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s Daughter-in-law is Inherently Powerful RAW novel - Chapter (115)
악당의 며느리는 권력자 체질입니다-115화(115/173)
이안과 단테는 이미 운명에 순응하고 있었다. 아마 플로린이 내려와서 다시 드리블랴네에 적응하고 나면 곧바로 최종 선택을 하게 될 테지.
너무 급하게 결정하게 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가주님의 의사는 강경했다. 가주직에서 완전히 물러나기 전에 가문 내의 모든 일을 깔끔히 정리하고 싶으신 것이다.
사실 본래라면 드리블랴네에서 쭉 함께 살다가 이 시기쯤 하여 최종 결정을 했을 테니……. 전통을 따지자면 알맞은 시기기도 했다. 플로린도 선택해야만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테고.
‘어쩌면 다시 정이 붙기 전에 선택을 서둘러 해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플로린 입장에서는.’
단테는 그렇게 생각하며 집무실에서 물러났다.
본래라면 이안과 몇 마디라도 실없이 나누었을 텐데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마음이 복잡하다. 그가 남게 될 수도 있지만, 어쩌면 떠나게 될 수도 있다.
‘여길 떠나서 변방으로 가게 된다면…….’
그렇게 되기 전에, 차라리 팔라딘 입단 시험을 치르는 게 낫지 않나.
얼마 전, 팔라딘 쪽에서 그에게 은밀히 접촉을 해왔다.
그때는 생각해 보겠노라고만 했었으나 이젠 진지하게 고려할 때였다. 의미 없이 변방에 처박힌 채 허송세월을 보내고 싶지 않았으니까.
‘형 역시 그렇겠지.’
아마 표면적으로는 변방에 갔다고 하고 신분을 감춘 채 조커에서 계속 활동하지 않을까.
단테는 그렇게 짐작했다.
‘어릴 땐 내가 더 플로린과 친했던 것 같지만, 지금 와서도 그럴까.’
머뭇거리며 멈춰 선 단테는 제 가슴이 쿵쿵하고 뛰는 것을 느끼며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왜 이렇게 설레는지 모르겠다.
그 어느 영애들을 봐도 뛰지 않던 심장이 플로린이 온다는 말에 저 혼자 요란해서…… 온몸이 흔들리는 걸 감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 * *
드리블랴네 저택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 밤.
나는 아빠와 함께 오랫동안 산책을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언제든 여기가 네 집이다. 돌아오거라.”
“응, 아빠.”
“무슨 일이 생기든 난 네 편이라는 걸 잊지 말고.”
아빠는 울먹거렸지만 용케 울지 않았다. 많이 단단해지셨지.
그래도 나는 그런 아빠를 오랫동안 꼭 껴안은 채 놓지 않았다.
내가 떠나면 아빠는 많이 외로워지시겠지만…… 내가 아주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버틸 수 있으실 거다.
그렇게 긴긴 인사를 하고 새벽달이 저물 시간이 되어 난 비행정에 올랐다.
정들었던 아르칼리크의 옷을 벗고 마도 제국에서 최신 유행이라는 드레스를 걸친 채였다.
아버님이 복귀 선물이라고 주신 드레스인데, 내가 좋아하는 레이스가 잔뜩 달린 데다 내 피부와 잘 어울리는 우윳빛이었다.
역시 아버님의 감각은 탁월하시다니까.
“잘 어울리는구나. 이제 미트볼이라고 부를 수가 없는 게 아쉽네.”
“아버님! 오랜만에 뵈어요!”
비행정엔 3개월 만에 뵙는 아버님이 계셨다.
시간이 흘러 훨씬 중후한 멋이 더해진 아버님은 요즘 귀부인들에게 인기가 폭발적이라고 한다. 물론 내가 직접 본 건 아니고, 아버님의 말씀에 따르면 말이다.
“떨려요. 저택에 돌아가게 된다니.”
“그러니. 그다지 달라진 건 없다만. 완두콩 같던 놈들이 길어졌다는 것뿐.”
“제 기억엔 완두콩뿐이어서요.”
이안은 어떤 남자가 됐을까?
단테는?
그리고…… 그렇게 귀엽던 유리는?
아르칼리크에서 지내면서 나는 솔직히 엄청나게 보호를 받았다.
잔치에 초대받아 가더라도 그 어느 남자도 나를 감히 쳐다보지 않았고, 곁눈질조차 하지 않았다.
신하가 아니라 연인이 될 수 있을 만한 상대. 즉, 젊은 남자와 엮일 일이 전무했달까.
게다가 작년은 한 해 내내 목희의 섬인 목 섬에서 지내는 바람에 남자는커녕 동물만 실컷 봤다.
물론 내겐 토끼 같은 남편이 될 인물이 셋이나 있으니 딱히 여기서 연애를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좀 걱정이긴 했다.
그러니까 ‘남자’랑은 어떻게 말을 하는 거람?
‘휴우. 적응을 못 하면 어쩌지.’
자리에 앉은 나는 뺨을 문지르며 긴 숨을 내뱉었다.
세 사람 모두 다 어떻게 성장했는지 궁금했지만 역시 그중에 제일 궁금한 건 유리였다.
왜냐면 유리가 곧 어른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거든!
언제까지나 어린아이일 것 같은데. 그 애도 남자가 되었을까?
“네가 어느 정도 적응을 끝내고 나면 바로 선택하게 될 게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버님이 내 앞에 우아하게 앉더니 긴 다리를 뻗으며 아무렇지 않게 한 마디를 툭 던지셨다.
마치 오늘 저녁 식사는 양갈비 스테이크로 하자는 것처럼 평이한 어조여서 나는 내가 잘못 들었나 하고 귀를 의심했다.
“아버지가 곧 자리를 물려주실 거라…… 그렇게 됐다.”
“네???”
“그러니 내려가는 그 순간부터 누구를 남편으로 삼을지 꼼꼼히 보려무나.”
“그게 무슨…… 네?”
“평생 봐야 할 얼굴인데 아무래도 취향에 꼭 맞아야 하지 않겠니.”
잠시만요, 그렇게 됐다고 하면 다인가요?!
아버님의 멱살을 잡을 뻔한 나는 간신히 멈추었다.
“설마 몇 주 뒤에 선택하라는 말씀……이세요?”
“글쎄. 한 놈당 일주일 정도 기회를 준다고 치면 3주겠지.”
“?!”
“3년을 줄 순 없을 것 같구나.”
아버님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아래에 깔려 있는 웃음기를 읽어낸 나는 심호흡을 하며 마른세수를 했다.
‘정신 차리고 정리해 보자. 할아버님이 가주 자리를 아버님께 물려주신다고.’
아마 3주는 농담으로 하신 말씀일 거고 그보다는 시간을 더 주시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까지 주긴 힘들다는 이야기겠지.
할아버님이 빨리 상황을 정리하길 원하시는 거구나.
‘아…… 하긴.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주에 어울리는 사람을 고르기로 했었으니까.’
언젠가 닥쳐올 일이었으나 갑작스러워서 가슴이 내려앉았다.
“어려울 테지. 고민이 많이 될 게다.”
“좀 그래요.”
“누구를 택하든 다 너를 진심으로 사랑해 줄 거란다. 하지만 플로린.”
아버님의 어조가 전에 없이 진지했다.
“만약 정말 선택하지 못하겠다면 말하거라. 시간을 더 주마.”
“음. 일단 만나볼게요. 셋 다.”
당황이 잠시 가시고 나자 이성적인 판단이 들었다.
‘어차피 라흰이 곧 나타날 테니까. 그렇다고 가정하면 미래의 가주를 미리 선택해 두는 게 훨씬 안정적이겠지.’
라흰의 봉인이 깨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그 사실을 지난날 동안 한시도 잊지 않았다. 그렇기에 매해 화이란에게 신성 제국에 가서 교황청과 라흰의 동향을 알아와 달라고도 했었지.
라흰을 숭배하는 광신도 집단이 발생했을 땐 정말 마음을 졸였는데.
‘다행히 그것도 어떻게 잘 넘어갔고.’
어쩌면 라흰이 드리블랴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얌전히 신성 제국에 머물러 줄지도 모르지만…… 그럴 확률은 낮겠지?
‘그래, 20대 가주가 될 내 남편을 보다 일찍 선택하고 내 자리를 더 공고하게 해두자.’
그게 좋겠어.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창밖으로 시선을 미끄러트렸다.
하늘을 차지한 구름 색이 하필이면 불길한 잿빛이었다.
* * *
신성 제국, 교황청.
미로처럼 복잡한 구조물 속에서도 깊숙한 곳에 위치한 성지(聖地).
거기엔 투명하게 반짝이는 거대한 수정이 있었다.
신관 천 명의 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봉인석. 그 속에 신의 딸이 고요히 잠들어 있다.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발랄하기 그지없던 그녀는 독특한 매력으로 단숨에 신성 제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었다.
밤색 머리카락과 밤색 눈동자.
장난꾸러기 요정처럼 기발한 말과 행동을 툭툭 던지던 성녀는 그 당시의 모습 그대로 박제되었다.
라흰이 저지른 죄는 너무나 극악하여 곧바로 처형되어야 마땅했으나 당시 의견은 모두 셋으로 갈렸었다.
첫째. 만약 라흰이 악하다면 어째서 신이 신성력을 주었겠는가.
즉, 라흰이 하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옳다. 그러므로 봉인해서는 안 된다는 파.
둘째. 라흰이 미래에 도움이 되고 필요한 순간이 올지도 모르니 그때를 대비하여 봉인해 두는 게 옳다고 주장하는 파.
셋째. 즉각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파.
교황청은 오랜 고민 끝에 중도적인 결론을 내렸다.
죄인인 라흰을 봉인하되, 차후 성녀가 필요한 순간이 생기면 봉인을 풀겠다.
그때가 오면 죄인은 자신의 힘으로 성심껏 신성 제국의 백성들을 돕고 봉사해야만 한다.
허나 솔직히 지금 이 시점에 라흰의 봉인을 푸는 건 교황청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광신도들은 나날이 힘을 더해가고 있고, 그들은 라흰을 마치 성모처럼 여기고 있으니 별수가 없었다. 이미 교황청이 신의 딸을 억압하는 마귀라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으니까.
이토록 흉흉한 민심을 잠재우려면 하는 수 없이 라흰을 풀어주는 수밖에.
“…….”
호흡을 내뱉는 소리조차 크게 들리는 거대한 성지에 교황을 비롯해 일곱 명의 고위 신관이 무거운 발걸음을 했다.
라흰의 봉인을 푸는 방법은 오직 하나. 일곱 명의 고위 신관이 입회한 자리에서 교황이 신성력을 발휘하여 봉인석을 녹이는 것뿐.
“그럼 성녀의 봉인을 풀겠소.”
나직한 한마디 끝에 교황의 몸에서 광휘가 일었다.
이윽고 봉인석이 꼭대기에서부터 천천히 아래로 녹아내렸다.
“오오, 저분이.”
“생각보다는 평범하지 않으신가…… 싶지만.”
“그래도 저분이 성난 민심을 달랜다면야…… 쓸모가 있는 거겠지요.”
고위 신관들은 잡담을 주고받으며 라흰이 눈을 뜨는 것을 기다렸다.
일곱 명 중 반은 나이가 많다. 즉, 라흰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는 새롭게 고위 신관이 된 이들로, 라흰에 대해 전혀 몰랐다.
다만 의아해하기는 했다. 신성력은 신이 주신 귀한 선물인데 어찌 그걸로 세상에 그 끔찍한 겨울을 불러왔단 말인가.
성녀가 깨어나면 그 답을 알 수 있으리라.
그리고 마도 제국에서 나타났다는, 그 말도 안 되는 각종 소문의 ‘가짜 성녀 플로린’ 역시 천신의 이름으로 처단할 수 있을 게 분명했다.
교황이 성녀 플로린을 데려와서 직접 검증을 하려 했지만, 마도 제국에서 재빨리 빼돌렸다.
진짜 성녀가 아니었기에 제 발 저려서 그런 게 아니었겠나. 그러므로 역시 라흰만이 진짜 성녀다.
현재 교황청 내에서 결론은 그렇게 나 있었다.
“……아.”
마침내 봉인석이 완전히 녹아내려 자취를 감추고, 그로부터 몇 초.
눈꺼풀이 움찔 떨리더니 라흰이 고운 입술을 벌렸다.
신관들은 두 손을 모으고 ‘진짜 성녀’의 첫 마디를 경건히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