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s Daughter-in-law is Inherently Powerful RAW novel - Chapter (124)
악당의 며느리는 권력자 체질입니다-124화(124/173)
* * *
“아…… 짜증 나게.”
그 시각, 황태자 궁.
사람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한 집무실 안에 고운 미성이 울려 퍼졌다.
다 자란 나이임에도 여전히 변성기가 오지 않은 것처럼 맑은 목소리를 지닌 인물은 다름 아닌 황태자, 유리다.
유리는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고운 미간을 좁혔다.
어릴 때는 추측하기만 했으나 유리는 이제 <책>의 능력과 범위를 상세히 알았다. 그간 이 <책>으로 여러 실험을 했기 때문이었다.
1. <책>은 그의 이큘리스와 수조에서 나가고 싶은 간절한 바람이 혼합하여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이능력이다.
2. 이와 같은 능력을 지닌 사람은 없다. 그만이 유일하다.
3. <책>은 플로린을 주인공으로 하는 3인칭 소설이며 플로린의 주변 인물의 행동과 심리 역시 보여준다.
4. 하지만 <책>에는 ‘가려진 이름’이 종종 등장하며, 그 ‘가려진 이름’은 일정 주기가 지나면 공개되곤 한다. 기준은 알 수 없다.
5. 자신이 지배하는 물방울이 뒤쫓는 인물은 <책>에 새로운 캐릭터로 포함시킬 수 있으나 그 시한은 물방울이 마를 때까지다.
6. 이큘리스를 담은 물기로 글씨를 쓰면 <책> 속 인물에게 닿을 순 있지만 한 번 소통을 하고 나면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한다. <책>의 일정 페이지 수가 채워진 뒤에야 다시 소통을 시도할 수 있다.
7. 신성력, 마법 등으로 방어막을 친 경우 그 힘이 현재 그의 힘을 능가한다면 그 안에서 오가는 대화는 <책>에 빈 페이지로 나온다.
“쯧.”
유리는 혀를 차며 손을 까딱였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 제임스가 재빨리 다가와 그의 입맛에 맞는 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심신 안정에 도움을 주는 라벤더와 캐모마일의 향이 집무실 안을 채우자 유리는 날 선 신경이 좀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이야기를 한 거지? 쓸데없는 소릴 해서 플로린을 겁준 건 아니겠지.’
후계자들이 성인이 된 지금, 드리블랴네 가문의 20대 가주로 누가 선택될 것인지는 정치권 전체의 관심사였다.
유리는 성인이 되려면 1년 더 남았으나 이미 어른처럼 각계의 주요 인사들과 현안을 논하고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으니 나이가 문제가 되진 않았다.
물론 황가가 드리블랴네 가문을 집어삼키는 것에 대한 우려는 있으나 어차피 그가 선택되기만 하면 차후 플로린을 가주로 세울 것이니 시끄러운 입들을 다물게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네가 나를 택하기만 하면 되는 문제인데.’
툭, 툭.
예술품을 빚어 놓은 것처럼 길고 우아한 손가락이 성마르게 컵 가장자리를 두드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갓 우린 찻물의 김이 뜨거워서라도 손을 뗄 텐데 유리는 그런 것쯤은 전혀 느끼지도 못하는 것처럼 굴었다. 실제로 느끼지 못하고 있기도 했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유리는 상어 족의 특징들이 진하게 발현되었다.
육체적인 통증에 둔한 것, 감각에 무딘 것. 그러면서 신경은 날카롭고 예민하며 기감은 민감하기 그지없다.
잔혹하고, 이성적이고, 감정의 폭이 크지 않아 철옹성과도 같았다. 그러면서도 눈치가 빠르고 머리가 비상하며 내놓는 수마다 대담했는데, 그런 성격은 모친에게 물려받은 게 틀림없었다.
성격적으로 유리는 제 아비보다 어머니인 아리아드네를 빼다 박았으니까.
그리하여 현재 유리는 역대 황태자 중 가장 위험하며 동시에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뛰어난 외모를 가졌고, 사람을 홀리는 화술 또한 겸비했으니 플로린이 그를 싫어할 이유가 없는데.
‘그런데 왜, 입맛이 쓰지.’
파사삭!
저도 모르게 움켜쥐었는지 찻잔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조각조각 바스러졌다.
그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화들짝 놀라며 서로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을 당할까 싶어 근처에 다가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도 제임스가 나서서 무릎을 꿇고 피에 젖은 손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 일련의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제임스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유리 역시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제임스는 이름이 붙은 사물이었다. 그 외의 시종들은 이름조차 없어 식별할 수 없는 사물이고.
뚝, 뚝.
핏물이 양탄자에 떨어져 스민다.
쇠비린내와 비슷한 그것은 다른 이들에겐 지독한데 상어 족에게만큼은 달큰했다.
유리는 대충 손을 내맡긴 채로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러자 황궁 정원을 밝히는 불빛이 유리의 날 선 옆얼굴에 내려앉았다.
반짝이는 백금발과 나비의 날개처럼 긴 속눈썹. 모양새 좋은 입술이 퍽 요염한 분위기를 풍겼다.
치켜 올라간 눈매와 광기가 은은히 감도는 연보랏빛 눈동자까지 고혹적으로 보이게 하는 황태자의 얼굴은 귀기에 가까운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잔을 깨트리는 걸 보고 다가오길 주저한 자들이 한순간 또 외모에 홀려버리는 꼴이란 제법 우스웠으나 그건 시종들을 탓할 게 아니었다.
오히려 묵묵히 제 할 일을 끝마치는 제임스가 특이한 경우였지.
‘첫 주는 단테와 둘째 주는 나와 셋째 주는 이안과 함께 보낸다던가. 시간이 느리네. 그래서 이렇게 짜증이 나나?’
하지만 유리는 플로린이 데이트 순서를 정하기도 전에 이미 어떻게 순서가 나올지를 예측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보냈던 마차가 텅 빈 채로 돌아와도 놀라지 않았고.
다 수긍하고 있었다. 플로린은 그만큼이나 합리적인 걸 좋아한다. 그러니 데뷔당트가 있는 둘째 주에 황궁에 오는 게 마땅한데.
‘수컷 하나 가까이 갈 수 없던 아르칼리크에 있을 땐 마음이 편했는데. 하늘에서 내려오자마자 이렇게 불안해서야.’
그간 유리가 제 이부형제인 이안과 단테를 없애려는 노력을 안 한 건 아니었다. 티가 나지 않도록 은밀히 손을 썼지만 번번이 실패했을 뿐.
이부형제들은 그와 비슷한 실력이었기에 직접 나선다면 모를까, 웬만해서는 제거하기가 어려웠다.
단테는 두어 번 성공할 뻔도 했지만 신중한 이안이 눈치채고 막아냈다. 아쉬운 일이었다.
미리 없애두었다면 지금 이렇게 괴롭지 않아도 됐을 텐데.
‘이번에 네 삶은 행복하게 흘러가다 죽음마저 행복할 거야, 플로린. 내가 가진 모든 권력으로 그렇게 만들어 줄 테니까.’
내게 와.
‘하지만 만약 나를 끝내 택하지 않는다면…….’
널 해치진 못하니 다른 누군가를 해치고 싶어지겠지.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단테와의 데이트 마지막 날이 되었다.
단테의 아쉬운 기분을 대변하듯 아침부터 장대비가 쏟아져 계획했던 외출은 할 수 없게 되었다. 대신 우리는 넓은 응접실 하나를 둘이서 차지하고 앉아 보드 게임을 하기로 했다.
“아, 또 졌네.”
“아까부터 너, 자꾸 봐주는 거지?”
“아닌데? 네가 잘하는 거야, 동글.”
제일 쉽게 체스부터 시작해 카드 게임이며 나무토막을 쌓아놓고 하나씩 빼는 놀이까지. 나는 각 게임마다 모조리 승리를 거뒀는데 아무래도 수상했다.
단테가 이렇게까지 게임을 못 한다고?
‘근데 게임에서 내리 졌는데도 기분 상해 보이지 않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게임에도 진심이던데.
작은 것에 자존심 상해하지 않는 건 단테의 큰 장점이었다.
“그러고 보니 너, 데뷔당트 때 추는 춤은 연습했냐.”
“음. 그으게, 사실 안 했어.”
게임도 질려서 테이블 한쪽에 밀어두고, 나는 풀썩 엎드려 버렸다.
그러자 단테가 내 뺨을 쿡 찌르며 되물었다.
“연습해야 하지 않아? 올해 데뷔당트를 치르는 영애가 몇 안 되는 걸로 아는데. 삐끗하면 눈에 띌걸.”
“그건 알지만…….”
“유리 놈이랑 추기 싫은 거지? 다 알아.”
단테가 신이 나서 으스댔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지만 나는 단테의 웃는 얼굴이 보기 좋았기에 별말을 하지 않았다.
‘솔직히 심경이 복잡해서 춤을 출 만한 흥이 나지 않는 거야.’
오늘도 라흰은 이곳에 나타나지 않았다. 며칠 내로 여봐란듯이 등장할 줄 알았는데.
‘그렇다고 찾아가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때가 되니 손 놓고 기다리고만 있는 신세인 게 갑갑해.’
내가 모두에게 라흰이 갑자기 나타나 우리와 늘 함께 지냈던 것처럼 굴 거라는 말을 하지 않는 건, 소용이 없어서였다.
오히려 라흰이 그렇게 비집고 들어온 뒤에 내가 했던 말이 발목을 잡아, ‘라흰을 모함하려 한 애’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럴 바에야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낫지.
‘그래, 차라리 이대로 나타나지 마.’
내 인생을 휘젓지 말아줘.
“안 되겠다. 날씨가 이래서 그런가, 애가 축 처져서 녹은 치즈가 되어버렸잖아.”
“녹은 치즈라니.”
“너 말이야, 너.”
단테가 장난스레 타박하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자기도 내일이면 제게 주어진 기간이 끝나는 거라 울적해했으면서 내 기분을 풀어주려는 모습이 고마웠다.
“나랑 춤추자.”
“데뷔당트 춤을? 알아?”
“알지. 영애가 추는 건 어떻게 하는지 몰라도 상대역은 배웠어.”
아, 손이 참 따뜻하구나.
난 새삼스레 우리 둘의 손 크기가 많이 차이 난다는 걸 깨닫고 물끄러미 보았다.
“왜. 손도 잘생겼어?”
그러고 있으니 단테가 또 농담을 던져왔다.
“능글맞게 굴기는.”
난 샐쭉하게 대꾸하곤 자세를 잡았다. 그냥 연습을 안 한 것뿐이지 동작 자체는 다 외우고 있었다.
“허리에 팔 좀 감겠습니다, 레이디.”
내 왼손을 쥔 단테가 씩 웃으며 상체를 기울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