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ess Who Accidentally Stole Their Hearts RAW novel - Chapter (97)
악녀인데 하트 받아버렸다 97화(97/177)
저주와 고통과 비탄으로 흐렸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에이든!”
“에…이, 든……?”
헐떡거리는 숨결 사이로 쇳소리 같은 그 애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꼭 그게 자신의 이름이냐고 묻는 것처럼.
“그래, 에이든.”
208 따위가 아니다.
끊임없이 죽여야만 하는 살육 인형도 아니야.
나는 저주의 단검이 박힌 그 애의 가슴 위로 손을 얹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 단검을 뽑을 수도, 잡을 수도 없지만.
만약 내 목소리가 네게 닿는다면—
“에이든 하트.”
“으, 헉……!”
“말했잖아. 네 심장엔 저주를 이겨낼 힘이 있다고.”
두근, 두근, 두근.
손바닥을 타고 맥박치는 그 애의 심장이 느껴졌다.
“네 이름을 기억해. 네 하트는 이렇게나 강하게 살려는 열망으로 고동치고 있으니까.”
주변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제단 아래 무수한 시체도, 기괴한 저주의 제문도 점점 내 인식에서 지워져 간다.
아직도 알 수 없었다.
내가 보는 게 그저 환상 같은 꿈인지.
아니면 예전에 실제로 일어난 과거인지.
다만 모든 것이 지워져 가는 찰나에도 에이든의 얼굴만은 선명해서.
모든 것을 죽이라고 말하는 저주 속에서 그 얼굴은 그저 앳되어서.
“꼭 살아야 해, 에이든 하트.”
나는 그 애에게 계속해서 삶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
.
끔찍한 세례 후.
에이든은 눈을 떴다.
온몸이 핏물에 절어 있었다.
바닥에 뒹구는 조각난 사체들.
찰박이는 핏물로 가득한 바닥.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이것이 에이든이 기억하는 첫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이미 그는 살육 인형이었다.
다만.
‘에이든 하트.’
모든 기억이 사라진 가운데, 자신의 이름만은 선명하게 기억났다.
“깨어났군, 208. 네 주인께 인사를 올려라.”
이곳의 그 누구도 자신을 그렇게 부르지 않음에도.
그렇게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면서 에이든은 살아남았다.
‘왜 살아남아야 하는 거지?’
가끔씩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그럴 때마다 제 이름을 되뇌었다.
‘에이든 하트.’
읊조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에 불이 붙는 것 같은 이름이었다.
그렇게 에이든은 죽지 않았다.
살아남았다.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 것 같아서.
“이름이 뭐야?”
“……에이든이요.”
살육 인형 주제에 매번 같은 이름을 쓰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다.
하지만 에이든은 항상 제 이름을 말했다.
언젠가 자신의 이름을 온전히 불러주는 사람이 나타날 것 같아서.
웃기는 일이다.
성까지 붙여서 이름을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주제에 그런 기대를 하다니.
그러나 그건 기대보다는 예감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에이든 하트.”
아스라한 의식 사이로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말했잖아. 네 심장엔 저주를 이겨낼 힘이 있다고.”
눈 앞에 일렁거리는 흐릿한 그림자.
“네 이름을 기억해. 네 하트는 이렇게나 강하게 살려는 열망으로 고동치고 있으니까.”
목소리가 조금씩, 조금씩 선명해진다.
그와 동시에 그림자 또한 점점 더 또렷해졌다.
어둠을 사르며 빛나는 긴 머리카락.
잔뜩 일그러진, 그러나 강렬하게 타오르는 눈동자.
“꼭 살아야 해, 에이든 하트.”
“허억!”
에이든은 물에서 끌어올려진 사람처럼 숨을 토해냈다.
“에이든, 정신이 들어?”
자신을 붙드는 손길.
에이든은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기억 속과 똑같이 빛나는 머리카락.
똑같이 일그러진 채, 하지만 분명하게 자신을 응시해 오는 눈동자.
‘아…….’
당신이었어.
‘내 이름을 불러주고, 나를 살아 있게 만든 사람이—’
에이든은 떨리는 눈으로 니케아르샤를 바라보다가 흠칫했다.
“이, 이게 무슨…….”
에이든의 가슴에 드러난 저주의 흔적.
그 흔적이 니케아르샤의 손을 휘감고 있었다.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아, 안 돼…….”
하얗게 질린 에이든이 니케아르샤에게서 저주를 털어내려고 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필사적으로 움직인다.
“이제 됐어, 에이든.”
“아, 아니야……. 이게 왜…….”
니케아르샤가 말려도 소용없었다.
에이든은 고장 난 기계처럼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저주를 떨쳐내려고 했다.
자신에게로.
‘……바보. 다른 데로 떨쳐내야지 왜 자기한테 도로 가져가려는 거야.’
울컥, 니케아르샤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고개를 들었다.
대상 <에이든>의 저주와 연결이 확인되었습니다.
<상태 이상: 저주>에 대한 필요 조건 및 정보가 다 갖춰졌습니다.
에이든을 진정시키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는데 도무지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 상황부터 수습해야 할 것 같았다.
니케아르샤가 메시지를 확인하자 다음 알림이 떠올랐다.
이제 ♥를 사용해 대상 <에이든>의 <상태 이상>을 해제할 수 있습니다.
‘뭐……?’
♥를 사용해 대상 <에이든>의 <상태 이상>을 해제할까요?
니케아르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상태 이상을 해제한다는 건, 곧—
‘저주를 완전히 풀 수 있다는 거야?!’
대상 <에이든>의 <상태 이상>을 해제합니다.
그와 동시에 니케아르샤에게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
“니케!”
온유하고 성스러워서 모든 것을 깨끗이 정화시킬 것 같은 빛은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제 빛으로 뒤덮으려 하는, 폭압적이리만큼 맹렬한 빛.
그 빛이 에이든의 심장과 니케아르샤의 손에 감긴 저주를 잡아먹었다.
* * *
요람처럼 규칙적으로 흔들거리는 느낌이 편안했다.
니케아르샤는 가물가물거리는 정신을 조금씩 붙들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고동 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서 무척 안심이 되었다.
몇 번 눈을 깜빡이던 니케아르샤가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이스칼리온의 품에 안겨 있었다.
“저, 전하?”
“깼군.”
“이게 어떻게 된…….”
“짧게 혼절했었다. 그대로 두는 것보단 방으로 옮기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주변을 둘러보니 익숙한 악세렌궁의 회랑이었다.
이번 사절단을 맞이하며 니케아르샤는 악세렌 궁에 방을 배정받은 상태였다.
“사람들이 보면 수상하게 생각할 텐데…….”
“마주친 사람은 없다.”
니케아르샤는 힐끔 이스칼리온을 바라보았다.
잘 대답해 주고 있지만 뭔가 이상했다.
아까부터 묘하게…….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 같은데.’
“전하.”
“왜.”
지금도 그렇다.
이스칼리온은 니케아르샤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방에 도착해서 침대 위에 그녀를 내려놓을 때까지도.
잠깐 망설이던 니케아르샤는 가장 중요한 사실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에이든은요? 저주가 풀린 거, 맞아요?”
“그래. 그 여파인지 다시 의식을 잃었지만.”
“다행이다……!”
니케아르샤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상태 이상을 해제한다’는 메시지에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다.
하지만 이렇게 확인받으니 안도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이걸로 에이든은 자기 삶을 살 수 있을 거예요. 더 이상 고통 받을 필요도 없고, 누군가를 죽일 필요도 없고.”
“…….”
“다 잘됐네요. 그쵸?”
배시시 웃으며 이스칼리온을 쳐다보는데,
“잘됐다고?”
이스칼리온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니케아르샤를 노려봤다.
푸른 눈동자에는 분노와 역정이 가득했다.
“이게 그렇게 웃고 넘어갈 일이야? 저주를 그대로 잡다니 미쳤어?!”
“전하…….”
“그 끔찍한 저주가 네게로 옮아가는 걸 내 눈으로 봤어. 그때 나는—!”
이스칼리온이 니케아르샤의 어깨를 꽉 붙든 채 소리쳤다.
얼마나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잡힌 어깨가 아릿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야!!”
이 정도로 화난 이스칼리온은 처음 본다.
니케아르샤는 바짝 마른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했다.
“저주의 시전자가 같을지도 몰라요.”
“……뭐?”
“전하의 저주와 에이든의 저주. 같은 사람이 걸었을 수도 있다고요…….”
니케아르샤를 바라보는 이스칼리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회한, 불안, 초조……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진노가 뒤섞인 채.
니케아르샤는 차마 그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전하의 저주를 푸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해서.”
“그러니까 에이든의 저주를 파헤치면—”
“니케아르샤 델로시프!”
노기 가득한 부름에 니케아르샤는 흠칫 고개를 들었다.
이스칼리온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지금 그게 중요해……?”
아주 괴로운 듯이.
“내 저주 따위가, 중요하냐고.”
“…….”
“네가 스스로 저주에 걸릴 정도로 중요하냐고. 만약 마지막에 저주를 해주하지 못했다면…….”
이스칼리온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니케아르샤가 고개를 숙였다.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그 정도가 아닐 거라고 했잖아요.”
“무슨—”
“에이든의 저주가 강해지는 거, 그 정도가 아닐 거라고 말했잖아요.”
“그럼…… 황녀를 죽이려고 하지 않으면 계속 저주가 강해지는 거예요? 아무리 페트라로 약화시켜도?”
“……그 정도가 아닐 거다.”
“그때, 고민하지도 않고 바로 단언하셨죠.”
“…….”
“전하의 저주도 마찬가지이기 때문 아니에요?”
니케아르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절박함에 물들어 있었다.
“전하의 저주도 그저 약화시키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서! 고작 그 정도로 끝이 아니니까!”
“…….”
천천히, 이스칼리온이 니케아르샤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손이 니케야르샤의 뺨을 감싸 쥐었다.
‘이 여자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저 스치듯 지나가는 말 한마디를 내내 가슴에 간직하는—
예리하고 날카롭지만 위험 앞에 망설임 없이 자신을 내던지는 여자를.
‘네가 조금만 덜 용감했으면 좋겠어.’
이렇게 강인하지 않고, 나약하고 겁이 많았으면 좋겠다.
“에이든의 저주보다 전하의 저주가 더 심각하잖아요.”
“…….”
“나는 그 저주에 죽어가던 당신을 봤으니까.”
니케아르샤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저주가 옮아 자신이 겪게 될 고통보다 기억 속 이스칼리온의 고통이 더 아파서.
자신의 안전을 저울질하지 않는 바보 같은 여자라서.
“그러니까 도저히— 읏!”
“더 말하지 않아도 돼.”
결국 끌어안아 버릴 수밖에 없는 거다.
이 여자를 품 안에 두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으니까.
* * *
달이 환한 저녁, 악세렌 궁.
시세리아는 다소곳하게 무릎을 굽혔다.
“오늘도 즐거웠어요, 막시민 전하.”
“나야말로 영애 덕에 즐거웠어.”
“후후, 그럼 내일 또 뵈어요. 평안한 밤 되시길.”
시세리아는 짙게 미소 지으며 막시민의 방을 나섰다.
막시민은 그 모습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시세리아는 매일 같이 날 따로 찾아오는데.’
정작 델로시프 공녀는 깜깜무소식이다.
자신이 먼저 손을 내밀어줘도 바쁘다면서 칼 같이 거절할 정도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처음 반토니오 백작의 장단에 맞춰 경합을 받아들인 건 니케아르샤의 대응이 궁금해서였다.
자신의 계획을 어그러트린 여자.
그래서 괘씸하지만, 그래서 흥미로웠다.
일부러 시세리아와 차별하며 더 자극하기도 했다.
과연 어떻게 나올까.
시세리아와 경쟁하며 자신에게 잘 보이려 애를 쓸까?
잘 보이려 한다면 어떻게 행동할까.
다른 여자들처럼 곁에서 아양을 떨까.
아니면 조건을 제시하며 협상을 해올까.
그도 아니면 과연 어떤 식일까.
그걸 상상하는 건 꽤 재밌는 일이었다.
‘……이렇게 무관심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예상과 달라서 재밌다기보다는 이제 슬슬 거슬리기 시작했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전하, 델로시프 공녀께서 만남을 청하십니다.”
“델로시프 공녀가?”
의외의 소식에 막시민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내 “하!” 하는 실소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관심 없는 척하더니 슬슬 마음이 급해졌나 보지?’
이제 연회가 코앞이다.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막시민이 승자를 선택해 파트너로 삼는 날이.
“늦은 밤에 갑작스레 방문해서 죄송해요, 전하.”
방 안에 들어온 니케아르샤가 막시민을 향해 무릎을 굽혔다.
막시민은 픽 웃었다.
“무례인 건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그 말에 니케아르샤가 바로 무릎을 폈다.
“그냥 예의상 해본 말이었어요. 딱히 큰 무례는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그녀의 얼굴에는 송구한 기색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막시민은 어이가 없었다.
“뭐라고?”
“아니, 오히려 전하 입장에선 감사할 일이랄까요?”
막시민의 입매가 소리 없이 올라갔다.
재미없다고 생각한 게 조금 전인데, 이 여자는 또 자신을 재밌게 만든다.
“내가 왜 공녀에게 감사해야 하지?”
“제가 전하께 도움이 될 테니까요.”
“아아, 역대급 각성자이자 델로시프 대공가의 힘을 가지고 있어서? 이제 와서 그런 걸로 도움 될 거라고 운운한다면 실망인데.”
진심이었다.
하지만 니케아르샤는 아무 동요도 없이 입을 열었다.
“그보다는 전하의 사절단에 섞여 든 황족 시해 음모를 막아서 도움이 된다는 건데요.”
“뭐……? 황족 시해?”
갑자기 튀어나온, 상상도 못 한 이야기에 막시민이 미간을 찌푸렸다.
“네, 제가 센리안에서 황족 시해 음모를 꾸민 걸 사전에 막았거든요.”
“대체 무슨 소리야!”
이건 이렇게 덤덤하게 말할 종류의 내용이 아니었다.
니케아르샤는 더 말하지 않고 서류를 건넸다.
노예 사이에 섞여 든 암살자.
시해 방법.
시해 대상.
헛소리로 치부하기엔 너무 자세한 내용이 쓰여 있었다.
“이걸, 막았다고?”
“네, 뭐. 고맙죠?”
막시민은 그제야 깨달았다.
니케아르샤가 항상 차분하다 못해 심드렁했던 것.
막시민에게 잘 보이려고 아양 떨지 않았던 것.
아예 무시에 가까울 정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그게 전부 다—
‘그냥 협박으로 경합에서 이기려고 한 거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