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Who Accidentally Stole Their Hearts RAW novel - Chapter (65)
악녀인데 하트 받아버렸다 65화(65/177)
“눈매가 비전하보다는 대공 전하를 빼닮아 저렇게 비슷할 줄은 몰랐습니다만.”
“딸은 딸이라는 거겠죠. 대공 전하의 마음이 움직일 만도 하군요.”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모습이라면 이해가 된다.
반려이자 각성자인 아내를 꼭 닮은 딸이라면.
델로시프 대공은 절대로 자식의 사소한 선물에 마음이 동할 인사가 아니니까.
* * *
이스칼리온과 만난 후로 며칠.
나는 꽤 뿌듯한 기분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와 많이 가까워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역시 커프스 링크와 잉크를 사 오는 게 정답이었어.’
됐다고 하셨지만, 역시 사 오라는 뜻이었다.
앞으로 눈치 잘 봐야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방 안으로 들어왔는데.
‘어라?’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멈칫했다.
‘왜 벌써 은발로 돌아왔지?’
어머니의 분홍 머리카락도, 그렇다고 아버지 같은 순은의 은발도 아닌— 두 분의 색이 어정쩡하게 뒤섞인 은발.
눈동자도 점점 붉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직 돌아올 시간이 한 시간도 넘게 남았는데.
‘……아, 공명이 약해지고 있구나.’
이 변화는 유한하다.
어머니의 영혼석에 담긴 내 마력이 전부 내게 돌아오면 더 이상 공명할 수 없으니까.
‘요 며칠 평소보다 더 자주 공명했으니 마력이 많이 넘어왔겠지.’
이스칼리온을 만나고 몸 상태가 좋아져서 더 자주 공명할 수 있었다.
‘너무 남발한 바람에 기껏 좋아졌던 몸 상태가 최악이 되었지만.’
이젠 각혈하지 않고서는 공명하지도 못했다.
‘잘됐지. 어머니의 영혼석이 그만큼 안전해진 거니까.’
다만 문제는…….
‘어머니의 머리색과 눈 색으로 변하지 못하면 이제 내 쓸모가 사라질 텐데.’
초조함에 손끝이 차가워졌다.
각성자 행세를 잘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준비를 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일단 오늘 아버지께 해야 할 일은 다 끝났어.’
내일부터는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야겠다.
혹시 도중에 내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도록.
‘어머니 생각을 하다 원래 내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 완전 깰 테니까.’
저녁 식사 시간이 가장 문제인데…….
그런 걱정을 하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헉!”
나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뭐지? 언제 잠들었지?
침대에 누운 기억도 없는데 침대 위였다.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인기척을 느낀 앨리스가 침실로 들어왔다.
“지금 몇 시야?”
“열 시예요, 아가씨.”
“뭐?!”
나는 벌떡 일어났다.
핑— 현기증이 돌았지만,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아버지께서는 지금 오전 업무에 한창이실 텐데.
‘꽃도 못 갈고, 허브티도 못 전해드렸어……!’
“왜 안 깨웠어?”
“몸이 너무 안 좋아 보이셔서요. 아가씨, 좀 더 쉬셔야 해요. 의사한테도 연락하고…….”
“의사는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하, 하지만—”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 앨리스, 부탁이야. 응?”
나는 앨리스의 손을 꼭 잡은 채 부탁했다.
앨리스의 눈이 흔들렸다.
‘앨리스는 정확하게 내 상태를 몰라.’
워낙 눈치 빠른 아이니까 들키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썼다.
각혈하고 닦은 손수건도 다 태워버렸고.
“부탁해……. 모처럼 가문이 평화로워졌는데, 여기서 또 논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아가씨가 아프신 게 논란이라뇨.”
“나 때문에 대공저 분위기가 안 좋아질 테니까.”
앨리스가 꾸욱 입술을 깨물었다.
“……내일도 아프시면 저도 몰라요. 제 주인이신 아가씨의 명을 어기면 안 되지만— 제가 잘리는 한이 있어도 꼭 의사를 데려올 거예요.”
“고마워, 앨리스.”
내일은 내일의 내가 알아서 해주겠지.
‘문제는 아버지 쪽인데……. 하루 정도 거른 건 괜찮을까?’
생각하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윌터입니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윌터가 안으로 들어왔다.
“일어나셨단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
“응. 아버지는 일하는 중이시지?”
“예, 하지만 낮에 시간이 비십니다.”
윌터가 목소리를 낮춰 말해주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정말?”
“예, 오후에 있던 회의가 연기되었습니다.”
“대체 일정은?”
“따로 없어서 아마 집무실에서 다른 일을 하실 것 같습니다만……. 제가 휴식을 권해드릴 예정입니다.”
아침 일과를 빼먹은 걸 만회할 수 있겠구나!
“고마워, 윌터.”
“제 기쁨입니다.”
윌터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 * *
그날 오후.
나는 어머니의 영혼석과 공명한 후, 서둘러 다실로 향했다.
아버지는 이미 다실 안에 계셨다.
나는 호흡을 완벽히 가라앉히고 활기차게 인사했다.
“좋은 오후예요, 아버지.”
차를 마시던 아버지가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왜 왔지?”
서늘한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버지의 휴식을 방해했어요.”
너무 들떴나 봐.
최근 아버지와 꽤 사이가 좋아진 것 같아서 착각했다.
고작 아침 일과를 한 번 거르면 무너질 관계였는데.
아버지가 미간을 찌푸렸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하아, 대체 왜 그렇게 돌아다니냐는 뜻이다.”
“……죄송해요. 돌아다니지 않을게요.”
아무래도 너무 아버지 앞에서 알짱거렸나 보다.
“제가 오만했어요. 그간 아버지께 쓸모가 있는 줄 착각해서……. 함께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뭐?”
“저, 각성자로서는 정말 잘할 수 있어요. 믿어주세요.”
혀끝에서 피 맛이 감돌았다.
각혈 후, 한 번 입안을 헹궜는데도 부족한 모양이다.
나는 가물거리는 시야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눈빛이 흐리멍덩하다고 책잡히면 안 되니까.
아버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대체 무슨 소리냐.”
초조하고 불안해서일까.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다.
쿵쿵, 심장이 관자놀이에서 뛰는 것 같다.
웅웅거리는 귓가에 맑고 애교 넘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가 저를 위해 선물해 주신 곰돌이 인형이에요. 귀엽죠!”
“아빠는 내가 아직도 아기인 줄 아나 봐. 곰인형을 선물하시구.”
치, 하고 볼을 부풀리던 미카린.
눈을 깜빡이자 그 해사한 얼굴이 사라졌다.
대신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입꼬리를 바짝 끌어올렸다.
“멋대로 아버지 앞에 알짱거리지 않을게요. 쥐 죽은 듯 지낼게요.”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아버지 앞에서 헛구역질 따위 할 수 없다.
“아빠도 역시 언니보다 제가 더 사랑스러우신가 봐요. 모든 사람이 그렇지만.”
“저도 놀라긴 했어요. 아무리 그래도 언니는 아빠의 친딸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양딸인 나를 더 예뻐하실까.”
나는 칼로 후벼 파듯 들끓는 속을 가라앉히며 현실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식사도…… 방 안에서만 할게요. 아버지께서 저녁 식사 때마다 절 참아주셨는데, 제가 그것도 몰라봤어요.”
“어쩌면 우린 잘못 태어난 건지도 몰라요. 델로시프 대공가에서 태어나야 했던 건 나, 텔시 남작가에서 태어나야 했던 건 언니.”
“우리가 한날한시에 태어난 이유가 뭐겠어요? 뭔가 바뀌었다는 생각 들지 않아요?”
“난 진짜 각성자고, 언니는 아무것도 되지 못했는데. 내가 아빠의 진짜 딸인 편이 맞겠죠?”
깔깔 웃던 그 애의 웃음소리.
숨이 자꾸만 턱턱 막혔다.
비릿한 쇠 맛이 점점 심해졌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아버지와 미카린이 번갈아보였다.
아버지가 뭐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들리지가 않았다.
삐이이익—
이명이 사이로 들리는 건 오로지 미카린의 목소리뿐이었다.
“제 쓸모를 다할게요. 필요 없는 자식이 아니게, 그러니까—”
내쫓지 말아주세요.
그냥 이 집에 있게 해주세요.
그냥, 그냥—
‘—딸은 저 하나로 만족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제 존재가 만족스럽진 않겠지만.
최대한 노력할 테니까.
열심히 할 테니까.
“니케아르샤.”
이지러진 감각 사이로 아버지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가 깜짝 놀랐다.
‘아, 내 머리카락이…….’
점점 분홍빛이 옅어지고 있었다.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색으로 돌아오려고 했다.
아마 눈동자도 마찬가지일 터.
‘안 돼!’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이면, 아버지가 얼마나 거북하실까.
가뜩이나 내가 쓸모 없다고 생각하셨잖아.
어머니를 제대로 닮지도 못한 가짜라는 생각만 들 거야.
‘가짜 딸.’
“역시 내가 아빠의 진짜 딸이라 이렇게 사랑 받는 거겠죠? 에헤.”
내가 다시 공명해서 오더라도, 원래대로 변하던 모습이 계속 생각이 나겠지.
오히려 엄마 닮은 척을 한다고 불쾌하실 거야.
“죄,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대체 무엇을.”
나는 차마 아버지를 마주 볼 수 없었다.
어떤 눈으로 나를 보고 계실지 몰라서.
엄마와 닮지 않은, 원래의 본모습으로 돌아오는 나를.
“제가…… 이 모양 이 꼴이라서.”
“…….”
“이렇게 태어나서…….”
아버지가 내게 다가오셔서 흠칫 몸을 굳혔다.
“대체 그게 무슨—.”
아버지가 내 어깨를 붙잡는 순간.
후두둑—
“아……?”
코가 뜨겁다 싶더니 핏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나는 재빨리 손등으로 코밑을 문질렀다.
안 그래도 외양이 돌아왔는데 추한 모습을 보일 순 없다.
“니케!”
“아, 별거 아닌— 헉!”
왈칵.
목구멍 울컥하더니 입에서 몽글몽글한 핏덩이가 쏟아졌다.
‘왜……?’
공명할 때 이미 각혈은 했는데.
하필 아버지 앞에서 꼴사납게…….
더는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며 눈앞이 캄캄해졌다.
“니케—!!”
단단한 팔이 쓰러지는 나를 붙들었다.
그 팔이 나를 위로 붕 들어 올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 * *
온몸이 끊어질 것 같았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용을 써도 조금 꿈질거리는 게 전부였다.
“니케……!”
다급한 부름이 들렸다.
나는 뻑뻑한 눈꺼풀을 애써 들어올렸다.
눈 뜨자마자 보인 건—
“아, 아버…지……?”
목이 까끌거렸다.
아버지가 조심스레 내 상체를 일으키시곤 입술에 물컵을 대어주셨다.
당연히 물일 줄 알았는데, 다른 액체였다.
하지만 아주 시원하고 청량해서 몇 모금 삼키자 좀 살 것 같았다.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던 몸도 좀 삐걱거리긴 하지만 가눌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였다.
‘……무슨 생각 중이실까.’
엄청 복잡해 보이는 눈빛이었는데,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손을 꿈지럭거렸다.
긴 침묵 끝에 아버지의 입술이 열렸다.
“들었다.”
“…….”
“영혼석과 공명할 때마다 고통이 엄청났을 거라고.”
“…….”
“수명이 깎여 나가는 기분이었을 거라고.”
“…….”
“대체 왜 그랬느냐.”
이제는 아버지의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그건 분노였다.
“……죄송해요.”
“고작 그딴!”
아버지가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고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런 말이나 듣자고 물은 게 아니다.”
“…….”
“이유를 설명해라, 니케아르샤.”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너무 비참하잖아.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아버지께 더 미움받을 짓을 하고 싶진 않았다.
“……아버지께 쓸모 있는 딸이 되고 싶었어요.”
“뭐?”
“역대급 각성자로 발현하는 걸 실패해서 제 쓸모를 다하지 못했으니, 다른 식으로라도 증명해야 하잖아요.”
아버지의 미간에 줄이 깊게 패였다.
“대체 어떤 쓸모를 증명한다는 거지.”
“……진짜 저보다 어머니와 닮은 딸의 모습이 아버지를 흡족하게 하니까요.”
“…….”
“적어도 진짜 제 모습보다는 꽤 쓸모 있잖아요.”
아버지가 입을 살짝 버렸다가 도로 다물었다.
몇 번 달싹거린 끝에야 말이 나왔다.
“왜 자꾸 쓸모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는 거냐.”
“그래야…… 아버지께 버림받지 않을 테니까요.”
아버지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노기 섞인 목소리가 그에게서 터져 나왔다.
“누가 그런 소리를 했지? 다 죽어가며 모습을 바꾸는 게 무슨 쓸모가 있다고……!”
“아버지께서 좋아하셨잖아요.”
아버지의 붉은 눈동자가 훅, 커졌다.
“저랑 밥, 같이 먹어주셨잖아요.”
“무슨…….”
“같이 산책도 하고, 이야기도 나눠주셨잖아요.”
“…….”
“제 걸음에 보폭을 맞춰주셨잖아요.”
그게 좋았다.
사실은, 살아남는 계획이니 뭐니 그런 것보다—
‘아버지랑 함께 일상을 보낼 수 있는 게…… 너무 좋아서.’
중독된 것처럼 자꾸만 어머니의 모습을 뒤집어썼다.
아무리 아파도, 고통스러워도 다 괜찮았다.
밥 먹다가 오늘 뭐 했냐고 물어봐 주시고,
몸은 어떠냐고 물어봐 주시고,
스테이크를 먹기 좋게 썰어주시고,
내가 잘 먹는 디저트를 앞으로 밀어주시고.
그런 것들이 너무너무—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