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Who Accidentally Stole Their Hearts RAW novel - Chapter (62)
악녀인데 하트 받아버렸다 62화(62/177)
“……렇게 꽃을 준비하시고 정성이 갸륵하십…….”
“……차를 손수 건네신…….”
“전하가 부럽…….”
가신들이 껄껄 웃으며 무어라 말했지만 머리에 닿지 않았다.
나는 한참을 창에 비친 내 모습만 바라보았다.
‘그래, 못난 딸이어도 이렇게 어머니와 닮았으니.’
어머니는 아버지의 각성자셨다.
하나뿐인 반려이자 각성자.
아버지에겐 그 어떤 것보다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
내 모습이 꼭 어머니의 편린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누그러지신 건지도 모른다.
‘그래……. 어쩌면 이것이 내 쓸모일지도 모르겠어.’
아버지에게 어머니와의 추억을 되살려주는 쓸모.
공명의 고통은 갈수록 심해진다더니, 그 말대로였다.
지금도 폐부를 후벼 파는 것 같은 통증이 있었다.
까딱 긴장을 놓치면 끓는 숨이 터져 나올 것 같다.
하지만.
‘아버지께 쓸모 있는 딸이 되는 건데 고작 이 정도 고통이면 싼값이지.’
내가 살아남으려면 아버지의 협력이 필요하다.
미카린은 역대급 각성자가 되어 화려하게 귀환할 것이다.
여기에 델로시프 대공가까지 미카린의 날개가 되어주면 걷잡을 수 없다.
‘그만큼 내 죽음도 가까워지겠지.’
하지만 이렇게 아버지께 가치가 생겼다.
여기에 비록 가짜지만 각성자로서도 가문에 도움이 된다면…….
회귀 전처럼 돌아올 곳조차 없는 신세가 되지 않을 거다.
적어도.
‘나를 지우고 미카린을 딸로 들이시진 않을 거야.’
“기다려. 내가 돌아갈 때까지.”
“넌 멍청하지 않으니까 또 공명하지 않을 거라 믿는다.”
미안, 세르카엘.
하지만 나, 드디어 이 집에서 내 쓸모를 찾은 것 같아.
그러니까 어쩔 수 없어.
내가 살아남으려면.
* * *
내 머리색과 눈 색으로 돌아오기 전에 아버지의 집무실에서 나왔다.
방으로 돌아와 거울을 보니 다시 원래 내 모습이었다.
‘너무해요, 엄마. 나도 엄마 모습 추억하고 싶은데. 조금만 더 그대로 있어 주지.’
어머니가 내 외모를 바꿔놓은 건 아니지만, 아쉬움에 괜히 투정 같은 생각이 들었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는데도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앨리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가씨, 안색이 너무 파리해요.”
“어제 잠을 설쳐서 그런가 봐. 나 잠 좀 잘게.”
“자기 전에 꿀을 듬뿍 탄 따뜻한 우유라도 마시고 주무셔요.”
“저녁 식사 전에는 꼭 깨워줘. 아버지랑 식사하기로 했거든.”
앨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도요?”
“응.”
“와! 너무 잘됐네요, 대공 전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잘됐지. 왜 아버지가 잘됐어?”
“그야 대공 전하께서 아가씨랑 함께 식사하고 싶어 하셨으니까요. 당연하잖아요?”
틀렸어.
앨리스는 날 너무 좋아해서 기준이 이상하다.
나는 대충 손을 휘젓고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 * *
앨리스는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나를 깨웠다.
“아가씨, 그냥 식사는 따로 하시고 좀 더 쉬시는 게 좋겠어요.”
“아니야. 밥 먹어야 힘이 나잖아. 어서 준비해 줘.”
앨리스는 걱정하면서도 충실하게 시중을 들었다.
“혈색이 잘 돌게 해줘. 창백하지 않게.”
“……알겠어요.”
“참, 내 서재에서 포푸리 좀 가져다줄래?”
“네.”
앨리스가 방에서 나가자마자 나는 어머니의 영혼석에 다가갔다.
가까이서 에너지의 파동을 느끼니 숨이 콱 끊길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
“으… 흑…….”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았다.
이렇게 딱 연결되는 순간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도저히 서 있을 수 없어서 몸이 픽 내려앉았다.
책상을 짚은 손에 핏줄이 잔뜩 서서 파들파들 떨렸다.
“하아, 하아, 하아…….”
얼마 지나자 꽤 견딜 만해졌다.
사랑스러운 분홍빛 머리카락이 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거울을 보자 눈동자도 어머니처럼 품위 있는 사파이어 빛으로 변했다.
‘……좋아.’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때마침 앨리스가 포푸리를 가져왔다.
받아 들고 그대로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는 아버지가 먼저 와 계셨다.
“아버지.”
“그래.”
나는 상석에 앉은 아버지의 옆에 앉았다.
제르노와 아카인은 외출해서 식사는 아버지와 나 단둘이서 하게 되었다.
곧 음식이 서빙되기 시작했다.
‘……어제는 맛이라도 느껴졌는데.’
오늘은 맛도 안 느껴진다.
아무래도 몸 상태가 더 안 좋아서 그런 듯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식사 속도에 맞춰 음식을 입안에 넣는 것쯤은 쉽게 할 수 있었다.
간간히 미소 짓고, 맛있다며 감탄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윽고 메인디쉬인 스테이크가 나왔다.
“저 오늘 아빠에게 스테이크를 먹여드렸어요. 아~ 해보시라 하고. 진짜 딸 같죠?”
미카린이 플레에게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버지가 귀환하신 날의 저녁 만찬.
나는 차마 아버지께 스테이크를 드셔보시라고 내밀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머니와 닮은 딸을 원하시니 해도 미움 받지 않을 수 있어.’
꽉.
포크와 나이프를 쥔 손에 힘이 바투 들어갔다.
‘해보자.’
결심한 순간.
“왜 먹지 않고 바라만 보고 있지?”
서늘한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아버지가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입맛이 없는 건가. 안색도 안 좋은데.”
“아, 아니요. 맛있게 먹고 있는걸요.”
생긋 웃자 아버지가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그 작은 소리가 꼭 천둥 같았다.
포크를 쥔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너무 과한 것을 기대했—’
그 순간.
달칵, 작은 소리와 함께 내 앞에 접시가 놓였다.
“……?”
접시 위의 스테이크는 정갈하게 썰려 있었다.
아버지가 스테이크를 전부 다 썰어 내게 밀어준 것이다.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입맛이 없어도 챙겨 먹도록 해라.”
아버지는 아무렇지 않게 내 접시를 가져가며 말씀하셨다.
“네가 좋아하는 고기 아니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알고…….”
“……?”
“아무것도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인사한 후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삼킨 질문이 도로 새어 나올 것 같아서.
‘알고 계셨어요? 제가 고기 좋아하는 거.’
단 한 번도 말한 적 없는데.
그런 거, 관심 없으신 줄 알았는데.
“…….”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스테이크를 먹었다.
딱 먹기 좋게 썰린 스테이크가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맛있어.’
쿵쿵쿵 울렁거리며 심장을 짓누르는 아픔도.
배 속을 칼날로 도려내는 것 같은 통증도.
메슥거리게 머리를 휘젓는 고통도.
그 모든 것이 잊혀질 만큼.
‘정말 맛있다.’
나는 스테이크 접시를 깨끗이 비우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어머니와 더 닮게 태어났다면 좋았을 텐데.’
* * *
그날 이후부터 니케아르샤는 직접 아버지께 허브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가신들은 니케아르샤를 굉장히 기특해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따님을 두시다니. 부럽습니다, 대공 전하.”
“제 딸아이는 요즘 용돈 줄 때만 아는 척하는데. 딸에게 사랑받는 비결이 뭡니까?”
아버지에게 쓸모를 어필해 주는 건 무척 고마웠다.
니케아르샤는 인사를 하고 집무실을 나왔다.
그때였다.
“뭐야, 또 아버지 집무실에서 나와?”
불퉁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아카인이 못마땅한 얼굴로 서 있었다.
하지만 눈이 마주치자 표정을 풀더니, 갑자기 목을 스트레칭하기 시작했다.
“아~ 피곤하다. 으음~ 목이 당기네.”
“……?”
“하아, 요즘 잠도 잘 못 자고, 영 뻐근한 게…….”
“그만해라, 아카인.”
곁에 있던 제르노가 한마디했다.
그리곤 니케아르샤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
“…….”
“……오라버니?”
“……푸리.”
“네?”
“……향이 좋구나.”
니케아르샤는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꽃꽂이하면서 향이 배었나 봐요.”
“……그렇군.”
제르노는 여전히 엄청난 시선으로 니케아르샤를 바라보았다.
압박감이 굉장했다.
“더 할 말 있으세요?”
“……아니.”
“그럼 전 이만.”
니케아르샤는 고개를 끄덕이고 두 사람을 지나쳤다.
제르노의 시선이 막냇동생의 뒤로 길게 따라붙었다.
그 모습을 본 바렌토 자작(제르노의 측근)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시선이 가시는 모양입니다.”
“그래.”
“하기야 저리 비 전하와 닮았으니…….”
“무슨 소리지?”
제르노가 미간을 찌푸렸다.
바렌토 자작이 의아하게 물었다.
“비 전하와 닮아서 눈길이 간다는 말씀 아니었습니까.”
“평소와 달라서 본 거다.”
그 말에 바렌토 자작의 얼굴이 더 아리송해졌다.
“그야…… 외양이 변했으니 평소와 다른 것 아닙니까.”
“형님의 말은 그게 아니잖아. 애가 기운 없으니까 신경 쓰인다는 뜻이지.”
아카인의 말에 가신들이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아가씨께서 기운 없어 보이진 않았는데…….”
“예, 혈색도 좋고 목소리에도 힘이 있었지요.”
“오히려 평소보다 활기차 보이셨는데요.”
그러나 두 형제의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무슨 소리야. 애 상태가 이상한데.”
“저번에 니케가 쓰러졌을 때 몸에 아무 이상 없다고 했지.”
제르노의 말에 바렌토 자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연구원들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 확실한 건 모르지만, 일단 니케 아가씨께서도 불편한 곳 없다 하셨습니다.”
“그 뒤로 쓰러지거나 한 적도 없고.”
“예.”
안심할 만한 말이었는데 제르노의 얼굴은 더 심각해졌다.
아카인이 옆에서 턱 팔짱을 꼈다.
“저 녀석, 뭔가 숨기고 있는 거 같은데?”
“아무래도.”
“이럴 게 아니야. 당장 가서—”
“자, 잠시만요, 도련님!”
바렌토 자작이 흥분한 아카인을 막아섰다.
“왜! 애가 이상하게 구는데 뭔지 알아내야지!”
“그, 일단 가서 뭐라 하실 건데요?”
“뭘 숨기냐고 캐물어야지!”
가신들이 아카인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제르노가 한숨을 쉬었다.
“괜히 막내 속 긁지 마라. 진짜 화병 나는 수가 있으니.”
“예, 솔직히 아카인 도련님이 화를 달래는 재주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 그러니 내가 가서—”
“소공작님께서도요.”
“나는 아카인과 다르다.”
“……두 분 다 아가씨의 화를 풀어보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
“…….”
제르노와 아카인 모두 입을 다물었다.
바렌토 자작은 짜릿함을 느꼈다.
길들여지지 않는 맹수 같은 두 남자가 일시에 조용해지다니.
‘대단하십니다, 막내 아가씨!’
바렌토 자작이 보기에 니케아르샤의 상태는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른 가신들이 말했듯 참 건강해 보였고, 아버지와의 사이도 좋아진 덕분인지 활력이 넘치는 것 같았다.
‘괜히 형제들이 숨기는 거 없냐며 참견했다간 기껏 좋아진 가족 관계가 무너질 수 있어.’
제르노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두기엔 불안해.”
“맞아. 애 상태가 진짜 이상하다고.”
“괜히 숙녀의 비밀을 캐려고 했다간 사이가 나빠질 수 있습니다.”
“……진짜?”
“아가씨 나이면 특히 더 그렇죠.”
“…….”
“괜히 이거저거 캐묻다가 미움받은 오빠가 한둘이 아닙니다.”
“…….”
“…….”
두 형제가 다시 조용해졌다.
바렌토 자작에겐 여동생이 있었다.
그리고 인정하기 싫지만, 자신들과 니케보다는 훨씬 사이가 좋았다.
무려 아침저녁으로 인사를 한다고 들었다.
솔직히…….
‘부러워.’
‘부럽군.’
자신들이 인사하러 가면 니케아르샤는 뭐 잘못 먹었냐는 표정으로 쳐다볼 텐데.
아카인이 “크흠.” 하고 헛기침했다.
“그럼 인사는.”
“예?”
“아침저녁으로 인사하는 건…… 괜찮아? 미움받는 일 아니야?”
바렌토 자작은 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참았다.
“해보시죠. 그건 좋아하실 겁니다.”
“뭐, 걔가 좋아한다니까 어쩔 수 없군. 인사해 주는 수밖에.”
아카인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가만히 있던 제르노가 바렌토 자작에게 물었다.
“그럼 받을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