸 겹치는 것 같으니까 하는 말이지.”
에디타가 뚱하니 말하자 셀레나도 입을 꾹 다물었다.
둘이 이렇게 싸우는 건 처음 본다.
그러는 사이 기도회가 끝났다.
셀레나가 바로 벌떡 일어났다.
“아이라헬 영애한테 안 가봐도 돼? 말 걸고 싶어 했잖아.”
“됐어.”
셀레나가 고개를 젓는 때였다.
“아무리 주목받는 걸 좋아한다고 해도 좀 너무한 거 아니에요?”
뾰족한 목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시세리아가 서 있었다.
“시세리아 영애.”
“친구가 다른 사람을 더 칭찬하니까 그 꼴을 못 참고 눈치 주는 거, 내가 다 민망할 지경이에요.”
‘얘는 저번 대연회에서도 시비 걸더니, 지금도 이러네.’
경합에서 진 게 정말 자존심 상했나 보다.
하긴, 상위 각성자인 데다가 1황비의 총애도 받고 있었으니 프라이드가 높을 만도 했다.
‘그러고 보니 그 이후로 1황비가 시세리아를 부른 적이 없다고 했나.’
소란에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내 쪽을 쳐다봤다.
시세리아는 더 의기양양해져서 외쳤다.
“아이라헬 영애가 좋은 일을 한 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요? 고작 공녀의 성과가 묻힌다는 이유로?”
그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진짜? 어떻게 고아원 애들을 구한 걸 마음에 안 들어 할 수 있어?”
“고아원 기부가 묻혀서 그런가 봐.”
“델로시프 공녀가 예전과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라헬과 친분을 쌓고 싶어서 온 사람들이 많은 만큼, 분위기가 순식간에 안 좋아졌다.
그때였다.
“그만하세요, 시세리아 영애.”
아이라헬이 앞으로 나섰다.
“제 권능자가 그러더군요. 공녀는 그런 말을 한 적 없다고.”
“……!”
“저번부터 너무 경솔하게 말하네요. 경합에서 져서 화가 난 건 알겠지만, 상위 각성자로서 품위를 지키는 게 어때요?”
“나는 그저—”
“오해할 법한 말을 했을 땐 변명보다 사과가 선행되어야죠.”
그렇게 말한 아이라헬이 내게 살짝 묵례했다.
“괜히 나 때문에 소란에 엮인 것 같아 공녀한테 미안하네요.”
“영애가 사과할 일은 아닌데요.”
그 말에 아이라헬이 씩 웃었다.
“공녀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오늘은 일정이 있어서. 그럼 또 봐요.”
“살펴 가시길.”
아이라헬이 눈인사를 하고 기도실을 빠져나갔다.
사람들도 “뭐야.” 하며 서둘러 그 뒤를 따라갔다.
에디타가 크흠, 헛기침했다.
“뭐,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 거 같네.”
“그치?”
셀레나가 활짝 웃었다.
두 사람과 함께 걸음을 옮기며 나는 아이라헬과 시세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둘 다 똑같은 남보랏빛 머리칼.
“—래서 가지 않을래? 니케?”
툭 건드리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셀레나와 에디타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새로 생긴 커피 하우스. 별 모양 아이스크림을 얹어준다는데 가보자구.”
“아, 난 일이 있어서 다음에.”
“뭐야. 그럼 우리도 안 갈래.”
“오늘은 둘이서 오붓하게 데이트해. 아까 서로 좀 속상했잖아.”
그 말에 에디타와 셀레나가 서로를 힐끔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스크림, 어땠는지 말해줄게.”
“응.”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자니 에이든이 내게 다가왔다.
그는 내 호위로서 신전 밖에서 대기 중이었다.
“주인님.”
“많이 기다렸지?”
“주인님을 기다리는 건 제게 기쁨이에요.”
에이든이 해사한 얼굴로 웃었다.
그러더니 내게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혹시 저 여자 거슬려요?”
에이든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아이라헬과 시세리아가 있었다.
둘 중 누구를 가리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왜?”
“저는 주인님의 호위잖아요.”
“……?”
그게 지금 왜 나오지?
딱히 위험한 상황도 아닌데.
의아하게 에이든을 바라보자 그가 달콤하게 웃었다.
“주인님한테 거슬리는 거, 치우는 게 제 존재 의미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