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s Daughter-in-law is Inherently Powerful RAW novel - Chapter (112)
악당의 며느리는 권력자 체질입니다-112화(112/173)
여름밤의 바람은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마력이 있다. 슬픔도 잠재우고 묘하게 낙천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안이 나를 데리고 나온 거겠지.
“보아하니 혼자 정리를 끝낸 얼굴인데.”
샌드위치 하나를 다 먹을 즈음이었다. 이안이 말을 꺼낸 것은.
“예정보다 일찍 떠날 생각이지? 플로린.”
“그건…….”
대체 어떻게 알았지? 독심술이라도 쓰나?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이안이 어깨를 떨며 웃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도는 다 알아. 너보다 널 더 잘 아는 사람이 나일 거야, 플로린.”
“들켜버렸네. 맞아, 조금 일찍 떠날까 해. 하지만 그건 이안 때문이 아냐.”
부담감을 느끼지 말았으면 한다.
이안은 혼자 생각하고, 혼자 짊어지려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를 걱정해서 일찍 아르칼리크에 간다고 하면…… 분명 혼자 엄청 자책할 거거든.
난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성인이 되면 돌아올 거니까, 아빠 옆에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어주려고.”
“효녀네.”
“응. 내가 생각해도 좀 그런 것 같아.”
이안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내 변명에 속아주겠다는 듯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내가 꼭 아주 어린애가 된 것만 같았다.
이안은 항상 나보다 어른스러워서. 이상하게 이안 앞에만 서면 내 속내를 다 들키는 것 같단 말이지.
단테는 진짜로 잘만 속던데.
“어른이 되면 꼭 돌아오기야. 그때까지 열심히 성장하고 있을 테니까.”
“걱정 마! 당연히 돌아와야지.”
“기다릴게. 네게 어울리는 남자로 자라서.”
이안이 내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굵어진 팔목이나 핏줄이 서기 시작하는 팔뚝이 조금은 낯설었다. 분명 다 같이 어린애였는데 이안은 혼자 훌쩍 커버리고 있는 것 같아.
머뭇거리던 나는 이안의 금빛 눈동자에서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러곤 몹시 어색하게 동아줄을 쥐었다.
“줄 게 있었는데 깜빡할 뻔했네! 나 방에 내려갔다 올게.”
“조심. 다칠라.”
“에이, 이 정도가 뭐가 위험해.”
가볍게 대꾸한 나는 줄을 잡고 휙 뛰어내려 내 방 창문 안으로 쏙 들어갔다.
‘내 보물 상자.’
침대 밑에서 오랜만에 꺼내본 보물 상자는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 절대 손대지 말라는 내 명령에 따라 어느 하녀도 이걸 닦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걸 낑낑거리며 꺼낸 난 후 하고 먼지를 불곤 상자를 열었다.
이것저것, 소중한 물건이 잔뜩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중요한 건…….
‘이걸 줄 때가 된 것 같아.’
6개월 전, 가주 할아버님이 나를 부르더니 금으로 만들어진 로켓 목걸이 세 개를 쥐여주셨다.
이건 딸깍하고 뚜껑을 열면 그 안에 내 초상화가 있는 건데, 그 의미가 무거웠다.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네가 떠날 때쯤 하여 후계자들 중 단 세 명에게만 이걸 주도록 해라.”
“유리도 포함해서요?”
“그래. 네가 떠난 뒤, 이걸 받은 놈들은 가주가 될 공부를 할 것이고 못 받은 놈들은 가문에 도움이 되도록 실무진 쪽으로 빠질 게다.”
“……그리고…… 이걸 받았는데, 가주가 되지 못하면…….”
“그놈은 변방에 가야지. 어쩌겠느냐? 뭐, 유리 고놈은 황태자이니 예외적으로 황궁에 있겠지만.”
유리는 가주가 되지 못하더라도 잃을 게 없다. 하지만 다른 애들은 아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평생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 가주 할아버님은 나를 깊은 눈으로 응시하며 주의를 주셨다.
“망설이지 말거라, 플로린. 우리는 맹수 가문이다. 한 영역의 우두머리 자리를 두고 경쟁하여 패배한 자가 무리를 떠나는 건 당연한 이치 아니더냐?”
“……네.”
“그렇다고 해서 떠나는 게 두려워 도전하지 않을 것 같으냐. 그 심약한 시온 녀석조차도 기회가 주어지면 죽자사자 덤빌 게다.”
내가 우유부단하게 구는 건 진지하게 임하고 있는 후계자들을 모욕하는 것이다.
나는 그걸 명확하게 알고 있었고, 누구에게 이 목걸이를 주어야 할지 오랫동안 고민했다.
아빠한테도 상의했고 양어머니께도 몰래 여쭤봤는데 역시 답은-
“이거, 이안 거야.”
이윽고 다시 지붕 위로 올라간 나는 이안의 손에 목걸이를 쥐여주었다.
잘그락.
목걸이 줄이 이안의 손가락을 타고 늘어졌다.
그런데 이안은 얼어붙기라도 한 듯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로켓, 목걸이.”
“응. 무슨 의미인지 알지?”
한참 뒤에야 목이 멘 듯 낮게 읊조리는 이안을 향해 나는 밝게 웃었다.
“다른 사람은 누구 줬는지 비밀. 내가 아르칼리크로 떠나고 나면 가주님이 말씀해 주실 거야.”
나머지 두 개도 이번 주 안에 전달해야겠다.
잠깐의 이별은 더 긴 만남을 위한 단계이므로 고통스럽지 않다. 작별이 괴롭지.
‘하지만 그 작별마저 받아들여야 하는 게 드리블랴네의 숙명이니까…….’
나는 이안의 불그스름한 머리칼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얼마 없던 젖살이 빠지는 바람에 보다 날카로워진 턱선과 갸름한 눈매도 천천히 훑었다.
그러자 이안 역시 나를 눈으로 훑으며 하나하나 새겨 넣는 게 보였다.
“아, 꽃잎 묻었네.”
어디선가 날아온 꽃잎이 내 머리칼에 내려앉기라도 했던 걸까.
이안이 손을 뻗더니 내 이마를 느슨히 간질였다. 그러더니 커다란 손으로 이내 이마부터 눈까지 가렸다.
“오늘을 잊지 마.”
이안이 상체를 숙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쪽.
분명 내게 직접 닿지 않도록 제 손등 위에 입을 맞춘 건데 어째서…….
‘이렇게 부끄러운 건지.’
이안은 내가 감고 있던 눈을 뜨기 전에 사라졌다.
하지만 이안의 손이 주는 온기가 오랫동안 내게 남아서. 그래서 나는 뺨을 붉힐 수밖에는 없었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드디어 내가 아르칼리크로 떠나게 된 날, 이안은 배웅을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서운하지 않았던 건 마음 어귀가 홧홧해서였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따님.”
“네, 어머니.”
우선 오늘도 멋지게 제복을 차려입은 양어머니께서 나를 꽉 안아주셨다.
그다음엔 가주 할아버님과 이난나 님이었다.
“예상한 대로 목걸이를 줬더구나.”
“몇 년 뒤, 돌아온 네 선택이 어떠할지 궁금하구나. 그 때까지 아르칼리크에서 행복하게 지내야 한다.”
두 분 다 아직은 정정하시지만 내가 어른이 될 즈음에는…… 거동이 불편해지실 테지.
나는 두 분의 품에 한 번씩 안긴 다음 손을 가만히 쥐었다.
“건강하셔야 해요.”
“걱정 말려무나.”
가주 할아버님은 껄껄 웃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네가 봄의 아름다움을, 여름의 찬연함을, 가을의 고즈넉함을 알 수 있어 다행이다. 종종 그곳의 계절은 어떠한지 편지를 보내주거라.”
“네, 할아버님. 그럴게요.”
존은 남몰래 울었는지 눈가가 부어올랐고, 하녀들은 지금도 엉엉 울고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야, 동글.”
마지막으로 단테가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코를 훌쩍이며 내게 액자를 하나 내밀었다.
“내 초상화야. 네 방 책상에 놔둬.”
“뭐어?”
“너도 나한테 하나 줬으니까, 나도 너한테 주는 거야. 그리고 누가 껄떡대면 보여줘.”
너무 황당해서 눈물이 쏙 들어가고 웃음이 터졌다.
한참 까르르 웃던 나는 결국 액자를 받아 들었다.
“그래, 그럴게.”
“너무 거기에 정 붙이지 말고.”
단테는 처음부터 내가 아르칼리크에 가는 걸 싫어했고 일관성 있게 지금도 싫어했다.
나는 그런 단테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짐가방에 액자를 끼워 넣었다.
“이제 가요, 아버님!”
나를 아르칼리크까지 데려다주는 사람은 당연히 아버님이다. 아버님 외에는 그 누구도 비행정을 조종할 만큼의 마력이 없으니까.
“울고불고 더 안 해도 되겠느냐.”
“아이, 참! 제가 아기도 아닌데요.”
“그런 것치고는 코맹맹이 소리가 난다만, 미트볼.”
근사한 레드 슈트를 차려입은 아버님이 내 코를 톡 쳤다.
나는 눈에 힘을 주고는 흥흥거리다 이내 환하게 웃으며 뒤를 돌았다.
“안녕, 모두들! 나중에 다시 만나요!”
나는 어떤 어른으로 자라게 될까.
내가 돌아왔을 때, 다들 얼마나 성장해 있을까.
미래를 보는 힘이 있다면 살짝 걸어가서 훔쳐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 * *
네 개의 계절이 한 번씩 세상을 훑고 지나갔다.
새싹이 돋고 꽃이 피었으며 신록이 푸르게 물들고 하늘이 높아졌다. 그 뒤엔 휴식기가 찾아와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둘러싸였고…….
다시 새싹이 돋았다.
그렇게 계절이 돌고 도는 동안 마도 제국은 찬란한 발전을 이루었고 신성 제국은 도태되었다.
마도 제국의 기술이 발전하는 것을 알아차린 신성 제국의 귀족들은 불안해하며 성녀, 라흰을 깨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라흰이 겨울을 불러오는 악랄한 행위를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시 봄이 오지 않았느냐고.
경전에서 죄인이 뉘우치면 그 죄를 사해주라고 되어 있지 않으냐며 라흰의 죄를 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마도 제국을 위협이라 느끼지 못한 이들도 많았고, 라흰은 신성 제국 역사상 가장 큰 죄인이므로 쉽사리 봉인에서 풀려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라흰의 봉인에 관한 문제는 지지부진한 채로 또 계절이 지나가고 세월이 흘렀다.
1002년. 아르칼리크 공국과 마도 제국이 동맹국이 되었다.
1003년. 신성 제국 내에서 라흰을 풀어주라는 광신도 집단이 생겨나다.
1004년. 광신도에 의해 신성 제국의 교황청이 습격당하다. 황제를 위시하여 고위급 귀족과 신관이 모인 긴급회의가 소집되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1005년.
라흰이 봉인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햇수로 따지면 근 20년 만이었다.
새로운 성녀로 의심되던 아르칼리크의 공주, 플로린이 마도 제국의 드리블랴네 가문으로 돌아가게 된 날.
신성 제국에서는 라흰이 눈을 떴다.
봉인당한 동안 시간이 멈추어 조금도 늙지 않은 모습으로, 여전히 그 당시의 발랄함을 간직한 채로.
그리고 의식을 되찾은 라흰은 그간의 일을 보고 받은 뒤, 이렇게 말했다.
“세 번째 ……을 빌게. ……와 나를 ……줘. 할 수 있지?”
애석하게도,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한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