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Who Accidentally Stole Their Hearts RAW novel - Chapter (48)
악녀인데 하트 받아버렸다 48화(48/177)
“황공합니다, 황태후 폐하.”
니케아르샤가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황태후는 니케아르샤를 내려다보며 근엄하게 말했다.
“책 한 권에 담긴 지혜는 때로 세계를 구하기도 하지.”
“…….”
“물론 과거를 잊지 않는 것은 중요하나, 이 한 권에는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지혜 또한 담겨 있다.”
누가 봐도 미카린의 선물과 비교하는 말이었다.
미카린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황태후의 엄정한 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드니, 책 한 권은 능히 사람의 인생— 세계를 바꿀 수 있다.”
“…….”
“또한 값비싸고 희소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에 마음을 담았으니…….”
황태후가 자애롭게 미소 지었다.
“‘고귀한 자’뿐만 아닌, 이 나라 누구에게나 공녀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는 뜻이겠지.”
“모자란 마음일 뿐입니다.”
“겸손까지. 아주 영특하구나. 공녀가 본질을 알아.”
황태후의 말에 1황비가 빙그레 웃었다.
“사촌 자매가 나란히 훌륭하니 델로시프 대공가의 홍복이로군요.”
“그래, 하지만 확실히 본가의 영양은 본가의 영양이야.”
2황비와 3황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델로시프 대공과 대공비 모두 제국의 축복이라 불리는 자들이었죠.”
“직계의 피는 속일 수 없는 법이네요. 이렇게 두각을 드러내다니.”
황태후가 미카린을 향해 말했다.
“텔시 영애의 선물은 무척 훌륭한 가치를 담고 있으나, 본후가 보기엔 진짜 주인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보지 않은 것 같구나.”
“폐, 폐하…….”
“그건 ‘평화’롭지 않은 방법이지.”
“……!”
“텔시 영애는 다시 한번 <보르샤>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어.”
“송구…합니다…….”
미카린이 얼굴을 시뻘겋게 붉힌 채 허리를 숙였다.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붉은 양갈래가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소곤거렸다.
“푸훗, 이래서 근본 없는 것들은. 지가 뭔데 감히 공작가의 가보를 황가에 넘기려고 해?”
“방계 따위가 본가의 영양보다 눈에 띄려고 아득바득한 결과지. 아무리 공녀가 개망나니라고 하지만, 저것과는 급이 다른데.”
“오늘 보니 망나니인지도 모르겠던데?”
니케아르샤는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회귀 전과는 완전히 다른 결과네.’
그땐 니케아르샤의 곁에 없었던 셀레나가 소곤거렸다.
“쌤통이다, 저 바람녀. 오늘 인맥을 다지러 온 것 같은데 오히려 망했네.”
“황비의 선택을 받았으면 결과가 달랐을 거야.”
황비가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말한 선물을 욕할 순 없다.
그리고 로르아 공작 부인과 루크반이 없었다면 다들 합의가 있었을 거라고 짐작했겠지.
“흥, 그 선물마저 남의 것이었잖아. 대체 자기 건 뭐야?”
“…….”
“하는 말은 네가 했던 말. 선물은 네 친구의 가보. 만나는 남자는 네 남자.”
“…….”
“쟤는 너 없인 살 수 없겠다.”
셀레나의 말에 니케아르샤가 미소 지었다.
‘그래서 나 없이 살게 해주려고.’
그때, 황태후가 친히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그녀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황태후가 향한 곳은 니케아르샤의 앞이었다.
“가장 흔하고 보잘것없는 것에서 세상을 구하는 지혜를 발견한 아이야.”
황태후가 니케아르샤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나는 책 안에 박제되어 갇힌 생각보다는 너의 그 생생한 뜻을 직접 듣고 싶구나.”
황실 최고 어른답게 인자하면서도 무게 있는 말이었다.
“와아, 어쩜…….”
“델로시프 공녀는 좋겠어요.”
영애들이 감탄하는 가운데, 니케아르샤는 흐린 눈으로 황태후를 바라보았다.
♥♡된 사랑의 배달˚₊·—̳͟͞͞♡
<황태후>님으로부터 ♥가 도착했습니다!
‘그냥 막장 치정 불륜 소설이 궁금한 것뿐이잖아!’
* * *
쪼로록—.
붉은 찻물이 맑은 소리를 내며 찻잔에 차올랐다.
“이 나이까지 살아 보니 참으로 허망하더구나.”
황태후는 심후한 얼굴로 찻잔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나 손에 넣고 싶어서 안달하던 권력도, 재물도…….”
“…….”
“칼같이 정적을 없애며 이 자리까지 올랐건만, 이제 보니 전부 무용한 것이야.”
먼 곳을 바라보는 황태후의 눈동자는 세월이 오롯이 녹은 현자의 혜안처럼 깊었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슨 삶에 통달해서 해탈한 척하고 있어.’
이곳은 바로 황태후의 궁.
왼쪽으로 눈을 굴리니 번쩍이는 보석과 황금으로 만들어진 장식품이 한가득.
오른쪽으로 눈을 굴리자 베가 비단과 아라크네 레이스로 짜인 휘장이 한가득.
정면의 테이블 위에는 최고급 차, 최고급 디저트.
그리고 멀리 눈을 들면 최고급 뷰까지!
‘무엇보다—’
– 이름: 소니아 팔마
…
– 재능: 시중(A급)
‘최고급 시중!’
드디어 봤다.
A급 재능.
‘A급은 황태후 궁쯤에는 와야 볼 수 있구나.’
B급 시중인 앨리스도 이불을 고양이 배냇털처럼 포근포근하게 만든다.
과연 A급 시중은 어떤 마법을 부릴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황태후는 욕망을 초월한 자연인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한데도 모두 이 늙은이의 권력만 원하며 다가오는구나.”
“…….”
“아직 어린 공녀는 모르겠지만 나이 들면 이 늙은이의 말뜻을 알게 될 게야.”
“…….”
‘적어도 엄청 배부른 소리한다는 것만큼은 알겠는데요.’
최고급 차를 마시며 ‘인생이란 허무해’ 외치고,
최고급 디저트를 먹으며 ‘젊었을 때는 왜 그렇게 투쟁하며 살았을까’ 한숨 쉬고,
최고급 드레스를 입은 채 ‘다들 이 늙은이의 재산과 권력만 탐내’ 울적해하다니.
‘장난해?’
나는 이글이글한 눈으로 황태후를 노려보았다.
‘부러워! 엄청 부러워!’
행복하고, 평화롭고, 한가한 말년.
나도 엄청 원해!
“으음? 공녀,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인생의 혜안을 가지고 계신 황태후 폐하의 말을 귀담아듣고자 하는 열정적인 마음이 제 시선에 드러났나 봅니다.”
가장 부러운 건 이거다.
복장 터지는 소리 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못하는 거!
그게 제일 부러워.
“폐하께서 바깥출입을 삼가며 객도 받지 않으신다기에 의아했습니다만, 인생의 통찰에서 비롯된 결정이었군요.”
“그렇단다.”
뭐가 ‘그렇단다’야.
그냥 밖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완벽한 환경이라서잖아.
‘거기에 취미는 막장 소설 읽기.’
안락한 둥지에서 도파민 팡팡 터지는 막장 소설을 읽으며 룰루랄라 사는 게 좋을 뿐.
나라도 밖에 나가기 싫겠다!
“폐하께서 어찌 그리 책을 아끼는지 알겠습니다. 방 안에서도 세상을 경험할 수 있지 않습니까.”
책이라는 말이 나오자 황태후가 입매를 올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공녀가 아주 귀한 책을 내게 주었지. 내가 치른 값은 마음에 들었더냐?”
“값이라 하시면.”
“새벽 다과회에서 네 선물을 택하고, 너를 크게 치하했다.”
엄청 오버하면서 나를 칭찬한 건 그냥 막장 소설이 선물인 걸 보고 찔려서 그런 거잖아.
“또 너를 따라 하면서 망신 주려던 사촌을 역으로 망신시켰지.”
“제 사촌이 저를 망신 주려 했다니요. 저를 굉장히 따르고 사랑한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나도 젊었을 적 숱하게 겪은 일이라 눈치가 빤하거든. 방계 따위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야 눈 감고도 알 수 있지.”
황태후가 고상하게 턱을 들어 올렸다.
“값은 충분하고도 남는다고 생각하는데.”
“저와 폐하의 셈법이 다른가 봅니다.”
어깃장을 놓자 황태후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다들 황태후의 말에 그렇다고 해줬겠지만, 난 아니야.
이래 봬도 소문난 개망나니거든.
“폐하께서 제 선물을 선택하신 건, 절 위해서가 아니라 이 책을 갖고 싶어서 아닙니까?”
“…….”
“제 책을 선택해야지 가질 수 있으니까요.”
새벽 다과회에서는 선택받은 선물 빼고 나머지는 돌려보낸다.
상은 딱 하나만 걸고, 영애들이 가져온 선물을 홀랑 다 받는 건 황실의 위엄을 손상시키는 일이니까.
기분이 상한 황태후가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각성석을 내준 것은 1황비지. 나는 공녀의 선물을 가져간 대가로 1황비에게 값을 치러야 해.”
“그건 1황비 전하와 황태후 폐하의 거래지요.”
황태후가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과연 그 지독한 황위 다툼의 최종 승자.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압박감이 대단했다.
‘하지만 우리 가족만큼은 아니야.’
나는 조용히 차를 마셨다.
최고급 차에 A급 시중이 우려서 진짜 향이 끝내줬다.
“하!”
황태후가 웃음을 터트렸다.
“꼭 그걸 보는 기분이군.”
“……?”
“돈다발을 던지는 것 말이다.”
돈다발?
그게 여기서 왜 나와.
“값은 충분하겠지? 내 아들과 헤어져!”
황태후가 오만한 표정으로 돈다발을 던지는 시늉을 했다.
“그렇게 말하는데 이런 답이 되돌아오는 거야. ‘부족한데요?’”
“…….”
“지금 상황과 똑같지 않나?”
“…….”
대체 어디가 똑같다는 거지?
“후후, 그래. 간만에 이 늙은이에게 재미를 주었으니. 말해보거라.”
황태후가 내게 몸을 기울였다.
얼굴에는 흥미가 가득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모자란 값을 치를 수 있을지.”
“황태후 폐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거절하진 않겠습니다.”
“푸하! 먼저 요구해 놓고 잘도 그리 말하는구나. 이 당돌함은 꼭 그거 같은데.”
“…….”
그게 뭔진 몰라도 알고 싶지 않았다.
막장치정극의 주인공이 되는 건 사양이다.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제가 원하는 건…….”
내 말을 들은 황태후의 눈이 커졌다.
이내 커다랗게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델로시프의 개망나니가 보통 개망나니가 아니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
“내게 금 광산을 통째로 갖다 바친 자도 그런 걸 요구하진 못했다. 한데 고작 책 한 권으로?”
황태후의 눈동자에 날카로운 예기가 어렸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칼날 같다.
“재산과 권력은 덧없는 것.”
말하며 나는 생긋 웃었다.
“황태후 폐하께서 하셨던 말씀이지요. 마음 깊이 새기고 있답니다.”
황태후가 벙찐 눈으로 나를 봤다.
그리고.
“으하하하하! 공녀는 정말 재밌구나. 내 근래에 <전처의 유혹>을 제하고 이리 재밌는 건 처음이야.”
“…….”
하나도 기쁘지 않다.
“그래, 좋아. 죽을 날만 기다리는 늙은이를 이리 즐겁게 한 대가라면 충분하지.”
황태후가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공녀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다.”
“……!”
황태후의 시녀들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A급 시중인 팔마 부인만이 안쪽으로 들어가 조그마한 상자를 가져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황태후에게 무릎을 굽혔다.
“감사합니다, 폐하.”
이것으로 나는 가장 강력한 방패이자 무기를 손에 넣었다.
* * *
황궁 인근, 클레아스의 사저.
쨍—!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에 미카린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내, 내 말 좀 들어봐요.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또 예기치 않은 일이 생겼겠지! 넌 나를 위해서 황궁 파티에 싸구려 옷과 허름한 마차를 타고 가는 희생을 했지만, 불행하게도—!”
“클레아스…….”
“그래서 로르아 공작가의 가보를 가져갔는데도 각성석을 받아오지 못한 거잖아. 안 그래?!”
클레아스의 고함에 미카린은 허둥지둥 변명했다.
“이, 일은 잘 풀리고 있었는데, 화, 황비는 분명히 내 선물을 제일 마음에 들어 했거든요. 그런데 황태후가 갑자기 언니에게…….”
“그래, 그 얘기가 안 나오나 했어. 세상 모든 일은 니케아르샤의 탓인데. 그렇지?”
“저, 정말 뭔가 이상했어요. 황태후가 들어온 타이밍도 그렇구, 언니가 뭔가 꾸민 것처럼—.”
“넌 니케아르샤가 나오지 않으면 대화가 성립하지 않는 거냐?!”
이렇게까지 이성을 잃은 클레아스는 처음 본다.
평소엔 아무리 화가 나도, 눈물을 뚝뚝 흘리면 얘기 정도는 들어줬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시간을 두고 만날 걸.’
제 입으로 오늘 일을 설명해야 화를 덜 낼 것 같아서, 부리나케 달려왔건만.
클레아스는 이미 새벽 다과회에서의 일을 전해 들은 상태였고, 술까지 마시고 있었다.
“제발 얘기 좀 들어줘요. 나, 나도 노력했어요. 알잖아요.”
“…….”
“루크반 님에게서 내가 어떻게 가보인 ‘보르샤’를 가져왔는지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