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Who Accidentally Stole Their Hearts RAW novel - Chapter (111)
악녀인데 하트 받아버렸다 111화(111/177)
* * *
오르센 가.
클레아스는 독한 위스키를 얼음도 없이 들이켜고 있었다.
방 안에 들어선 라파엘은 그 모습을 보고 픽 웃었다.
“니케의 소식을 들었나 보군. 자격 심사를 통과하면 상위 각성자회로 올라갈 거라지?”
“……네가 그렇게 여유 부리고 있을 때는 아닐 텐데, 라파엘.”
클레아스가 술잔을 탁 놓으며 말했다.
“넌 아이라헬 영애를 밀고 있는 거 아니었어? 완전히 물거품이 됐는데.”
“아이라헬은 수많은 방편 중 하나일 뿐이야. 보험은 여러 개 들어놔야지.”
“쓰레기 자식.”
라파엘은 언제나 저런 식이었다.
‘저 능구렁이 같은 놈이 누군가에게 온 마음을 쏟는 건 평생 볼 일 없겠지.’
라파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아쉽긴 해. 아이라헬은 꽤 훌륭한 각성자였거든. 좀 더 분발해 주길 바랐는데.”
“결국 니케한테는 상대가 되지 않았던 거지.”
클레아스의 말에 라파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엄밀히 말해 두 사람의 대치는 각성자로서의 싸움이 아니었다.
‘정치 싸움이었지.’
그래서 더 의외였다.
니케아르샤에게 그런 처세력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내가 어렸을 때부터 미카린을 통해 고립되게 만들었기도 하고.’
라파엘은 어려서부터 야망이 강했다.
역대급 각성자의 자질을 타고났다는 니케아르샤에게 접근했고, 가장 가까운 친구 자리를 꿰찼다.
니케아르샤 곁에는 다른 친구들도 있긴 했다.
하지만 아직 어려서 순진하기 짝이 없는 데다가, 자존심이 태산 같은 아이들을 뒤에서 조종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특히 미카린은 아주 좋은 체스 말이었다.
좀 더 자라 니케아르샤가 그럭저럭 사랑에 눈을 뜰 나이가 되었을 때는 클레아스를 소개해 주었고.
‘꽤 완벽한 새장이라고 생각했는데.’
보이지 않는 새장 속에 스스로 갇혀 있는 역대급 각성자.
그 강력한 힘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니케가 발현식에서 실패하면서 완전히 어그러졌지만.’
어렸을 때부터 심혈을 기울여 만든 새장이 한순간에 무용지물이 되었다.
니케아르샤는 아이라헬같이 쉽게 버릴 수 있는 ‘보험’ 따위와 비교도 안 된다.
라파엘 헤이스는 단언할 수 있었다.
‘내 평생을, 내 온 마음을 전부 네게 바쳤어, 니케.’
그건 쉽게 변질되는 사랑 같은 얄팍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러니—
‘나를 먼저 배신한 건 니케, 너야.’
그때, 클레아스가 입안으로 술을 털어넣으며 자조적으로 말했다.
“만약 니케가 이렇게 각성자가 될 줄 알았다면 나는 절대 니케를 배신하지 않았을 거야.”
“말은 잘하는군. 니케가 발현식에서 실패하기 전부터 미카린과 놀아났으면서.”
“라파엘, 너도 꽤 괜찮은 생각이라고 했잖아.”
그랬었다.
‘……니케를 더 고립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클레아스가 오른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니케는 내가 뭘 하든 내 곁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
그건 라파엘도 마찬가지였다.
굳이 클레아스의 곁에 있을 거라는 게 아니라,
‘새장이 부서져도 새장 밖으로 나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 나가봐야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를 거라고.’
라파엘이 평생을 바쳐 만든 니케아르샤의 세계는 너무 좁아서, 다른 것들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아니었다.
니케아르샤는 새로운 인연들을 만들어 저만치 멀어졌다.
중위 각성자회는 파벌싸움이 심한 편인데도 양쪽 모두와 잘 지내고 있다.
거기다 이젠 정말 특별한 각성자일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듣고 있다.
‘……내가 만들어준 새장이 처음부터 무의미했다는 듯이.’
라파엘의 얼굴에 짙은 음영이 드리웠다.
그가 입을 열었다.
“클레아스, 그거 알아? 니케가 여태까지 각성시켰다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뭐.”
“예비 권능자가 단 한 명도 없어.”
“……!”
클레아스가 우뚝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눈가를 발그스름하게 물들이던 술기운이 완전히 날아갔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전부 다 어렸을 적 ‘감별’ 때 아무 자질도 없다고 결론 난 사람들이라고.”
“…….”
“처음엔 그래서 니케가 특별하다고 불렸지.”
자질이 없는 사람까지 각성시킬 수 있는 존재.
그런 말을 들으며 발현식에서 실패했음에도 각성자회에 초대받았으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예비 권능자를 단 한 명도 각성시키지 않은 건 이상하지 않아?”
“……각성시키지 않은 게 아니라, 각성시키지 못한 거다?”
“니케아르샤는 권능을 각성시킬 수 없다. 그런 결론이 나도 이상하지 않지.”
“…….”
클레아스는 잠시 침묵했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열렸다.
“……니케를 눈엣가시처럼 여길 1황비가 왜 조건부라도 상위 각성자회 진급을 허락했나 했더니. 네 짓이었나.”
“아이라헬은 1황비한테도 심문당했거든. 거기서 이런 의문을 이야기하는 것 정도는 자연스러운 일이지.”
“……보험 취급하면서 버린 주제에 알차게도 이용했군.”
“서로 윈윈이었지. 니케 때문에 망한 아이라헬이 니케의 앞길에 재를 뿌릴 수 있게 되었으니.”
“무엇으로 입막음했나 궁금했는데 그 정보였나.”
“딱히 입막음 같은 건 하지 않았어. 처음부터 아이라헬이 감수했던 일이야.”
라파엘이 산뜻하게 웃었다.
클레아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사람을 믿지 않는 녀석이니 분명 아이라헬에게 안전핀을 여러 개 꽂아두었을 것이다.
‘저 뱀 같은 자식.’
“이번 대결을 보면 진실을 알 수 있을 거야. 1황비가 알아서 판을 짜줄 테니까.”
“우린 구경이나 하고 있으면 된다?”
“그래.”
클레아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이라헬을 끝까지 이용해 1황비를 움직여서 손도 대지 않고 의혹을 확인하는 것.
분명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실력이다.
솔직히 감탄이 나올 정도.
‘하지만 이 녀석이 그걸로 끝낼 리가 없지.’
의혹이 확인되면 그 이후가 있는 법이다.
거기에 대한 대책 없이 구경만 하고 있을 놈이 아니다.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거야.”
그 말에 라파엘이 픽 웃었다.
“클레아스, 네 연인을 기억해?”
“왜 또 니케를 걸고넘어져.”
라파엘이 재밌다는 듯 “허!” 실소를 흘렸다.
“연인이라는 말에 니케를 떠올리는구나. 미카린이 알면 꽤 섭섭해하겠어.”
클레아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글쎄, 미카린은 네가 ‘내 연인’이 아니라 ‘네 연인’이라고 말하는 걸 더 섭섭해할 텐데?”
“뭐, 그럼 내 연인이라고 해둘까. 어쨌든 기억해?”
라파엘이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미카린이 어렸을 때부터 니케의 마력을 먹어 치우면서 살았던 거.”
“그야 당연하지. 그 이유 때문에 미카린을 계속 니케 곁에 두었다는 걸 알고 얼마나 놀랐는데.”
“모르겠어?”
“……?”
라파엘이 씨익 웃었다.
“니케가 각성자이든 아니든, 선대 대신관이 ‘역대급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공언한 사실은 달라지지 않아.”
“……!”
클레아스의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돌아갔다.
니케아르샤와 같은 피를 잇고, 마나의 질까지도 동일한 미카린.
심지어 ‘역대급 각성자의 자질’이 담긴 마력을 고스란히 흡수하며 자랐다.
그리고 라파엘과 클레아스가 해왔던 연구.
“너 설마……!”
“뭐, 일단은 두고 보자고.”
라파엘이 클레아스의 잔에 자신의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 * *
델로시프 대공저.
레널드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게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응?”
“상위 각성자회에 들어가는 것 말입니다. 상위 각성자들은 그 이하의 각성자들과 수준이 다르지 않습니까.”
상위, 중위, 하위.
이렇게 세 가지로 계위를 나누고 있지만, 실상 상위와 중위 사이에는 넘기 힘든 커다란 벽이 있다.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
상위 각성자들은 그 위에서 군림하는 자들이다.
‘모략은 하나도 짤 줄 모르는 시세리아도 엄청난 불의 권능자를 데리고 있었어.’
센리안 사절단이 감탄할 정도인 불의 제의.
고아원에 방화한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컨트롤.
‘솔직히 권능 싸움이었다면 백퍼 내가 졌지.’
아이라헬이 각성시킨 ‘의태’도 마찬가지다.
정말 무궁무진한 활용법이 있는 권능이니까.
“상위 각성자들의 경쟁은 주로 전투로 이뤄지지요. 오러 사용자나 마법사로 이기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왜 권능을 사용 안 하냐는 말이 나올 테니까.”
“예.”
각성자 행세를 하기 시작한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다.
이에 대한 준비는 하고 있었다.
“……‘그 일’은.”
“죄송합니다. 각성석은 꽤 확보했습니다만, 더 시일이 걸릴 것 같습니다.”
“레널드 잘못이 아니야. 너무 이르게 상위 각성자로 올라갈 기회가 온 탓이 커.”
아무리 짧게 잡아도 반년은 더 걸릴 줄 알았다.
미카린이 역대급 각성자가 되는 것도 그 이후의 일이니까.
시간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거절할 순 없어.”
싸우기도 전에 꼬리를 말고 도망가는 꼴이 될 테니까.
그리고 그건 1황비가 날 공격할 빌미가 될 것이다.
“……물러날 수 없으니 답은 하나야.”
내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자격 심사를 통과해서 상위 각성자회로 들어간다.”
“……아가씨께선 그리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위험하다고 해서 후퇴하실 리 없지요.”
레널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다행히 조건 자체는 어렵지 않아.”
각성자관리국에서 전달해 온 조건은 아주 간단했다.
1. 상위 각성자와 나의 1대1 친선 경기.
2. 간단한 자격 심사이므로 각각 한 명의 권능자만 대동한다.
3. 상위 각성자가 나의 자격을 인정하면 끝.
가짜 각성자인 걸 숨겨야 하는 내 입장에선 꽤 괜찮은 조건이었다.
한 명만 데려가면 되니까.
“상대가 누구일까요? 1황비 쪽 사람이라면 절대 인정 안 할 텐데.”
“누구든 인정하게 만들어줘야지. 그건 걱정 없어. 왜냐하면—”
나는 고개를 돌려 에이든을 바라보았다.
“내겐 에이든이 있으니까.”
레널드도, 나도 자격 심사 자체를 걱정한 적은 없다.
역대급 각성자인 미카린이 탐냈던 예비 권능자이면서, 스스로 재능을 개화시킨 에이든이 내 사람인걸.
“저는 주인님의 가장 충실한 검이자 방패예요.”
에이든이 꽃처럼 미소 지으며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감히 주인님의 앞을 막는 자는 도륙하고 찢어발겨 몬스터들에게 먹이로 던져주겠습니다.”
“……그럴 필요까진 없어.”
진짜로.
* * *
자격 심사 당일.
나는 각성자 관리국 직원의 안내를 받아 이동했다.
“상대 각성자는요?”
“따로 이동 중입니다. 혹시 모르니 자격 심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대면은 불가합니다.”
“매수할 생각은 없는데요.”
“하하, 그저 절차일 뿐입니다.”
아쉽게 됐다.
‘상대의 권능이 뭔지 미리 봐둘 생각이었는데.’
“걱정 마세요, 주인님.”
에이든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그를 향해 “응.” 하고 미소 지어주었다.
워프 게이트 앞에 도착한 직원이 말했다.
“한 분씩 안으로 입장해 주시면 됩니다. 시합 장소로 이동할 거예요.”
안내에 따라 워프 안으로 들어갔다.
마나가 내 몸을 감싸는 느낌과 함께 이윽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다시 시야가 밝아졌을 땐…….
‘시합 장소를 꽤 특이한 곳으로 선정했네. 당연히 포석이 깔린 경기장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없는 광활한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사람의 흔적이라곤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
그때, 뒤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왔어, 에이든?”
나는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당신은…….”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은 에이든이 아니었다.
제국인에게서는 보기 힘들 정도로 큰 키와 압도적인 체격.
살짝 보랏빛이 감도는 머리카락.
사막의 민족 특유의 그을린 피부.
맹수와도 같은 황금안.
‘아이라헬의 프레안 거래를 단칼에 거절했던…….’
이민족이었다.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죠?”
그 말에 사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할 소리군.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 * *
자격 심사 중계장.
크리스탈 전광판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뭐야? 델로시프 공녀가 왜 저런 곳에 있어?”
“워프가 잘못된 거 아니야?”
사람들은 그저 의아해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초조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스칼리온이었다.
“니케가 데리고 간 권능자는 그 기분 나쁜 여우놈 아니었어?”
“예, 에이든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레널드가 사색이 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런데 왜 그 녀석은 없고 다른 놈이…….”
“뭔가 착오가 생긴 게 분명합니다. 시합 상대와 이동 장소도 다르잖아요.”
그랬다.
전광판에 비친 시합 상대자는 포석이 곱게 깔린 경기장에 서 있었다.
“저긴 인적도 없는 오지 같은데, 만약 아가씨께서 몬스터의 습격이라도 받는다면…….”
이스칼리온의 얼굴이 굳었다.
이 자격 심사에는 1황비의 입김이 들어갔다.
만약 더러운 수를 쓴 거라면…….
“어서 시합을 중지시켜야 해.”
이스칼리온은 지체 없이 걸음을 옮겼다.
벌컥, 방문을 열자 안의 사람들이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대, 대공 전하?”
시합을 주관하고 있는 각성자관리국 직원들 사이로 국장이 보였다.
이스칼리온이 분노한 얼굴로 국장에게 다가갔다.
“당장 시합을 중지시켜.”
“하, 하지만 전하…….”
“델로시프 대공녀를 오지로 보내는 실수를 저지르고 무사할 줄 알았나?”
푸른 눈동자에 살기가 넘실거렸다.
그 기세에 국장은 숨조차 내쉬지 못했다.
“만약 니케의 털끝 하나라도 다친다면.”
슈우우우우욱—
이스칼리온에게서 엄청난 마력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국장은 기함했다.
‘미, 미친! 아직 각성하기도 전인데 이 정도라고?!’
정말 괴물 같은 남자였다.
“나는 그 핏값을 받아낼 것이다.”
그 기세에 밀려 방 안의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때였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대공.”
“1황비……!”
안으로 들어온 1황비가 싱긋 웃었다.
“시합은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