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Who Accidentally Stole Their Hearts RAW novel - Chapter (176)
악녀인데 하트 받아버렸다 176화(176/177)
장엄한 석조 건물이 오랜 거목처럼 서 있는 곳.
어머니가 잠들어 계신 성소였다.
니케아르샤는 먹먹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네가 제일 가고 싶어 하는 곳.”
‘이스칼리온은 어떻게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는 걸까.’
“항상 지켜봐 왔으니까.”
“네?”
니케아르샤는 놀라 이스칼리온을 쳐다보았다.
방금 소리 내서 말했나?
“네가 다른 곳을 보고 있을 때도 나는 항상 너만 보고 있었으니까.”
“…….”
“그래서 알아.”
이스칼리온이 니케아르샤의 손을 잡았다.
단단한 손이 뿌리 깊은 나무처럼 니케아르샤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어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지탱할 듯이.
“갈까.”
“응.”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긴 길의 끝에 어머니의 영혼석이 보였다.
어머니의 영혼석은 반갑다는 듯 맑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이정표처럼 빛나는 어머니의 자취를 보며 니케아르샤는 맞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회귀 전에도, 지금도 이렇게 누군가의 손을 잡고 어머니께 간 적은 없었다.
“어머니.”
반짝.
영혼석이 답하는 것처럼 빛을 발했다.
니케아르샤의 눈가가 파랑이 인 듯 엷게 일렁였다.
“……엄마.”
불러 놓고서도 니케아르샤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 못했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해일처럼 삶을 덮친 불행도.
영혼이 깎여나가는 끔찍한 고통도.
자기 자신조차 잃어버리게 만드는 지독한 외로움도.
‘그래도.’
잘 해낸 것도 있었다.
포기하지 않은 것.
손을 내민 것.
내밀어진 손을 잡은 것.
잡은 손을 놓지 않은 것.
그래서 더는 흔들리지 않은 것.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요.’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잘한 일들을 전부 다 하나하나 꺼내 자랑하고 싶었다.
사실은 너무 힘들었다고 투정 부리고도 싶었다.
난 괜찮으니 아무 걱정 말라고 호언하며 가슴을 탕탕 치고 싶은 마음도.
왜 엄마는 내 곁에 없냐고 원망하고 싶은 마음도.
끝까지 나를 지켜줘서 고맙다고, 절대 엄마를 원망한 게 아니라고.
사실은 엄마를 너무 사랑해서, 보고 싶어서, 그래서 그랬다고.
무수한 말이, 마음이, 감정이 입안에서 소용돌이쳤다.
“엄마, 나…….”
그 모든 말을 제치고 가장 먼저 나온 말은 역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이스칼리온에 대한 말이었다.
니케아르샤는 미소 지었다.
“보여요? 엄청 잘생겼고, 키도 크고, 부자에, 신분까지 완벽한 남자예요.”
자꾸만 입매가 울렁거리고, 눈가가 떨렸지만, 니케아르샤는 그 어느 때보다 환히 미소 지었다.
“엄마도 좋죠? 이 얼굴을 싫어하는 여자가 있을 리 없어.”
그 말에 이스칼리온이 픽 웃으며 니케아르샤의 어깨를 감쌌다.
“가장 중요한 것을 빼먹었어.”
“아, 키스도 끝내주게 잘해요.”
이스칼리온은 순간적으로 사레들릴 뻔했다.
‘정말 이 여자는…….’
종잡을 수 없는 여자.
니케아르샤를 그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는데도, 이렇게 가끔씩 허를 찌른다.
니케아르샤가 의아한 얼굴로 이스칼리온을 올려다보았다.
표정이 딱 ‘이거 아니야?’하고 묻고 있다.
이스칼리온은 이 천방지축의 이마에 제 이마를 톡, 부딪쳤다.
“내가 죽도록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
초점이 맞지 않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니케아르샤의 눈동자가 벌어졌다.
이 붉은 눈동자가 만개하는 장미꽃처럼 피어나는 순간을 이스칼리온은 사랑했다.
아무리 봐도 부족할 정도로.
“죽어서 기억을 잃고 시간을 되돌아와도 잊지 못할 정도로 사랑한다는 것.”
“…….”
“그대의 행복이 내 목숨보다 소중하다는 것.”
“…….”
“그대의 어머니께서 그 무엇보다 궁금해하실 내용이잖아.”
이스칼리온이 숙였던 고개를 들고 자세를 바로 한 뒤 니케아르샤를 불렀다.
“니케아르샤 델로시프.”
그가 니케아르샤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유려하고 우아한 동작이었다.
니케아르샤는 굳은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아켈로스 대공가의 적장자로 태어나, 젊은 대공이 된 그가 누구 앞에서 이리 무릎을 꿇겠는가.
이제 신격까지 품은 이스칼리온은 그 누구의 앞에서도— 황제의 앞에서도 무릎 꿇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칼리온은 니케아르샤 앞에선 쉽게 무릎 꿇었다.
언제나.
“나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
이스칼리온이 반지를 내밀었다.
아켈로스 대공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대공비의 반지였다.
“순서가 잘못 되었지. 이미 청혼서를 넣고 혼약까지 맺은 뒤니까.”
“…….”
“하지만 역시 하고 싶더라고. 너한테 청혼.”
“…….”
“네게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몰라. 말뿐인 사랑과 거짓 맹세에 숱하게 배신당했으니까. 이런 건 의미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니케아르샤는 이스칼리온의 고백을 떠올렸다.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그녀가 확신할 수 있게,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던 남자.
하지만 역시 말로도 전하고 싶다며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을 속삭이던 남자.
“나는 말로도, 맹세로도, 행동으로도 그대에게 귀속되고 싶어.”
“…….”
“이건 절대 못 물려. 그대의 어머니께서 증인이 되어 주시니까.”
“…….”
“나와 결혼해서, 나와 매일 함께 일어나고, 식사를 하고, 산책도 하고, 눈을 마주치고, 밤마다 같이 하루를 마무리하고. 그렇게,”
“날 찾아와. 무조건. 나를 찾아내. 그렇게,”
“나를 구원해 줘.”
“너를 구원해.”
니케아르샤의 눈동자가 갓 피어난 꽃잎처럼 흔들렸다.
잇새에서 새어 나온 숨결조차 새롭게 느껴졌다.
니케아르샤가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싫어.”
이 말은 니케아르샤에게서 나온 소리가 아니었다.
니케아르샤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가족들이 똑같은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러니까— 아주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아카인이 미간을 찌푸린 채 버럭거렸다.
“싫다고 해. 빨리!”
“…….”
니케아르샤는 가족들을 빤히 바라보다 말했다.
“엄마가 좋은 남자 아니면 결혼하지 말고 아빠랑 평생 살라고 했는데.”
이스칼리온이 움찔했다.
반면 가족들의 얼굴은 화색이 돌았다.
니케아르샤는 생긋 웃었다.
“이번에는 그 말을 지킬 수 있을 거 같아요.”
“……?”
“이스칼리온은 진짜 좋은 남자니까.”
니케아르샤가 냉큼 왼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스칼리온을 채근했다.
“안 끼워줄 거예요?”
이스칼리온이 니케아르샤의 왼손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가족들은 난리가 났다.
“야! 이걸 이렇게 쉽게—”
“귀엽잖아.”
“뭐?”
세 쌍의 붉은 눈동자가 동시에 이스칼리온을 향했다.
귀엽긴커녕 언제 터질지 모르는 난폭하고 포악한 악당 같은데.
니케아르샤를 한입에 꿀꺽 삼켜버리고도 남을 놈이었다.
“저게 귀엽다고……?”
“방금 이스칼리온, 긴장해서 말 많아진 거 못 봤어?”
“…….”
“그리고 내가 엄마 앞에서 한 약속은 절대 못 물릴 거라고 생각해서 여기서 프러포즈하잖아. 이런 계략을 짜는 게 진짜 귀여워.”
“…….”
“…….”
“…….”
가족들은 잠시 침묵한 채 막내의 취향 고백을 곱씹었다.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는 몸부림이었다.
물론 실패했다.
“그게, 귀엽다고?”
“징그러운 게 아니라?”
“……귀여우면 끝난 거라던데.”
니케아르샤는 이스칼리온의 귀엽……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단단하고 늠름한 팔을 꼭 끌어안았다.
그녀의 손에서 아켈로스 대공비의 반지가 번쩍번쩍 빛났다.
“나랑 같이 일상을 보내는 걸 구원이라고 하는 남자예요. 그런데도 반대하세요?”
델로시프 대공은 잠시 딸아이와 이스칼리온을 번갈아 보았다.
“……반대하지 않는다.”
니케아르샤의 마력에 담긴 과거를 본 순간부터 더 이상 반대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딸아이를 품에서 떠나보낼 일을 벌써 결정하는 게 아쉽고 서운했을 뿐.
“저놈이 그으나마 개중 낫긴 하니까. 진짜 그으나마!”
“네 남자 보는 눈이 나아지긴 했더구나.”
아카인과 제르노 역시 각자의 표현 방식대로 이스칼리온을 인정했다.
니케아르샤는 미소 지었다.
‘이번에는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가 아니라, 정말로 가족들의 인정과 축복을 받으며 결혼할 수 있을지도.’
가까이 다가온 델로시프 대공이 딸아이의 어깨에 손을 꾹 얹었다.
“니케, 네가 원하면 언제든지 집에 돌아와도 된다.”
“집은 항상 네게 열려 있으니까.”
“그래그래. 혹시 손톱에 거스러미라도 생기면 당장 돌아와.”
제르노와 아카인까지 니케아르샤의 어깨를 붙들고 꾹꾹 누르며 당부했다.
니케아르샤는 황당한 눈으로 가족들을 쳐다봤다.
‘회귀 전의 결혼생활이 워낙 그랬으니 이해는 하지만…….’
이스칼리온과 클레아스는 비교하는 것조차 미안한 수준이었다.
‘대체 거스러미는 왜?’
더 황당한 건—
“거스러미는 물론, 종이에도 베이지 않도록 신경 쓰겠습니다.”
완전히 이해한다는 얼굴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스칼리온이었다.
두 오빠들은 “흠흠, 뭐.” 중얼거리며 내심 만족해했다.
그때, 아버지가 이스칼리온을 불렀다.
“이스칼리온.”
그는 침묵한 채, 깊은 눈으로 이스칼리온을 응시했다.
그리고.
“고맙다.”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과거를 보았을 때부터 계속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델로시프 대공도, 그 두 아들들도 진심으로 이스칼리온에게 감사했다.
이스칼리온이 마주 고개를 숙였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네 남자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모처럼 훈훈한 공기가 흘렀다.
“따님을 주셔서.”
이스칼리온이 그 말을 하기 전까진.
“주겠다고는 안 했어!”
“그럼 저를 따님의 소유로 인정해 주셔서.”
“…….”
할 말이 없었다.
“……하.”
델로시프 남자들의 속 터지는 숨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니케아르샤는 활짝 웃었다.
막내의 웃는 얼굴을 본 세 남자의 얼굴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모두의 입가에는 비슷한 미소가 걸렸다.
어머니의 영혼석이 반짝였다.
앞날을 축복하듯이.
* * *
완연한 봄.
겨우내 앙상했던 가지에 신록이 돋아나고, 개울의 물조차 얼었던 과거를 깨치고 새롭게 흐르는 날.
“델로시프 대공녀와 아켈로스 대공의 성혼식으로 일대의 교통이 마비되었습니다.”
“역대급 각성자와 압도적인 권능을 자랑하는 권능자의 결합에 제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주목하고 있는데요.”
“황태후 폐하께서 황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을 선물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성혼 장소인 임페라에타 홀은 대관식이나 황제와 황후의 성혼식에만 열리는 곳으로, 황제 폐하께서 특별히…….”
임페라에타 홀 앞에 몰려든 기자들은 열띤 목소리로 오늘 성혼식을 중계하고 있었다.
이리 성혼식을 생중계하는 것 또한 유례없는 일이었다.
“아아아, 이제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아직은 죽으면 안 돼! 죽더라도 내일 죽자!”
쓰러지려는 아이프릴을 벨린다가 붙잡았다.
두 사람은 글썽글썽한 눈으로 니케아르샤를 쳐다봤다.
“공녀님의 성혼식을 제가 꾸미다니!”
“공녀님의 웨딩드레스를 제가 디자인하다니!”
감격에 차 외친 두 사람이 갑자기 “아악!”하며 쓰러졌다.
“공녀님이 너무 눈 부셔!”
“눈이 멀더라도 내일 멀어야 하는데!”
“…….”
니케아르샤는 어이없는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째 갈수록 앨리스를 닮아가는 것 같은데.’
앨리스와 곧잘 어울리더니 이제는 주접까지 비슷해졌다.
어쨌든 제국 최고의 파티플래너와 최고의 디자이너가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선 결혼식은 엄청났다.
총책임자인 황태후—대체 왜인지 모르겠지만 황태후가 성혼식을 주관하겠다고 나섰다—도 두 사람의 능력에 몹시 흡족할 정도로.
그때.
“흐어어어어엉—!”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렸다.
앨리스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오열하고 있었다.
“우리 아가씨가 결혼이라니. 흐으윽, 아직도 믿기지 않아…….”
“……손에 들고 있는 건 뭐야?”
앨리스는 양손에 각기 다른 12개의 마도구를 들고 있었다.
저 많은 걸 어떻게 한꺼번에 들고 있는지, 기예를 보는 것 같았다.
“흐어어, 영상석이죠. 웨딩드레스 입은 아가씨는, 흑! 최고니까! 다양하게 남겨야…… 으허어어엉!”
저렇게 격하게 울면서도 손은 하나도 떨리지 않았다.
‘A급 시중의 재능을 왜 이런 데 쓰고 있는 걸까.’
니케아르샤는 떨떠름하게 생각했다.
벨린다와 아이프릴이 아무리 주접떨어도 앨리스의 원조 주접을 따라갈 순 없었다.
그리고 앨리스의 주접과 맞먹을 정도로 성대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허어어엉!”
“……레널드.”
“으흑, 제가 업어 키운 공녀님이 어느새…… 크으윽!”
“말은 바로 해야지. 네가 날 업어 키운 적은 없어. 그리고…… 주변에 떠다니는 건 뭐야?”
수십 개의 마도구가 레널드의 주변에 어지럽게 떠다니고 있었다.
“전부 신규 출시한, 으흑! 영상 마도구입니다. 크으으응!”
그런 데 돈 쓰라고 상단을 차려준 건 아니었는데.
상단 장부를 검사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셀레나와 에디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어휴, 경사에 왜 우냐?”
“다들 웃어야지. 오늘 같은 날엔.”
니케아르샤는 두 사람을 보고 피식 웃었다.
“콧물부터 닦고 말해.”
두 사람이 황급히 손수건으로 눈가를 콕콕 찍곤 환히 웃으며 말했다.
“축하해, 니케.”
“알지? 우리는 절대 네 편이야.”
“응.”
세 여자 친구들은 서로를 눈에 담았다.
셋은 불행과 복수의 기쁨을 함께 누린 전우였다.
그때, 문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진짜 줄을 잘 섰어요.”
돌아보니 노세넥 부인이 후후, 웃으며 다가왔다.
안 그래도 사교계 명사로서 명망 높았던 노세넥 부인은 최근 엄청난 권력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얼굴이 좋아 보이시네요, 부인.”
“어제도 전남편이 찾아와 비는 걸 콱 짓밟아 줬거든요. 그때마다 젊어지는 기분이에요.”
깔깔 웃은 노세넥 부인이 깊어진 눈으로 니케아르샤를 바라보았다.
“공녀의— 아니, 대공비 전하의 결혼 생활은 반드시 행복할 거예요.”
“고마워요.”
이때까지만 해도 니케아르샤는 생각지 못했다.
설마 자신이 상상도 못 한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