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Who Accidentally Stole Their Hearts RAW novel - Chapter (16)
악녀인데 하트 받아버렸다 16화(16/177)
미카린의 크고 동그란 눈동자엔 물기가 어려 있었다.
율리시즈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사랑을 믿기 힘들죠?”
“…….”
“사랑받지 못한 사람들은 사랑을 두려워하잖아요. 그러니까 율리시즈 님도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없었던 거예요….”
미카린이 아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실은 저도 그래요.”
“…….”
“그래서 율리시즈 님을 이해할 수 있구요. 그러니까….”
율리시즈의 뺨에서 미끄러져 내린 손이 펼쳐졌다.
꼭 악수를 청하듯이.
“저랑은 친구가 되어요.”
“…내가 상처받아서 세 여자를 사귄 거라고.”
미카린이 양손으로 율리시즈의 손을 꼬옥 잡았다.
“으응, 난 알아요. 율리시즈 님은 아파서 어쩔 줄 모르는—”
“아닌데.”
툭, 내뱉은 말이 미카린의 말을 잘라냈다.
“…네?”
당황한 미카린이 되물었으나 율리시즈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가 벽면에 걸린 커다란 그림을 향했다.
붉디붉은 색채의 향연.
꼭, 니케아르샤의 눈동자 같은—
“그냥 내가 개새끼라서야.”
니케아르샤가 꼭 개새끼를 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 붉고 강렬한 눈동자는 꼭 용암 같아서—
“사,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율리시즈 님을 헐뜯잖아요. 율리시즈 님은 과거의 아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모두 불태워버릴 듯했다.
율리시즈의 모든 것을 불살라버릴 용암.
몸을 일으킨 율리시즈가 니케아르샤의 흔적을 더듬듯 걸음을 옮겼다.
“율리시즈 님…!”
그의 등 뒤로 미카린의 애타는 목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율리시즈는 묵묵히 그림자 진 복도를 걸을 뿐이었다.
* * *
델로시프 대공저.
내 방의 문을 열던 난 오만상을 찌푸렸다.
♥♡된 사랑의 배달˚₊·—̳͟͞͞♡
<율리시즈>님으로부터 ♥가 도착했습니다!
율리시즈의 하트라니.
막 대해지는 것에서 도파민을 느꼈나?
‘이상한 놈.’
하기야, 제정신이라면 세다리는 못 걸치지.
나는 허공의 글자를 휘휘 젓고, 침대에 몸을 내던졌다.
그리고 이튿날.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뭐야? 내 소중한 저녁 시간 어디 갔어?’
잠든 줄도 모르게 완전히 뻗어버렸다!
물론 회귀 후 여러 일들로 피로가 쌓여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게 원인은 아니었다.
“우후후후, 아가씨! 평소보다 정확히 2시간 4분 16초 늦은 기상이시네요! 푹 주무셨나 봐요!”
앨리스가 내 침실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청소 중이었겠지? 청소 중이었을 거야. 잠든 날 지켜본 게 아니라….’
내 얼굴을 확인한 앨리스가 생글생글 웃었다.
“좋아요. 피로가 싹 풀렸네요. 이불의 탄력과 부드러움 그리고 온도. 무엇보다 저의 마사지까지! 모두 아가씨 맞춤이에요!”
바로 앨리스가 날 기절시킨 원흉이었다.
‘근데 나 지금 완전 뽀송뽀송한데. 대체 어떻게 씻긴 거지?’
궁금했지만 묻고 싶지 않았다.
‘두려운 시중 B급 같으니…….’
* * *
니케아르샤의 응접실.
레널드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사뭇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
오늘은 첫 출근일.
심지어 바로 어제, 그의 상사가 대형 폭탄을 터트렸다.
‘일명, 율리시즈의 3다리 3싸대기 사건.’
단순히 피해자들이 의기투합한 것이라 알려져 있지만, 레널드는 그 너머의 진실을 보았다.
‘공녀님께서 짠 판이지.’
때마침 니케아르샤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가씨. 얼굴이 아주 좋아 보이시는군요. 좋은 일이 있으셨나 봅니다.”
니케아르샤는 자리에 앉다말고 멈칫해서 레널드를 쳐다봤다.
“……알아보겠어?”
“당연합니다.”
율리시즈는 훌륭한 인품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니케아르샤는 그 견고한 가면을 단숨에 벗겼다.
‘과연 ‘사교계 흑막’다우시다! 평소엔 망나니인 척하며 뒤로는 그런 짓을.’
게다가 세다리 당한 여성들.
셀레나와 벨린다, 아이프릴.
전부 능력이 출중한 이들이었다.
‘이번 일로 좋은 인맥을 만드셨지.’
니케아르샤는 자리에 마저 앉아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엄청난 이불과 엄청난 마사지였어. 하루가 삭제되었다니까? 굉장한 앨리스 같으니…….”
레널드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날아다녔다.
왜 갑자기 쌩뚱맞은 소리시지?
혹시….
‘어제 일의 흑막이 공녀님이라는 걸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무리 말씀을 피하셔도 저는 얘기해야겠습니다.”
“뭘?”
“어제 율리시즈 님이 한순간에 천하의 난봉꾼이 된 일, 공녀님께서 하신 거죠?”
“아, 그거.”
“예?”
“됐어. 그리고 그 일은 피해자들이 한 거야. 내가 무슨.”
자신이 흑막이라는 것을 철저히 속이는 모습에, 레널드는 굳은 얼굴로 제 의지를 표했다.
“제 눈을 속이실 수는 없습니다. 저는 공녀님의 원대한 계략… 아니, 계획에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
“무엇이든 명하십시오. 이 레널드 파비안, 목숨을 걸고 이뤄낼 것입니다.”
레널드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진지한 눈으로 니케아르샤를 바라보았다.
집 안의 정적인 미카린을 보내버리고, 인품으로 이름 높은 율리시즈마저 담가버렸다.
‘또 어떤 무시무시한 계략을 짜실까.’
그 길을 따르고자 평생의 목표였던 상단의 일까지 그만두고 나왔다.
지금 레널드의 꿈은 니케아르샤였으니까.
니케아르샤와 함께하고자 상단을 버리고—
“상단 만들어.”
니케아르샤가 산뜻하게 말했다.
레널드의 입매가 움찔했다. 잘못 들었나?
“전 막 상단을 그만두고 나왔습니다. 아가씨와 함께 계략…… 아니, 보좌하기 위해—.”
“그래서?”
니케아르샤의 눈동자가 레널드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 강렬한 눈빛에 레널드는 허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제 능력부터 증명하겠습니다.”
“…?”
‘능력 좋은 건 이미 잘 알고 있는데. 잠재력 A급 상재를 썩히지 않으려고 상단 차리라고 한 거잖아.’
니케아르샤는 어깨를 으쓱하고 소파 옆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서랍에 준비해 두었던 서류를 건넸다.
“내 사재의 증권이야. 초기 자본금은 여기서 알아서 써.”
서류의 액수를 본 레널드가 눈을 홉떴다.
과연 델로시프 공녀.
웬만한 영애, 영식들의 사재와는 단위가 다르다.
“제게 이런 거금을 맡기셔도 됩니까?”
“응.”
“어째서….”
“넌 그 몇 배의 가치가 있으니까.”
니케아르샤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서랍장 속에 다른 서류를 꺼냈다.
레널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나 시선이 엄청나서 뺨이 뚫어질 것 같았다.
뭔가 해서 고개를 드니, 레널드는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참듯이.
“해낼 것입니다. 해내고야 말겠습니다…….”
“……뭐, 그래. 그리고 상단 이름 말인데—.”
역시 파비안이 좋으려나.
회귀 전에 레널드가 만든 상단의 이름은 그의 성과 똑같은 파비안이었다.
‘자기 이름을 따서 지었는데 그걸 바꾸는 건 좀 그렇지.’
그래서 말해주려고 하던 때였다.
“로사래빗이 어떨까요.”
“로사래빗?”
“예.”
“……그게 좋아?”
“예.”
레널드가 단호하게 답했다.
“토끼는 약해 보이지만, 사실은 엄청난 녀석이죠. 뒷다리로 매도 날려버립니다. 성격이 아주 더럽거든요. 그리고 또—.”
“아니, 네가 좋으면 됐어. 그렇게 해.”
니케아르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넘겼다.
창 안으로 햇살이 들어오며 니케아르샤의 머리칼이 반짝였다.
꼭 장미꽃물(로사)이 든 것처럼 살짝 붉은 은발.
서류 안의 문장들을 따라 니케아르샤의 눈이 움직였다.
동그랗고 빨간, 토끼(래빗) 같은 눈.
레널드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로사래빗이네요.”
“……하라니까?”
“예, 로사래빗.”
“…….”
니케아르샤는 잠시 고민했다.
혹시 자신이 회귀하며 기묘한 바이러스를 갖게 된 게 아닐까.
주변 사람들이 자꾸만 이상해졌다.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오늘 약속 상대는 레널드만이 아니었다.
문이 열리자 레널드의 눈이 약간 커졌다.
‘환불원정대!’
헥토파스칼 싸대기의 주인공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뭐…… 뻔한 인사 같은 건 안 해도 되지? 이제 그런 거 할 사이는 아니지 않나?”
셀레나가 새침하게 말했다.
‘일 끝났으니 더 볼 사이도 아닌데’하는 부정적인 뜻이 아니었다.
새침한 표정이지만 발그레한 볼과 귓불이 말하고 있었다.
‘우리 이제 치, 친구니까!’
아이프릴과 벨린다가 후후 웃자, 셀레나는 흥! 헛기침하며 작은 가방을 내밀었다.
“자, 네가 부탁한 거야.”
니케아르샤는 눈을 반짝이며 상자를 받았다.
‘이게 그거구나.’
반가움에 어서 열어보려는데, 셀레나가 “와앗—!” 소리치며 니케아르샤의 손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이런 걸 막 열고 그러면 어떡—!”
당황해서 소리치던 그녀가 움찔,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목소리를 바짝 죽였다.
“…해.”
“왜?”
니케아르샤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뭐가 문제지?’
그러자 셀레나가 레널드 쪽으로 마구 곁눈질했다.
“누구 죽이려… 아니, 협박… 아니, 범행도구잖아.”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니까.”
“아니란 말이야?!”
“아니…… 됐다.”
니케아르샤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셀레나를 쳐다봤다.
‘얘는 나를 어떻게 보는 거지?’
아니, 그보다 그런 일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왜 가져온 거야?
범죄가 발각되면 자기도 유통한 죄로 잡혀갈 텐데.
“레널드는 괜찮아.”
그렇게 말한 니케아르샤가 상자를 열었다.
몇 중이나 되는 안전장치가 보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건 맹독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독이니까.
“물건은 확실하네.”
“흥, 당연하지.”
“그래서?”
“뭘?”
“가격을 알려줘야지.”
“우리 사이에 무슨.”
그렇게 말하던 셀레나가 움찔했다.
“차, 착각하지 마! 공짜로 준다는 게 아니니까! 어쨌든 넌 내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잖아? 그에 대한 값인 거야!”
하지만 이건 정보비로 대신하기엔 너무나 고가의 독이다.
전혀 수지가 안 맞는 거래인데.
니케아르샤가 입을 열었다.
“그건—.”
“고마워서 마음을 표시하는 거 아니야!”
“아니, 내 말은—.”
“네가 좋아서 공짜로 주는 것도 아니라고!”
“그런 게 아니라—.”
“친구라고 생각해서 무조건 돕고 싶은 건 정말 아니란 말야!”
혹시 내 말이 안 들리나.
니케아르샤가 흐린 눈으로 와다다닥 말하는 셀레나를 쳐다봤다.
셀레나는 흐, 흥, 하고 콧방귀마저 어색하게 뀌었다.
“그, 그냥 받은 게 있으니까 돌려주는 것뿐이야.”
니케아르샤는 “흠.” 신음했다.
뭐, 본인이 저토록 열심히 주장하는데.
셀레나는 베스릴 후작가의 외동딸이다.
후작가 후계의 자존심 값이라면 얼추 비슷한 것도 같고.
“잘 받을게. 그런데 두 사람은 왜 온 거야?”
니케아르샤의 질문에 벨린다와 아이프릴이 서로를 쳐다봤다.
그리고 결심한 표정으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무언가를 내밀었다.
“저도 받은 게 있으니, 돌려드리러 왔어요.”
“저, 저도요!”
그건 두툼한 종이 뭉치였다.
‘계약서?’
니케아르샤가 그것을 받으려던 찰나, 레널드가 나섰다.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이런 일은 보좌의 일이지 않습니까.”
계약서 검토라면 레널드가 전문이긴 하지.
니케아르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널드는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매와 같은 눈으로 빠르게 계약서를 읽었다.
어떤 굉장한 기세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두 사람의 계약서를 마지막까지 읽은 그가 단호하게 선언했다.
“완벽한 계약서입니다. 전혀 문제가 없군요.”
“그래?”
“바로 서명하시면 되겠습니다.”
레널드가 검토한 계약서라면 틀림없을 것이다.
회귀 전의 그는 계약의 귀공자라는 말까지 들었으니까.
그리고 니케아르샤에 대한 그의 충성심이 진짜란 건 이미 확인한 뒤였다.
‘계약서를 검토해 주니 확실히 편하구나.’
보좌, 둘 만하다.
니케아르샤는 아이프릴과 벨린다의 초롱초롱한 시선을 받으며 각 계약서에 서명했다.
……계약에 숨겨진 흉계를 모르고.
* * *
“그럼 푹 쉬시길 바라요, 공녀님.”
“다음에 뵈어요!”
“심심하다고 찾아오진 마. ……통신 정도는 괜찮지만.”
“그럼.”
환불원정대와 레널드가 니케아르샤의 방을 나섰다.
하나같이 싱글싱글한 표정이었다.
코너를 지나 복도를 걷길 얼마쯤.
니케아르샤가 결코 얘기를 듣지 못할 거리가 되자, 넷의 표정이 동시에 변했다.
“아까는 감사했어요. 계약서 말이에요.”
벨린다가 무표정으로 레널드를 흘낏 쳐다봤다.
레널드도 표정 없는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훌륭한 노예 계약서더군요. 두 분의.”
아이프릴과 벨린다가 눈을 감고 고개를 깊게 끄덕였다.
그리고 또 한 번 두 사람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혹시 거절하실까 봐 변호사를 몇 명이나 굴렸는지 몰라요~!”
“그래도 공녀님이 얼마나 지혜로우세요? 허점을 알아내실 것 같아서 어떻게 설득하나 걱정이었거든요!”
우후후후.
에헤헤헤.
아이프릴과 벨린다가 신명 나게 웃자, 레널드도 하하하 마주 웃었다.
“아가씨의 의상을 평생 무상으로 제공하시고, 파티 준비 또한 평생 무상으로 돕겠지만, 문제가 생길 시에 책임도 두 분이 진다니! 이렇게 완벽한 노예 계약은 없을 겁니다!”
“그렇죠, 그렇죠?”
“아아, 공녀님의 인생에 막 같이하고 싶어서 얼마나 머리를 굴렸는데요!”
서로를 붙잡고 꺄악꺄악 하는 벨린다와 아이프릴을 본 레널드는 빙그레 웃었다.
“공녀님께서 여러분께 도움을 주셨으면서 갚으려 하니 싫다고 하셨겠죠.”
“어떻게 그걸……?”
환불원정대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레널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같은 일을 겪었습니다.”
“일이라시면…?”
“애인이 유부녀인 걸 공녀님께서 알려줬습니다.”
“네엣?!”
환불원정대는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뺨은 발개져 있어서 흥미를 숨기진 못했다.
“우리는 애인이 세다리 걸치는 걸 알려줬어요! 그것도 한자리에 불러서!”
“예에?!”
엄청나다.
역시 막장의 지배자.
이렇게 대담할 수가!
환불원정대와 레널드는 시선을 교환했다.
“니케아르샤는 선빵으로 도와줘 놓고 딱히 널 위해서 해준 게 아니라면서 튀잖아? 참나. ……귀여워.”
“받은 게 있으니 돌려주겠다고 애원하면 어쩔 수 없이 들어주시죠. ……사랑스러워.”
“앞으로도 우린 무조건 ‘받은 게 있으니 돌려준다’ 메타로 가는 거야.”
“아무렴요.”
그날, 니케아르샤가 모르는 ‘니케아르샤를 위한, 니케아르샤에 의한, 니케아르샤의’ 동맹은 이렇게 결성되었다.
코너 뒤에서 앨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아가씨 얘기가 들리는 것 같은데…?”
니케친자들이 하나둘 모이고 있었다.
* * *
방에 홀로 남은 난 상자를 쳐다봤다.
‘정말로 엄청나네.’
셀레나가 주고 간 맹독.
보관하는 상자만 해도 안전장치가 몇 중이나 걸려 있었다.
‘하기야 그럴 만도 하지.’
이것의 이름은 <페트라>.
세상 모든 것을 녹인다는 맹독이다.
심지어 ‘저주마저 녹일 정도’로.
물론 지금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정보였다.
‘어디까지나 내 예상이지만.’
내가 이걸 알게 된 건 회귀 전의 일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불륜파이브에게 살해당하기 며칠 전.
‘아켈로스 대공이 날 찾아온 그날에.’
나는 불륜파이브에게 한 번에 살해당한 게 아니었다.
몇 달을 꼬박 쥐와 벌레가 드나드는 지하에 갇혀서 조금씩 죽어갔다.
그동안 차라리 빨리 죽여달라고 애원할 만큼 미쳐 있던 나날.
‘그 어느 날, 아켈로스 대공이 은밀히 내가 있던 지하 감옥에 왔지.’
나는 잊을 수 없던 그날 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