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Who Accidentally Stole Their Hearts RAW novel - Chapter (50)
악녀인데 하트 받아버렸다 50화(50/177)
* * *
델로시프 저택.
서재 책상에 앉아 있던 난 팔짱을 꼈다.
그리고 아까부터 씨름 중이던 편지지를 노려봤다.
“……응, 포기하자.”
이스칼리온에게 편지를 보내려던 시도는 이렇게 실패였다.
‘뭘 써야 하는지 모르겠는걸.’
우리 전서구는 이스칼리온이 있는 곳까지 가도록 교육받지 않았다.
그리고 통신석은 국외로 통하지 않는다.
즉, 우편국을 통해야 하는데 우편국에서 유출될 가능성도 있으니, 민감한 정보는 쓸 수 없었다.
그러니까 1) 일상적인 얘기를, 2) 들켜도 상관없을 어투로, 3) 사이가 유난히 좋아 보이지 않게 써야 하는데…….
“학술원 시험도 이것보단 어렵지 않았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편지지를 들었다.
쓰레기통에 버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책상에 놓여 있는 엽서를 보고 손이 멈칫했다.
이스칼리온이 향수와 함께 보낸 것이었다.
이름만 달랑 적힌 엽서엔 말린 꽃 하나가 붙어 있었다.
처음 보는 거라 사전을 찾아봤더니 ‘베로티스’라는 꽃이었다.
꽃말은 안정과 그리움이었다.
그러니까 이 엽서를 해석하면…….
“나는 해외에서 안정적이다. 모국 음식이 그립다.”
이쯤으로 된다.
“확실히 해외에 나가면 우리나라 음식이 그립지…….”
고개를 끄덕이는데 옆에서 “하아….”하는 한숨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레널드가 서 있었다.
“언제 왔어?”
“5분쯤 전에 문이 열려 있기에 두드린 후 대기하고 있었지요. 그보다 그 엽서는 그런 뜻이 아닌 것 같은데요.”
“맞는 것 같은데.”
“베로티스의 꽃말은 안정과 그리움 아닙니까.”
“응, 그러니까 안정적으로 지낸다는 거잖아. 하지만 모국 음식이 그립다고.”
“대체 음식은 어디에서 나온 겁니까.”
나는 엽서와 함께 온 향수를 들어 보였다.
“향수 이름이 ‘달콤한 산미(밀페샤)’야. 맛 이야기니까 당연히 음식 이야기지.”
“절대 아니에요.”
레널드가 단호하게 말했다.
“‘밀폐샤’는 우리나라 말로는 ‘달콤한 산미’지만, 에센다국에서는 수도의 이름입니다.”
“음, 학술원에서 배웠던 거 같기도 하고.”
“그러니 엽서의 뜻은 ‘나는 잘 지낸다. 네가 보고 싶다. 너에게 내가 지내는 곳의 향기를 전한다.’ 정도가 되겠지요.”
“……뭐야.”
왠지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편지 스킬이 엄청나게 높아. 바람둥이인가?”
나는 괜히 투덜거리며 향수 분무구의 캡을 벗겼다.
‘이런 향이 나는 데서 지내고 있구나.’
향을 음미하는데, 레널드가 히죽히죽 웃으며 날 바라보았다.
나는 탁, 소리 나게 향수를 내려놓았다.
“근데 네 해석이 맞다는 보장도 없잖아?”
“아마 맞을 텐데요?”
“향 맡아 봐.”
“달콤하네요.”
“맛있는 냄새잖아. 달콤하면서도 새콤한.”
“네…….”
“역시 ‘달콤한 산미’로 해석할 수밖에 없어. 우리나라 사람이 보냈으니 우리나라 말로 해석하는 게 맞고.”
“…….”
“또, 상황적 판단으로도 그래. 해외 나가면 밥이 젤 먼저 생각나잖아. 역시 내 해석이 더 논리적이야.”
“…….”
어쩐지 레널드가 나를 흐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엽서와 향수를 서랍에 넣었다.
‘돌아오면 같이 맛집이나 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레널드에게 물었다.
“그래서, 보고는?”
“상단의 진행 사항은 여기까지고, 다음은 각지에 풀어놓은 정보원들로부터의 소식입니다.”
난 레널드가 건넨 보고서를 빠르게 훑어내렸다.
“라파엘이 귀국했다고?”
“그렇습니다.”
“바람둥이 얘기를 했다고, 진짜 바람둥이가 등장했네.”
“불륜파이브 중 가장 이성 소문이 많은 사람이죠.”
내 과거를 알게 된 후 레널드도 그들을 불륜파이브라고 부르며 질색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대부분의 소문이 사실이고.”
“여배우와 여배우의 이복동생, 이복동생의 절친한 친구, 그 이웃, 이웃의 이모와 한 번에 만났단 것도 사실입니까?!”
“아, 그런 일도 있었지.”
“그 정도면 재능이로군요. 혹시 이성 관계 재능이 A가 아닐까요.”
“예비 권능자니까 재능이 없을걸.”
“예?”
“권능자들은 권능만 보이거든. 반면에 권능이 없는 사람들에겐 재능이 있고.”
“그렇군요…….”
“그리고 만약 재능이 있다고 한다면 이성 관계가 아니라 눈치가 엄청난 걸 거야.”
“눈치요?”
“율리시즈 때와는 다르게, 여자 여럿과 한 번에 사귀어도 절대 분란이 안 났거든.”
그가 사귄 여자들은 다른 여자의 존재를 알고도 라파엘과 연인 관계가 되었다.
그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여자를 잘 알아차렸다는 거지.
“대단한 눈치로군요…….”
“그래서 불륜파이브 중에 제일 까다로운 상대야.”
여러모로.
친화력이 높아서 누구와도 금세 친해지는 점도 그랬다.
인맥 관리도 엄청나게 잘하고.
그가 쓰레기 짓을 해도 ‘본성은 그렇게 나쁜 놈이 아니야’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제일 무섭거든.”
“이런, 하필 그 무서운 남자가 강제 각성 사업에 엮였군요.”
클레아스의 강제 각성 사업.
여기에서 그 소식이 또 나올 줄이야.
“라파엘도 엮여 있단 말야?”
“정보통에 의하면 사업 초창기부터 클레아스 오르센과 함께 투자자들을 만났던 모양입니다. 유학 중에도 타국의 권세가들과 자주 회동하였구요. 다들 각성에 관심 깊은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럼 클레아스와 라파엘이 강제 각성 사업의 원년 멤버란 뜻이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라파엘은 여러모로 수완가였다.
“클레아스를 몰아붙이기 딱 좋은 시기였는데, 하필 날개가 돋아난 격이네.”
지난주에 황제가 오르센 후작을 불렀다. 그리고 후작은 아주 어두운 표정으로 궁을 나섰다고 하지.
황제의 닦달이 심해진 것일 터다.
“클레아스 부자가 잔뜩 초조해졌을 테니 슬슬 절벽으로 몰 생각이었는데…….”
“날개를 달고 다시 날아갈 수도 있겠습니다. 이번엔 더 높은 곳으로 말이지요.”
“무슨 뜻이야?”
“라파엘 헤이스가 멜베프 국 사신단의 접대를 맡는다고 합니다. 노예의 인체 실험을 허용하는 나라지요.”
“뭐야?! 하필……!”
멜베프 사신단과 손을 잡으면, 인체 실험의 부담이 사라진다.
그쪽 이름으로 실험실을 차려서 잔뜩 실험하면 될 테니까.
황제도 제국의 일이 아니라면 얼씨구나 좋아할 터.
나는 쯧, 혀를 차고 보고서를 내려놨다.
“클레아스와 라파엘이 그렇게 재미 보도록 둘 순 없지.”
“어찌하시겠습니까?”
“일단 싸움을 좀 붙여볼까. 날개와 몸이 하나가 아니면 날아오를 일도 없을 테니까.”
내가 악랄하게 웃자, 레널드가 “크으.” 하며 탄성을 흘렸다.
“아가씨의 계략…획이 다시 시작되는군요.”
왜 기대하는 거야……?
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 * *
이튿날.
나는 레널드와 함께 파티장으로 향했다.
렐리아 아케이드에 있는 가게에서 열리는 오픈 파티로, 초대장 없이 즐길 수 있는 파티다.
‘평민들이 주 고객인 파티라 귀족들의 사교 파티와는 전혀 다르지.’
레널드가 질린 얼굴로 가게를 쳐다봤다.
“발 디딜 틈이 없군요.”
“라파엘이 돌아왔으니까. 라파엘은 이런 가게를 빌려서 노는 걸 좋아하거든.”
라파엘이 이런 파티를 연다는 소식을 들으면 귀족들까지 달려 나왔다.
사교계의 점잖은 파티에서는 볼 수 없는, 재밌는 게 아주 많다고.
그렇게 평민, 귀족 할 것 없이 섞여 놀며 즐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유난히 사람이 많긴 하네.’
라파엘이 건 이번 주제는 ‘가장 파티’였다.
몬스터로 분장하고 술과 음악을 즐기는 것이다.
파티 첫날부터 엄청난 성황이었다더니, 사흘째인 오늘은 말 그대로 사람이 미어터졌다.
“이러다 라파엘을 못 찾겠는데.”
중얼거렸을 때였다.
“왜 찾는데?”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 쪽으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결 좋은 은발이 내 뺨을 간질였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좀 떨어져 줄래?”
그러자 남자가 씨익 웃으며 얼굴을 치웠다.
“아쉽네. 바로 고개를 돌렸으면 내 뺨에 네 뽀뽀를 받았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찬란하게 빛나는 은발.
깊은 밤과 같은 색의 검은 눈동자.
달콤하게 휘어지는 눈매가 인상적인 나른한 분위기의 미남.
“그런 최악의 경우엔 내 입술을 도려내야 할까, 네 뺨을 도려내야 할까? 라파엘.”
“내 뺨과 네 입술을 계속 붙이고 있는다는 선택지도 있는데. 니케.”
이 남자가 바로 라파엘 헤이스.
헤이스 후작의 아들로, 불륜파이브의 마지막 한 조각이었다.
“네 농담은 항상 재미없어.”
“이런, 실례를. 감히 대공녀를 재미없게 만들다니.”
라파엘이 제 가슴에 손을 얹고 가볍게 허리를 굽혔다.
그리곤 씩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허리 각도가 이게 맞던가?”
“어차피 할 거라면 50도 정도 더 접어서 90도를 맞추지 그랬어.”
“그거 괜찮은 농담인걸. 나중에 써먹게 기억해 둘게.”
“농담으로 보여?”
“흐응, 무릎 꿇을까? 난 니케, 네가 원한다면 여기서 무릎 꿇을 수 있어.”
라파엘이 눈을 휘며 웃었다.
진짜로 무릎 꿇을 기세였다.
‘여전하네.’
키는 조금 더 큰 듯하지만, 여전히 여유롭고 능글맞았다.
나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자. 여긴 너무 시끄러워.”
“대공녀께서 그러시다면 어서 조용한 곳으로 모셔야지. 자, 이쪽으로 오시죠.”
라파엘은 사람들을 요령 좋게 물리며, 길을 안내했다.
그가 데려간 곳은 몇 블록 뒤의 화려한 건물이었다.
헤이스 후작가 소유의 건물로—
‘불륜파이브가 자주 모이던 곳.’
물론 그 사이에는 나도 끼어 있었다.
클레아스와 결혼 전까지는 함께 잘 어울렸으니까.
“그렇게 표정 굳힐 것 없어. 아직 다른 손님들은 없거든.”
그렇게 말한 라파엘이 방문을 열어주었다.
‘흠, ‘아직’은 없다? 그럼 곧 불륜파이브가 방문할 모양인가 보네.’
난 자리에 앉으며 라파엘을 힐끗 쳐다봤다.
“다른 손님이 있으면 왜 내 표정이 굳을 거라고 생각해?”
“미카린과 사이가 별로인 것 같던데? 파티에서 싸운 데다 저택 출입권까지 빼앗았다면서. 그런 얘기를 떠들면 곤란하잖아.”
“여전히 정보가 빠르네.”
양주 진열장에서 술을 고르던 라파엘이 날 돌아보며 빙글 웃었다.
“혹시 아닌 척하고 싶었어? 그럼 다시 대화하자. 내가 ‘그렇게 얼굴 굳힐 것 없어. 아직 애들은 안 모였거든.’부터 시작할게.”
양주를 고른 라파엘이 내 맞은편에 앉아서 짐짓 다정한 척 말했다.
“모두 네가 미카린을 또 괴롭혔다고 하겠지만 난 네 편이야.”
‘안 변했다는 말 취소. 변했어. 더 짜증 나는 쪽으로.’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장난 그만해. 애들은 언제 오는데?”
“율리시즈는 안 올 것 같고, 클레아스와 루크반은 금방 올 거야. 마차가 대기소로 들어갔다고 하니까.”
“미카린은?”
푸핫.
술병의 마개를 열던 라파엘은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애들’에 미카린까지 들어가는 거야?”
“안 불렀어? 귀여워하잖아.”
“귀엽기는 해. 강아지와 고양이가 딱 그만큼 귀엽지.”
미카린의 존재 가치는 애완동물 정도라는 뜻이었다.
조금 의외였다.
‘나한테 이런 말을 할 줄이야. 내 태도가 변해서 그런가?’
회귀 전 이 시기의 나는 미카린이라면 껌뻑 죽었으니까.
라파엘 역시 내게 미카린에 대해 나쁘게 말한 적은 없다.
‘그리고 이렇게 인성 터진 걸 드러내지도 않았어.’
아무래도 달라진 내게는 이 정도 모습을 보여도 상관없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지.
‘흐음, 그렇다면…….’
나는 픽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아, 네 형이 널 귀여워하는 것처럼?”
빙글거리던 라파엘의 미소가 옅어졌다.
“가정사 건드리기 있어? 나도 네 가정사엔 할 말이 많아.”
“내가 요새 오라버니들과 사이가 나쁘지 않다는 얘기까진 못 들었나 봐. 델로시프 정보부는 뚫기 힘들었나 보지.”
“그래서 내 가정사를 참견해보시겠다?”
탕.
술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은 라파엘이 다리를 꼬았다.
사람 좋아 보이던 표정이 한순간에 달라졌다.
아주 오만하게.
‘이게 라파엘 헤이스의 진짜 얼굴이지.’
회귀 전의 난 그걸 지하 감옥에 갇히고서 알았지만.
“오늘은 부디 시간 들이지 말고 빨리 마력을 토해내 줘, 니케. 오랜만에 데이트가 있거든.”
“그으, 시, 끄으으, 싫어…….”
“그 꼴이 되고서도 고집만은 못 버리는 이유가 뭘까. 사람 잔인해지게, 응?”
“아아아아악—!”
누군가 내게 ‘클레아스와 미카린을 제외한 불륜파이브 중 누가 제일 끔찍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라파엘이었다.
날 가둔 건 클레아스였지만, 괴물로 만든 건 라파엘이었으니까.
고문 같던 실험의 총책임자도 그였다.
“미카린과 무슨 일이 있을 거라곤 짐작했어. 파티장에선 대놓고 부딪쳤다고 하고, 저택 출입권까지 회수했다기에.”
라파엘은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날 달래는 듯한 어조였다.
순간 빡치긴 했지만, 지하 감옥에서처럼 완전한 본색을 드러내진 않을 모양이다.
“그런데 왜 나한테까지 예민하게 굴어, 니케?”
“네가 클레아스와 미카린의 사이를 알면서도 모른 척했으니까.”
“…….”
“…….”
잠깐 멈칫했던 라파엘은 이내 헛웃음을 흘렸다.
내 옆에 시립해 있던 레널드마저도 놀란 듯 날 쳐다봤다.
이 이야기를 밝힐 줄은 몰랐나 보다.
‘나도 이렇게 곧바로 얘기할 생각까진 없었어.’
라파엘이 수상하게 여기면 그때 쓰자고 생각했다.
……오늘 여기서 <흥신소>로 라파엘의 정보를 보기 전까지는.
– 이름: 라파엘 헤이스
– 인간 관계: 클레아스(동업자), 헬레니아(인맥), 니케아르샤(관찰대상), 미카린(장난감, 정보원)… 레나(정보원), 자히드(정보원), 마센(정보원)
라파엘의 정보는 지금 힘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등급이 높아서 조사할 수 없다는 알림이 떴다.
해서, ♥를 쏟아부어서 일정 정보만을 일회성으로 열람한 것이다.
‘권능을 보려고 했지만, 그쪽은 완전히 실패.’
아무래도 등급과 권능이 같이 따라오니 그런 것 같았다.
‘♥를 많이 쓰면 조금이라도 조사할 수 있을까 싶어서 해봤는데, 통해서 다행이야.’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정보를 열람하는 건 웬만하면 피하고 싶었다.
‘인간 관계 하나 보는 데에 ♥가 10개나 들다니.’
그래도 지금은 정보를 확인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보원이 끝도 없이 많잖아.’
익숙한 이름도 있었다.
지금까지 만난 귀족 영애, 황궁 시녀, 심지어는…….
‘우리 저택의 사무관과 미카린까지.’
거기다 미카린 옆엔 정보원 외에 다른 말도 붙어 있었다.
장난감
라파엘의 장난감이라니.
뭔지 빤하다.
‘우웩.’
벌써부터 둘이 그런 관계가 된 거야?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게 가장 놀라웠다.
진짜 대단한 불륜 칙칙폭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