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Who Accidentally Stole Their Hearts RAW novel - Chapter (165)
악녀인데 하트 받아버렸다 165화(165/177)
* * *
델로시프 대공은 짙어진 마력의 밀도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니케의 마력인데.’
딸아이 특유의 마력이 농밀하게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어찌나 짙은지 사위가 다 가려 재판장의 전경이 보이지도 않았다.
그때,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있잖아요, 언니. 비밀 하나 알려줄까요?]돌아보니 미카린이 생글생글 웃으며 무릎 꿇은 니케아르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델로시프 대공의 미간에 금이 갔다.
‘니케가 왜 저 따위 것에게 무릎을…….’
심지어 니케아르샤의 상태는 너무 좋지 않았다.
두 뺨은 앙상하고, 뼈마디가 도드라질 정도로 몸이 말랐다.
품에 맞지 않는 커다란 드레스는 다 헤진 데다가 원래도 질이 나빠 보였다.
무엇보다—
‘왜 그런 표정인 게야.’
말라붙어 갈라진 입술.
미카린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니케.”
델로시프 대공이 딸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딸의 귓가에 닿지 않았다.
손을 잡아 일으켜 주려 해도 잡히지 않았다.
내민 손은 그대로 니케아르샤의 몸을 쑥 통과할 뿐.
델로시프 대공은 제가 통과했던 부분의 마력이 흐트러졌다가 다시 뭉치는 것을 보고 확신했다.
‘마력이 보여주는 환상인가.’
아니, 정확히는—
‘니케의 마력에 담긴 과거다.’
나무에 새겨지는 나이테처럼, 마력에도 과거가 새겨진다.
지금 이 광경은 니케아르샤의 마력에 새겨진 과거였다.
‘하지만 니케에게 이런 과거가 있을 리가…….’
그때, 미카린이 우후후,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들은 언니가 친 사고를 수습하느라 너무너무 힘들어서 거리를 뒀잖아요. 그런데 아빠는 왜 거리를 둘까요?] […….] [한 번도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었어요? 왜 아빠가 언니랑은 식사해 주지 않는지.]미카린이 고개를 숙여 니케아르샤의 귓가에 속삭였다.
[대공비께서 언니 때문에 돌아가셨거든요.] [……!]희게 질린 니케아르샤가 고개를 잘게 저었다.
[아냐, 어머니는 나를 낳고서 한참 뒤에—.] [그러니까요. 언니를 낳고서 돌아가셨죠. 왜일까요?] [……왜?] [마력. 그놈의 징글징글한 언니 마력. 그게 배 속에서부터 독이 된 거예요. 그렇게 천천히 죽어가신 거죠. 안타까워라.] […….]니케아르샤의 동공에서 빛이 사라졌다.
딸아이의 얼굴을 본 델로시프 대공은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듣지 말거라, 니케. 다 헛소리야! 마음에 담아둘 필요 없다!”
하지만 니케아르샤는 망가진 인형처럼 굳어 있을 뿐이었다.
델로시프 대공은 만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몇 번이나 딸의 어깨를 붙잡았다.
“화를 내! 감히 그딴 망발을 지껄이냐고 뺨이라도 올려붙이란 말이다!”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대체… 왜 이렇게 무력한 거냐…….”
딸아이는 불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불씨조차 다 꺼져 있었다.
몇 번이나 짓밟혀 절대 다시 타오르지 못할 것처럼.
“니케…….”
장면이 바뀌었다.
미카린은 감히 니케아르샤를 다그치고 있었다.
[그간 언니 때문에 아버지께서 얼마나 힘드셨는지 아세요? 델로시프 공녀랍시고 저지른 온갖 악행을 덮느라!] […….] [그런데 고작 결혼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친정에 돌아가겠다고요? 아버지 기분은 왜 생각 못 하세요?]결혼 생활.
그 말에 델로시프 대공은 주변을 살폈다.
확실히, 지금 이곳은 델로시프 대공저가 아니었다.
[언니는 양딸인 저보다 아버지 생각을 안 하네요. 남들이 그러더라고요. 아버지 딸 자리엔 언니보다 제가 더 잘 어울린다고!] […….] [그러니까 이제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헛된 망상은 좀 버리라고요! 돌아가 봐야 모두에게 민폐일 뿐이니까!]니케아르샤가 왜 이리 무기력한지 알겠다.
‘가족들 품을 떠나 이딴 취급을 받고 살아서.’
미카린과 남편이란 작자가 니케아르샤의 불씨를 꺼트린 것이다.
몇 번이나 물을 끼얹고 짓밟아 다시는 타오르지 못하도록.
“대체 어떤 개새끼랑 결혼했기에.”
당장 찢어 죽일 것이다.
니케아르샤는 이스칼리온과 약혼한 상태였다.
설마 이스칼리온이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내 딸을 이리 만들었다면 그 누구라도—’
그 순간, 장면이 바뀌었다.
[있죠, 클레아스. 백부님— 아니, 아빠가 나를 정말 사랑하시나 봐요.]클레아스의 목에 팔을 두르며 입을 맞추는 미카린.
델로시프 대공의 잘생긴 미간이 파삭 구겨졌다.
‘저게 그 개자식이었군. 그런데.’
대공의 시선이 미카린을 향했다.
‘저딴 것이 왜 나를 아빠라고 부르는 거지?’
그러고 보니 아까 니케아르샤한테도 ‘양딸’ 운운했었다.
[대공저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게 말이죠오, 에헤.]수줍게 웃은 미카린이 들뜬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 오늘 아빠에게 스테이크를 먹여드렸어요. 아~ 해보시라 하고. 진짜 딸 같죠?]델로시프 대공이 우뚝 굳었다.
타 대륙에서 돌아왔을 무렵, 니케아르샤와의 식사 자리가 떠올랐다.
그렇게나 좋아하는 고기를 앞에 두고도 제 눈치만 보던 모습.
그땐 왜 그러는지 몰랐다.
쓰러진 탓에 입맛이 없는 건가 걱정되어서 스테이크를 썰어주었다.
‘……그냥 입맛이 없는 게 아니었구나.’
델로시프 대공의 시선이 미카린과 클레아스를 지나쳐 문가로 향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창백하게 질린 니케아르샤가 서 있었다.
그날, 니케아르샤는 이 순간을 떠올리고 있었던 거다.
‘……정말 과거가 맞는 건가?’
딸아이가 보는 앞에서 남편이라는 클레아스와 미카린은 시시덕대며 입술을 부비고 있었다.
[그건 내게만 해주는 일인 줄 알았는데.] [뭐야, 클레아스. 우리 아빠한테 질투해요?] [미카린, 네가 이렇게 사랑스러우니 질투할 수밖에.]두 사람은 명백하게 니케아르샤가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카린의 시선은 슬쩍슬쩍 문가를 향했고, 클레아스와 짓궂은 웃음을 주고받았으니까.
두 사람에게는 니케아르샤가 보고 있다는 게 하나의 유희거리였다.
‘감히…….’
바짝 틀어쥔 주먹에 힘줄이 불거졌다.
그러나 아무리 후려쳐도 주먹은 공간을 통과할 뿐이었다
아무리 외쳐도, 분노해도, 딸의 눈과 귀를 막아도 소용없었다.
[아빠도 역시 언니보다 제가 더 사랑스러우신가 봐요. 모든 사람이 그렇지만.] [우리가 한날한시에 태어난 이유가 뭐겠어요? 뭔가 바뀌었다는 생각 들지 않아요?] [난 진짜 각성자고, 언니는 아무것도 되지 못했는데. 내가 아빠의 진짜 딸인 편이 맞겠죠?]딸이 숱한 모욕을 당하는 동안 그저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델로시프 대공은 처음으로, 자신이 무능하게 느껴졌다.
아니, 스스로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죄,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대체 무엇을.”
“제가…… 이 모양 이 꼴이라서.”
“…….”
“이렇게 태어나서…….”
딸이 그렇게 말했을 때, 왜 더 자세히 묻지 않았을까.
“……아버지께 쓸모 있는 딸이 되고 싶었어요.”
“뭐?”
“역대급 각성자로 발현하는 걸 실패해서 제 쓸모를 다하지 못했으니, 다른 식으로라도 증명해야 하잖아요.”
“대체 어떤 쓸모를 증명한다는 거지.”
그때, 자꾸만 쓸모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꼭 쓸모없다는 소리를 수백, 수천 번은 들은 사람처럼.’
하지만 그럴 리 없다고 넘겼다.
누가 감히 델로시프 대공녀에게 그딴 망발을 하겠냐면서.
‘……그때 물었어야 했어.’
그저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제대로 표현하지 않아서 아이를 절박하게 만들었다고.
아니, 기실 자신의 탓이 맞았다.
‘미카린의 패악에 헛소리 말라고 외치지도 못하는 건…….’
니케아르샤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미카린이 보여준 영상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빠!] [……미카린.] [아빠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오늘 이렇게 저를 에스코트해 주셔서 너—무 기뻐요!]영상 속 미카린은 델로시프 대공에게 달려가 답삭 팔짱을 꼈다.
그걸로 영상이 멈췄는데도 니케아르샤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저 하염없이, 오붓한 부녀지간 같은 두 사람을 바라볼 뿐.
델로시프 대공의 눈가가 아프게 일그러졌다.
.
.
제르노와 아카인은 주변을 둘러싼 광경에 기가 찼다.
“이게 뭔 개 같은……!”
“마력에 새겨진 과거다.”
“과거? 하지만 이런 일이 어떻게 그 녀석의 과거야.”
피죽도 못 얻어먹은 꼴을 한 니케아르샤가 화려하게 치장한 미카린에게 매달려 빌고 있었다.
[오늘은 어머니 기일이잖아. 오늘만큼은 어머니를 뵙게 해줘…….] [언니는 어쩌면 이렇게 이기적이시죠?]탁!
미카린이 더럽다는 듯이 니케아르샤의 손을 쳐냈다.
[오늘은 큰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슬픈 날이에요. 이런 날 오라버니들께서 언니를 보면 어떤 마음일까요?] […….] [언니는 각성자라는 거짓말로 제국을 우롱하고, 온갖 사고를 쳐서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했다구요.] […….] [이제 가족들에게 상처 주는 일은 그만하세요.]“저 미친?!”
몇 번의 경험으로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음에도, 아카인은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내질렀다.
제르노의 눈빛이 무서울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니케아르샤가 감히 하녀 따위에게 질질 끌려가 갇히고 있었다.
반면, 델로시프 대공저에 다녀온 미카린은 새로운 머리 장식을 한 채 돌아왔다.
제르노도, 아카인도 그 머리 장식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저건 어머니의……!”
“감히 주제도 모르는구나.”
그들이 알아본 걸 니케아르샤가 못 알아봤을 리 없었다.
[……이미 난 가문에서 지워진 사람이구나.]쿵.
그 자그마한 중얼거림에 제르노와 아카인은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마, 말도 안 돼! 이럴 리 없잖아! 니케는 어머니의 기일에 안 오고 저것만 왔는데, 저것한테 어머니의 유품을 물려주다니!”
“…….”
“진짜 과거 맞아? 미카린 저것의 망상질이 아니라?!”
성토하던 아카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미카린이 어머니의 유품을 차고 클레아스와 뒹굴고 있었다.
[어때요, 클레아스?] [널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꼭 어울려.] [기뻐라. 으응, 더 입 맞춰줘요.]니케아르샤의 앞에서.
“미친, 미친! 이딴 거 보지 마!”
아카인이 절박하게 니케아르샤의 눈을 가렸지만, 소용없었다.
“왜 우리한테 말하지 않는 거야! 집에 돌아오면—”
“올 수 있을 리 없지. 미카린이 우리의 친동생 노릇을 하면서 어머니의 유품까지 받아 왔는데.”
“말도 안 돼! 우리가 왜…….”
그러나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니케아르샤에겐 더 큰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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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즈는 흔들리는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그가 보고 있는 건 화를 내는 그 자신이었다.
[지하에 저게 대체 뭐야, 클레아스. 니케잖아! 이게 ‘미카린을 위해선 못 할 게 없다’는 말의 의미였어?] [그래. 이해를 못 하는 걸 보면 넌 미카린을 위해서 못 할 게 있나 봐. 미카린이 알면 아주 실망하겠는데.] […….] [황궁에 고발이라도 해. 그럼 네가 그렇게 원하던 미카린의 남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지 모르잖아. 더러운 난봉꾼.] […….] [하지만 미카린은 알게 되겠지. 누구의 사랑이 진짜인지.] [……난 아무것도 못 봤어. 앞으로도 못 볼 테고.]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가죽을 뒤집어쓴 다른 생물을 보고 있는 기분.
[언니에게 미안하죠? 왠지 그럴 것 같아서…….] [미카린. 날 봐.] [……율리시즈.]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난 또 한 번 니케를 모른 척하겠어. 그렇게 내 마음을 증명할 수 있다면 수십, 수백 번이라도.] [꼭 사랑한다는 말 같다, 그거…… 에헤.] [웃어. 네가 그렇게 웃을 때가 난 제일 행복하다.]“욱…….”
자신과 미카린의 행각에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율리시즈는 입을 틀어막았다.
‘어떻게 저런 상태인 니케를 두고…….’
지하실에 갇혀 있는 니케아르샤는 끔찍하다 못해 참담했다.
[율…리시즈, 제발…… 누군가에게…… 내, 내 상황을…….] […….] [제, 발…….]당장이라도 그녀의 손을 붙잡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제 손은 니케아르샤에게 닿지 못하고 통과할 뿐이었다.
그리고 정작 니케아르샤와 대화할 수 있는 또 다른 자신은…….
[이건 네가 멍청한 탓이야.] […….] [덜떨어진 종자가 도태되는 건 당연한 이치야. 멍청한 개체가 강한 개체에게 잡아먹히는 게 자연의 섭리라고.] […….] [그러니까 누굴 탓할 생각하지 마. 이렇게 된 건 운명이니.]그딴 개소리나 지껄이고 미카린에게로 갔다.
“미친놈.”
율리시즈는 입을 가린 채 몇 번이나 되뇌었다.
“미친놈, 미친놈, 미친놈. 죽어, 쓰레기.”
“넌 지독하게 이기적이라, 결국 널 지킬 거거든.”
“네 안의 나는 대체 얼마나 쓰레기인 거지?”
“실제로도 그런 쓰레기니까 너무 너 자신을 얕보지 마.”
언젠가 니케아르샤가 했던 말.
그건 단순히 세다리를 걸쳤기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니케한테 이딴 짓을 했다고……?’
그러고서도 뻔뻔하게 용서를 구했나?
널 위해 행동했으니 알아달라면서?
“윽…….”
율리시즈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 * *
나는 흐르는 과거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력이 공간을 집어삼킬 정도였으니 그 마력에 새겨진 과거가 보이는 것도 당연한가?’
이론적으로 틀리진 않은 것 같은데, 현실적으로도 가능하다니.
내 마력이 정말 무지막지하게 많긴 한가 보다.
나는 흘러가는 과거를 바라보다 어깨를 으쓱였다.
“뭐, 다 지난 일이고.”
말하고서 멈칫했다.
이게 그냥 ‘지나간 일’인가?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몸도, 마음도 깎이고 깎여나가 원래의 인격까지 잃어버릴 정도로.
‘그런데 그냥 과거의 일로 치부하고 넘기다니.’
나 스스로에게 조금 놀랐다.
그러는 사이에도 장면은 계속해서 바뀌었다.
제대로 몸을 가눌 힘도 없어서 쓰러져 있는 내 위로 짙은 그림자가 졌다.
‘아, 이스칼리온이다.’
반가운 마음에 나는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갔다.
끔찍한 몰골로 쓰러져 있는 날 확인한 이스칼리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왜 이러고 있지?] […….] [왜 네가….]이스칼리온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미간을 살살 펴줬다.
그래봐야 닿지도 못하고 통과할 뿐이지만.
“뭘 잘했다고 주름을 펴주고 있어.”
머리 위로 떨어지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스칼리온이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과거의 이스칼리온이 아니라, 현재의 이스칼리온이.
“인상 찌푸리지 말라고 할 게 아니라 뺨을 쳤어야지.”
“봤어요? 내 과거.”
“……그래.”
“보지 않길 바랐는데.”
미소 짓자 이스칼리온의 호흡이 떨렸다.
“왜…….”
“당신이 이렇게 아파할 줄 알았으니까.”
툭.
결국 이스칼리온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울지 마요.”
“네가 이토록 아플 때 나는 같이 있지 못했어.”
“…….”
“내가 너무 늦어서, 네가 이런 고통을 겪게 했어.”
지독히 이스칼리온다운 말이라서 웃음이 나왔다.
“과거를 들추면 끔찍할 것 같았거든요. 다시 과거에게 잡아먹힐까 봐 두려웠어요.”
“…….”
“그런데 막상 이렇게 다시 보니 그냥…… ‘지나간 일’이더라고요.”
“이게 어떻게 그냥 지나간 일이야!”
“그러니까요. 나도 신기했는데, 이제 답을 알겠어.”
나는 이스칼리온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찾아올 걸 알고 있었으니까.”
과거의 이스칼리온이 과거의 내게 구원을 속삭이고 있었다.
“당신을 다시 만날 걸 알고 있었으니까.”
현재의 이스칼리온이 현재의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늦지 않았어요.”
“…….”
“당신은 언제나 나를 구했어. 제때에.”
과거에도, 지금도.
나는 이스칼리온의 등을 마주 꼬옥 끌어안았다.
“……당신과의 첫 만남, 나만 기억해서 조금 아쉽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나도 기억해. 죽을 때까지— 죽어서도 잊지 않아.”
그 말에 미소 짓는 순간이었다.
내 눈에 뭔가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과거의 이스칼리온이 제 손을 베었다.
그리고 정신을 잃고 쓰러진 과거의 내 위로 피를 떨어트렸다.
엄청난 양의 피가 내게 스며들었다.
그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대체 무슨…….”
당황한 나와 달리, 이스칼리온은 침착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자 무언가 위화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고 보니 이상해.’
이때 이스칼리온은 저주로 인해 다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날 찾아와. 무조건. 나를 찾아내.”
자신을 찾아오라고 했을까.
나는 감옥과 동화되어 이곳을 빠져나갈 수조차 없었는데.
순간, 뇌리를 강타한 깨달음에 온몸이 떨렸다.
“아…….”
이스칼리온이 날 회귀시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