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Who Accidentally Stole Their Hearts RAW novel - Chapter (63)
악녀인데 하트 받아버렸다 63화(63/177)
“예?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아무것도 아니다.”
제르노가 몸을 돌렸다.
어쩐지 그의 뒷모습이 시무룩해 보였다.
* * *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제르노와 아카인을 바라보았다.
“식사는 했나?”
“챙겨 먹어라. 아사하기 싫으면.”
요즘 두 사람은 정말 이상했다.
아침저녁으로 와서 생존 확인을 하더니, 이제는 틈만 나면 얼굴을 비춘다.
“……이미 먹었어. 그보다 두 사람 외출해야 하지 않아? 낮에 일 있다며.”
그러자 아카인이 죽을병 걸린 것 같은 표정을 했다.
감동받은 표정을 했다는 뜻이다.
“이젠 바쁘지 않냐며 날 챙기기까지…….”
“안 가도 된다.”
제르노가 아카인을 뒤로 치우며 말했다.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왜 안 가요. 일 있다면서.”
“…….”
“괜히 땡땡이치다 나중에 피 보지 말고 가세요.”
아카인이 “이제 내가 피 볼까 걱정까지…….” 하는 걸 무시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진짜로 생존 확인은 아닐 테고……. 내가 좀 신경 쓰이나?’
지금은 원래의 내 모습이지만, 요즘 어머니와 닮은 모습으로 많이 다니니까.
두 사람이 다정해진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오라버니들도 어머니를 무척 그리워하니까.’
회귀 전, 어머니의 영혼석에 금이 갔을 때를 생각하면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번에 어머니의 영혼석을 포기하고 날 구하려 한 게 의외일 정도로.
‘……딱히 오라버니들을 위해 이 모습을 하는 건 아니지만.’
이왕 변한 김에 보는 것 정도는 허락해 줘도 괜찮을 것 같다.
‘나한테 자주 오는 이유가 혹시 어머니랑 닮은 모습을 하고 있나 기대해서인 것 같으니까.’
안타깝게도 지금은 타이밍이 안 맞았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어머니의 영혼석 가까이 다가갔다.
영혼석의 파동에 집중하자 뇌가 진탕되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그리고.
“커헉……!”
후두둑, 입에서 새빨간 핏방울이 떨어졌다.
온몸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
더운 숨을 내쉬자 “끄으….” 피거품이 끓어올랐다.
[공명하면 할수록 더 심해질 거다. 더 아프고 괴로워질 거라고.]흐릿한 머릿속에 세르카엘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확실히 그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나만 참으면 돼.’
그러면 아버지도, 오라버니들도 행복하다.
어머니의 영혼석도 안전해진다.
무엇보다 이건 희생도 아니다.
그러니 딱히 참는 것도 아니다.
다 내가 필요해서 하는 거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괜찮아. 정말로 괜찮아. 난 괜찮아.’
웅크린 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뇌었다.
조금 지나자 정말로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
나는 손수건으로 핏방울을 닦아 없애고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화장 좀 해줘. 생기 넘치게.”
* * *
단장을 마친 후, 나는 회의실로 향했다.
곧 아버지의 오후 회의가 끝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회의실이 있는 복도에 접어들 때쯤 딱 문이 열렸다.
아버지가 날 보고 성큼성큼 다가오셨다.
“아버지.”
“그래.”
“집무실로 가실 거죠? 같이 가요. 가서 새로 차를 우려드릴게요.”
“음.”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 가신들이 엄청나게 흐뭇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린첼 자작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산책이라도 하시죠. 요즘 일이 너무 많아서 집무실과 회의실만 오가지 않으셨습니까.”
“그럴 시간이 어딨나.”
“에이, 건강을 위해서라도 잠깐 걸으시는 게 좋습니다. 아가씨와 다녀오시죠.”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를 도와주려는 건 좋지만, 그런다고 아버지께서 산책 가실 리가 없는데.’
그런데 아버지가 힐끗 나를 보더니 말했다.
“가지, 산책.”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 나랑 산책을 가신다고?
.
.
‘정말이잖아.’
나는 온갖 꽃이 아름답게 만발한 정원을 걷고 있었다.
아버지와.
‘역시 내가 찾은 쓸모가 정답이었어.’
여기에 각성자 행세까지 잘 해내면 미카린이 와도 괜찮을지도.
여러모로 쓸모 있는 딸이 되는 거니까.
나는 힐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당연히 꽃에는 관심도 없으셨다.
나는 최선을 다해 걸었다.
천천히 걷고 있는데도 자꾸만 숨이 차오르려고 했다.
그래도 겉으론 티 하나 나지 않았다.
‘하지만…… 더 걷는 건 무리일 지도.’
그렇게 생각한 순간.
아버지가 가제보에 앉았다.
긴 다리를 그림처럼 꼬고.
“아버지?”
“좀 앉았다 가지.”
“네…….”
타이밍이 좋았다.
나는 냉큼 자리에 앉았다.
그것만으로 한결 나았다.
‘햇빛이 없으면 더 좋겠지만.’
날이 참 좋은데 몸 상태가 안 좋은 탓에 햇볕이 따갑다 못해 아팠다.
그때,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서둘러 따라 일어서려는데 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앉아 있어라.”
“네? 네.”
아버지가 멀찍이 있는 하인에게 명했다.
“마실 걸 가져와라.”
“네, 전하.”
하인이 서둘러 아이스티를 가져왔다.
쭉 들이키자 저절로 “하아—” 한숨이 나왔다.
‘좀 살 것 같다.’
아버지가 날 보더니 말했다.
“저녁엔 외출한다고.”
“네.”
“무슨 일로.”
“아, 쇼핑 좀 하려고요.”
사실은 이스칼리온을 만나러 가는 거다.
‘드디어 돌아왔다는 말을 들었으니까.’
이스칼리온은 그동안 에센다에 친선 대사로 가 있었다.
아버지가 날 빤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너무 사치 부릴까 염려되시는 거면—”
“그게 아니라.”
아버지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움찔 어깨를 좁혔다.
아버지는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그러고 보니 커프스 링크가 필요한데.”
“……?”
“잉크가 떨어진 것 같기도 하고.”
‘윌터가 제대로 일을 안 하나?’
커프스 링크는 1년 내내 다 다른 걸 착용하셔도 될 정도로 많을 테고.
잉크도 떨어질 리가 없는데.
나는 잠시 아버지의 의중을 고민하다 여쭸다.
“제가 사 올까요?”
“…….”
아버지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됐다.”
“……?”
아버지가 걸음을 옮겼다.
햇볕이 내 위로 쏟아졌다.
하인에게 음료를 명한 후로도 아버지가 계속 서 계신 덕에 그늘이 생겼었는데.
‘우연히도 위치가 딱 좋았어.’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늘 아래서 음료를 마시며 쉬어서 다시 걸을 힘이 났다.
먼저 걸음을 옮겼던 아버지를 어느새 따라잡을 정도로.
아버지는 의외로 걸음이 느리셨다.
* * *
저녁.
나는 이스칼리온의 살롱에 가기 전에 먼저 렐리아 아케이드로 향했다.
‘커프스 링크랑 잉크를 사야지.’
아버지는 됐다고 하셨지만, 이럴 때 진짜로 안 사 가면 안 되지.
선물 포장까지 야무지게 했다.
‘좋아, 이제 이스칼리온에게 가면 돼.’
공명을 하지 않은 상태라 그런지 확실히 몸이 가뿐했다.
쇼핑을 하고도 뻗지 않을 정도로.
나는 살롱의 숨겨진 층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이스칼리온이 창을 등진 채 서 있었다.
‘아…….’
노랑과 주홍의 사이의 햇볕이 그의 윤곽을 채색했다.
큰 키와 넓은 어깨.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
아주 시린 빛을 띠고 있지만, 사실은 아주 다정한 눈.
나를 본 그의 입꼬리가 보기 좋게 올라갔다.
“나도 내가 잘생긴 건 알아.”
장난스럽게 울리는 낮은 목소리.
왠지 목덜미가 쭈뼛 섰다.
“……그냥 본 거예요. 간만이니까.”
“반가워서 선물까지 챙겨 와 놓고.”
선물?
나는 눈을 끔뻑이다가 깨달았다.
“아, 이건 아버지께 드릴 거예요.”
“……델로시프 대공이 제도로 귀환했다는 소식은 들었지. 하지만 며칠 되었을 텐데.”
“커프스 링크랑 잉크가 필요하다고 하셔서요.”
“……델로시프 대공가는 그런 것도 없나?”
왜 갑자기 시비래.
나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테이블 위에 조그마한 상자를 발견했다.
누가 봐도 여성용 선물인.
‘설마 갑자기 시비 건 이유가……?’
나는 힐끔 상자를 바라보고 물었다.
“혹시 제 선물이에요?”
“아니야.”
“그럼 누구 줄 건데요?”
“……있어.”
“있는데 누구요?”
“할—”
“설마 신시아는 아니겠죠?”
이스칼리온이 입을 다물었다.
짧은 침묵 후, 그가 말했다.
“……있어. 눈치 빠르면서 눈치 없는 여자.”
“뭐예요, 그게.”
나는 픽 웃으며 그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너, 뭐야.”
이스칼리온이 인상을 확 찌푸리며 내 팔을 잡았다.
나는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좀 놀렸다고 이렇게까지 화낸다고?’
그가 짓씹듯 말했다.
“열 있잖아.”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조금 당황했다.
놀려서 화를 낸 게 아니었다.
“왜 그렇게 보지? 내가 널 걱정하는 게 이상해?”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런 말 처음 들어보는 거 같아서.”
“뭐?”
“너무너무 걱정이 돼서 화가 난다. 그런 말이요. 들어본 적 없거든요.”
내가 걱정되어서.
왠지 입매가 자꾸만 흐물거렸다.
“열은 무슨……. 쌩쌩해요.”
오히려 공명했을 때보다 훨씬 몸 상태가 좋다.
하지만 이스칼리온의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다.
“하나도 안 쌩쌩해. 너 열 있어.”
“없다니까요. 내 몸은 내가 더 잘 알아요. 그것보다—”
콩.
이마에 무언가가 부딪쳤다.
내 눈이 휘둥그레 벌어졌다.
코앞에 이스칼리온의 얼굴이 있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 코앞에.
그가 속삭였다.
“역시 뜨겁잖아.”
나와 이마를 맞댄 채.
* * *
이스칼리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이상했어.’
니케아르샤는 아무렇지 않게 웃고 이야기하지만 평소와 확연히 달랐다.
맞닿은 이마가 뜨끈뜨끈했다.
열 때문인지 숨결이 색색거렸다.
그럴 때마다 더운 숨이 입술을 간지럽혀서—
멈칫.
이스칼리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숨결이 닿는다고……?’
시선을 드니 바로 앞에 니케아르샤의 얼굴이 보였다.
5월의 장미 같은 붉은 눈동자가 놀란 토끼처럼 커다랗게 뜨여 있었다.
발그스름한 얼굴에 유독 붉은 입술.
“……!”
휙, 이스칼리온이 재빨리 몸을 뒤로 물렸다.
그 서슬에 니케아르샤가 휘청거려서 서둘러 잡아주었다.
급히 물러난 게 무색하게도 거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아무튼.”
이스칼리온은 니케아르샤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다른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축한 손을 떼지는 않고.
“공녀는 좀 쉬어야 해.”
대답은 듣지 않겠다는 듯 이스칼리온이 걸음을 옮겼다.
딸려 오는 가녀린 몸은 무게가 있나 싶을 정도로 가벼웠다.
진짜 제대로 있는 게 맞나 싶어 확인했다.
다행히 니케아르샤가 솜인형으로 변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건 그거대로 문제였다.
‘솜인형으로 안 변했는데 이렇게 가볍다고?’
아무래도 좀 잘 먹여야 할 것 같았다.
“아픈 거 가리려고 화장을 짙게 한 건가? 평소에는 아예 안 하고 다니면서.”
“……화장 짙은지 아닌지 알아보는 남자는 조심하랬는데.”
“누가.”
“셀레나가.”
이스칼리온은 니케아르샤의 옆에 찰싹 붙어 다니던 영애를 떠올렸다.
얼굴을 흐릿했지만, 베스릴 가의 여식이라는 건 안다.
저런 말을 한 걸 보니 꽤 똑똑한 것 같았다.
확실히 니케아르샤는 조심을 할 필요가 있었다.
“조심은 해.”
“…….”
“멀리는 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