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Who Accidentally Stole Their Hearts RAW novel - Chapter (128)
악녀인데 하트 받아버렸다 128화(128/177)
“……전하?”
이스칼리온은 말이 없었다.
대신 낮은 숨소리가 간헐적으로 떨렸다.
어쩐지 고통스러운 것 같아서 공간을 마련해 주려는데—
“움직이지 마.”
“괴로워하시는 것 같아서…….”
“됐으니까, 움직이지 마.”
말 끝에 진득한 숨결이 하아—, 하고 내 귓가에 녹아내렸다.
나는 빳빳하게 굳었다.
‘무, 무슨 사람 숨소리가…….’
그가 숨을 내쉬고 들이마실 때마다 탄탄한 대흉근이 내 가슴을 부드럽게 압박했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온몸으로 그가 느껴졌다.
‘아, 진짜 위험한데.’
그의 숨결과 반대편으로 돌렸던 고개가 천천히, 움직였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 시작한 걸까?
어렴풋이 그의 윤곽이 비쳤다.
생각보다도 훨씬 더 가까운 거리에 그의 얼굴이 있었다.
‘아…….’
반듯한 이마와 우뚝한 콧날.
조금 서늘한 인상의 얇고 긴 입술.
이 입술이 비뚜름히 올라갈 때 얼마나 얄미워 보이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입술이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뜨겁다는 건—
‘—지금 처음 알았어.’
나는 몽롱하게 이스칼리온의 입술을 바라보다가 흠칫했다.
‘잠깐, 잠깐.’
내가 이스칼리온의 입술이 뜨겁다는 걸 왜 알아?
어떻게 아는 건데?!
‘내 손이 왜 이스칼리온의 입술에 가 있냐고!’
그것도 손끝으로 아주 은근하게 문지르고 있다.
새파란 청안이 어둡게 일렁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입안이 바짝 말랐다.
왠지 눈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저절로 눈꺼풀이 스르륵, 감기려는 순간.
‘……이렇게까지 잘 보이는 건 이상하지 않나?’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암순응했다고 해도 토사에 깔려 있는데 이렇게까지 다 보인다고?
그걸 깨닫자마자 번쩍 눈이 뜨였다.
“전하, 지금 우리—”
내가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주변이 확 밝아졌다.
이스칼리온의 얼굴이 한층 더 선명해졌다.
그 외에 다른 것까지도.
이스칼리온의 몸이 나를 뒤덮듯 내리누른 채, 그와 내 다리가 얽혀 있었다.
아주 깊게.
“저, 전하?”
코앞으로 다가와 있던 이스칼리온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그가 빠르게 내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사해서 다행이군.”
이스칼리온은 날 쳐다보지 않은 채 말했다.
우리 주변의 환경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나는 불안해져서 그의 팔을 붙잡았다.
“괜찮으세요?”
“……무엇이.”
“아까 좀 괴로워 보였는데.”
이스칼리온의 몸이 딱딱해졌다.
그 반응에 나는 더 심각해졌다.
“역시 문제가 생겼던 거죠?”
“……아니, 아무 문제도 없다.”
“거짓말.”
“정말이야.”
“정말이면 왜 자꾸 내 손을 피하는데요?”
“큿, 니케.”
“봐봐요. 어디예요?”
나는 이스칼리온의 몸을 샅샅이 조사했다.
피가 난 곳은 없지만, 애초에 토사에 묻힌 거니 찰과상보다는 타박상을 입었을 확률이 높다.
타박상은 옷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
가슴팍과 명치, 옆구리까지 제대로 진단하고 더 아래로 내려가는데,
“이제 그만—”
커다란 손이 내 손을 꾹 움켜쥐었다.
고개를 드니 이스칼리온의 얼굴이 새빨갰다.
항상 냉막했던 눈가가 붉게 물든 채 날 바라보았다.
꼭 원망하듯이, 새초롬하게.
‘어…….’
내 안에서 뭔가 툭 끊기는 느낌이 났다.
‘나, 진짜 위험한데?’
나도 모르게 이스칼리온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갔다.
손에 닿는 그의 몸은 무척 뜨거웠다.
굴곡진 탄탄한 근육.
눈이 마주치자 탄력 있는 복사근이 딱딱해졌다.
“전하…….”
그를 부르는 순간.
품 안에서 통신석이 진동했다.
“……?!”
마치 주술에서 풀린 것처럼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내, 내가 무슨 짓을!’
무려 대공을 추행할 뻔했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서둘러 통신석을 꺼냈다.
바로 연결하자 아카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니케! 괜…아?!]통신 상태가 안 좋은지 목소리가 끊겨서 들렸다.
영상은 아예 떠오르지 않았고.
“괜찮아. 아무래도 그냥 흙더미가 아니라—”
[젠…. 안 들…… 걱, 아버… 형님…….]그 말을 끝으로 통신이 끊겼다.
이쪽에서 아카인에게로 다시 연결을 시도해 봤지만.
‘완전 먹통이네.’
나는 한숨과 함께 통신석을 다시 품에 넣었다.
고개를 드니 이스칼리온은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토사에 휩쓸렸는데 우리가 있는 곳은 꼭 던전 같은 장소였다.
흙벽을 따라 설치된 횃불이 어둑한 실내를 밝히고 있었다.
“……권능인가.”
이스칼리온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덮친 건 단순한 토사가 아니었다.
우리 위를 덮었던 흙더미에 점점 공간이 생겨서 이렇게 변했다.
“미카린의 권능자가 만든 ‘미로’예요.”
“토사인 척 눈속임해서 미로에 가둔 거군.”
“그렇겠죠. 밖에서는 그냥 토사에 휩쓸린 걸로 보였을 거예요.”
이스칼리온이 벽을 두들기며 말했다.
“그냥 부수면 천장이 내려앉겠지?”
“무너질 확률이 높죠.”
그럼 진짜로 깔려 죽을 수 있다.
“흠, ‘밀실’이 아닌 ‘미로’라…….”
이스칼리온이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입구와 출구가 반드시 존재하겠군.”
역시 이스칼리온이다.
‘미로’라는 것을 듣자마자, 권능의 본질을 바로 파악했다.
“맞아요. 즉, 탈출구가 최소 둘은 된다는 뜻이죠.”
“그렇다면 걱정할 것 없어.”
이스칼리온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상해.’
갑자기 거대한 흙더미에 휩쓸려서 묻히고.
알고 보니 그게 미로 안이었고.
이 미로 속에는 어떤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하나도 불안하지 않아.’
내 앞으로 펼쳐진 커다란 손.
나를 향해 미소 짓는 얼굴.
단순히 이 상황에서 함께 있는 사람이 이스칼리온이라는 것만으로…….
“전하께서는 왜 여기 계세요?”
이스칼리온은 당연히 제도에 있을 줄 알았다.
내가 수해를 막아낼 때까지만 해도 그의 흔적조차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내가 위험에 빠지자마자 나타났다.
‘항상 그랬어.’
이스칼리온은 내 곁에 있었다.
내가 돋보이는 순간이 아니라,
위험하고 힘든 순간에는 언제나—
“걱정돼서.”
그 말이 쿵, 가슴에 떨어져 내렸다.
내가 묻기 위해 입을 연 순간.
쿠르르릉—
땅이 진동하는 것과 동시에 미로의 벽이 움직였다.
그와 나 사이를 가로막듯이.
“니케—!”
이스칼리온이 내게 손을 뻗었지만, 벽이 움직이는 게 더 빨랐다.
미로는 살아 있는 생물처럼 그와 나 사이의 공간을 집어삼켰다.
쿵!
굉음과 함께 이스칼리온 대신 차디찬 벽이 나를 반겨주었다.
‘맞다, 이건 권능이었지.’
그렇다면 얼마든지 안에서 미로가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오른손으로 벽을 짚었다.
웬만한 미로는 이렇게 한쪽 벽을 짚고 가는 것으로 탈출할 수 있다.
‘하지만 중간에 길이 바뀌는 미로에선 소용없어.’
이대로 미로 안을 빙글빙글 헤매다가 절망 속에서 죽는 것.
그게 미카린이 바라는 것일까?
‘미카린의 뜻은 몰라도 다른 한 명의 뜻은 알겠어.’
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자 내가 짚고 있던 벽이 스르륵, 움직였다.
꼭 이쪽으로 들어오라는 것처럼.
나는 잠시 그 빈 공간을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그래, 만날 줄 알았어.’
널찍한 공간 안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나는 입을 열었다.
“안녕.”
그가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남자의 얼굴 위로 빙글거리는 웃음이 떠올랐다.
“안 놀라네요. 예상한 건가?”
“응. 널 뭐라고 부르면 돼?”
“이상하네. 내 이름 알고 있지 않아요?”
“그건 가명이잖아.”
남자의 미소가 일순 굳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뭐, 그 이름으로 불러주길 원한다면.”
“…….”
“에반스.”
그렇다.
내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미카린의 권능자.
이 미로의 주인, 에반스였다.
* * *
이스칼리온은 닫힌 벽을 내려쳤다.
눈앞에서 니케아르샤를 놓쳤다.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방심했군.’
아직도 니케아르샤의 잔상이 몸에 남아 있다.
아찔할 정도로 부드럽고 따뜻하던…….
‘젠장.’
이스칼리온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그런 걸 곱씹을 때가 아니다.
‘일부러 니케와 나를 떼어놓았어.’
그놈의 목적이 뭘까.
자신의 각성자에게 위협이 되는 니케아르샤를 없애는 것?
그렇다면 확실히 이스칼리온은 큰 방해다.
‘아니, 상황상 니케를 해칠 리는 없다.’
하지만 이스칼리온은 전혀 안심하지 않았다.
다른 위험이 있으니까.
그것도 엄청나게 커다란.
‘이런 어둑하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단둘이 만나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
그건 이스칼리온이 직접 겪었던 일이다.
아까 자신은 정말 위험했다.
‘만약 그런 일이 또 일어난다면…….’
그것도 자신이 아니라,
‘다른 놈과…….’
콱!
벽 안으로 이스칼리온의 주먹이 그대로 들어갔다.
그의 눈동자가 사납게 일렁거렸다.
‘절대 그 꼴은 못 보지.’
* * *
에반스는 빙그레 웃으며 니케아르샤를 바라보았다.
‘재밌네. 이런 상황에서도 주도권을 뺏기지 않는다라.’
니케아르샤는 완벽하게 에반스의 영역 안에 발을 들였다.
그런데도 주눅 들긴커녕, 가명 운운하며 에반스를 흔들어 놓으려고 한다.
‘확실히 그분께서 경계할 만해.’
그래서 흥미로웠다.
눈앞의 여자가 궁금하다.
“내가 기다리고 있을 줄은 어떻게 알았어요?”
“나는 미카린을 잘 아니까.”
니케아르샤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걘 내가 토사에 휩쓸려서 죽길 바라지 않을 거거든.”
수해를 막고 비운의 영웅으로 죽는 거다.
그것도 경솔했던 미카린의 행동을 수습한 다음에.
“내가 죽으면 미카린에게 평생토록 지워지지 않는 꼬리표가 남게 되는 거야.”
“흐음.”
“미카린이라면 날 구해주는 그림을 그렸을 거야. 그럼 내가 걔 실수를 수습한 게 꽤 상쇄되겠지.”
역대급 각성자인 미카린이 아니었다면 델로시프 공녀는 결국 죽었을 것이다.
—같은 말이 나올 테니까.
“물론 바로 구해주는 게 아니라, 내가 있는 고생 없는 고생할 때까지 애태우다가 구해주겠지. 근데 말이야.”
니케아르샤가 시선을 들어 에반스를 바라보았다.
붉은 눈동자가 똑바로 자신을 향하자 에반스는 다음 말이 더 기다려졌다.
“미카린이 이렇게 번듯한 미로를 원했겠어?”
구출당한 니케아르샤가 미로 안이었다고 증언할 게 뻔한데.
에반스의 미소가 깊어졌다.
“맞아요. 당신의 몸보다 살짝 더 작은 미로를 원했죠. 토사에 깔린 것으로 착각하기 딱 좋게.”
“그럴 줄 알았어.”
“운 좋게 생긴 공간이 언제 무너질까 불안에 떨다가 추하게 울고 있을 때 구해줄 생각이었어요.”
니케아르샤는 눈매를 좁힌 채 에반스를 바라보았다.
‘이걸 순순히 털어놓는다고?’
무슨 생각이지?
미카린은 에반스의 각성자였다.
‘에반스 정도로 특출난 권능자라면 미카린에게 굉장한 유대감을 느낄 텐데…….’
미카린의 계략을 이렇게 쉽게 토설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용할 순 있겠어.’
니케아르샤는 미소 지으며 에반스에게 다가갔다.
“내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네가 수해를 막는 미로를 세웠겠지?”
“…….”
“미로 속에서 물살은 현저히 약해질 수밖에 없지. 꽤 괜찮은 계획 같은데.”
“…….”
“미카린이 아니라 네가 세운 계획이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흠, 순순히 알려주지 않네.’
하지만 이 역시 정보였다.
미카린의 계략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더니 여기서 모르는 척한다?
‘본인의 계획이거나, 아니면…….’
이것만으로 확신할 순 없었다.
좀 더 정보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각성자의 부탁을 어기면서까지 나에게 접근한 이유가 있잖아.”
그 말에 에반스가 미소 지었다.
“맞혀보세요.”
‘역시 배후의 뜻일까?’
실험실에 관해서도 떠보고 싶지만 리스크가 컸다.
‘내가 실험실에 대해 알고 있는 걸 들키면 에이든과 연관 지을 수도 있어.’
에이든은 센리안의 사절단에 섞여 들어왔고, 나는 사절단을 맞이했다.
사절단 노예와 대공녀가 따로 만났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수상하게 생각하고 되짚어보면 접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그러면 에이든이 위험해진다.
무엇보다 겨우 꼬리를 잡아낸 배후가 또 꼬리를 끊고 사라진다면…….
에반스는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니케아르샤가 어떤 말을 할지 아주 흥미로워 보이는 미소였다.
‘내가 정보를 캐내려고 하는 것처럼 에반스도 내 정보를 캐내려 하고 있겠지.’
그렇다면 차라리 엉뚱한 말을 해서 방심시킨 다음에 정보를 캐내는 게 낫겠다.
니케아르샤는 아무것도 모르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첫눈에 반해서?”
순간, 에반스의 눈이 커졌다.
‘좋아, 당황시켰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에반스의 입가가 유쾌하게 벌어졌다.
“어떻게 알았지?”
귓가에 목소리가 울렸다.
어느새 그가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