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s Daughter-in-law is Inherently Powerful RAW novel - Chapter (127)
악당의 며느리는 권력자 체질입니다-127화(127/173)
드레스는 새하얗고 눈부셨다.
보통 파티 드레스도 흰색을 많이 입는다지만, 이건 만듦새가 어딜 봐도…… 웨딩드레스가 맞았다.
이 풍성한 레이스며 사이사이 박혀 있는 최상급 진주를 봐. 길에서 아무 강아지나 붙잡고 물어봐도 웨딩드레스! 하고 짖을걸?
“그래? 흐응, 누나 머리 색이랑 잘 어울릴 것 같았는데. 마음에 안 들어?”
문득 나는 유리가 ‘누나’라고는 부르지만 존대를 쓰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릴 적엔 존대를 쓰는 게 좋다고 말했던 아이였는데…….’
“플로린 누나?”
흠칫한 내게 유리가 불쑥 다가와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드레스와 드레스 근처에 서 있는 시중인들의 얼굴을 번갈아 살폈다.
‘두려워 보여.’
나도 아르칼리크에서 수많은 시중인에게 둘러싸여 지내왔다. 그랬기에 난 지금 시중인들이 애써 감추려고 하는 감정이 무엇인지 쉬이 읽어 낼 수 있었다.
‘공포.’
설마 내가 여기서 이걸 거절하면 유리가 벌을 내리는 건가?
눈치껏 상황을 판단한 나는 침착하게 말을 골랐다.
“마음에는 들어. 그런데 나는 내가 한 번 정해둔 걸 바꾸고 싶지 않아.”
“이런, 그럼 내가 한발 늦었네. 누나가 저걸 입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는데, 아쉬워.”
“네 옷은 뭐로 준비했어?”
“아, 내 옷?”
유리가 제 등 뒤에 선 시종에게 눈짓했다. 얼굴을 눈여겨보니 낮에 드리블랴네 저택까지 나를 데리러 왔던 바로 그 시종이었다.
“당연히 누나 드레스랑 비슷하게 맞췄지. 데뷔당트에 같이 입장하게 될 텐데……. 어울리게 입으면 좋잖아.”
과연 네 의도가 그것뿐일까.
‘마치 내가 널 선택한 듯 보이게 하려던 건 아니고?’
아니면 아예 이대로 결혼식장까지 데려가겠다는 뭐 그런 의사 표현이었을지도.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나는 질문을 입 안에서 삼켰다.
‘황제를 많이 닮았네, 우리 유리…….’
분명 살랑거리는 봄바람처럼 사랑스럽게 웃고 있는데 몹시 위험해 보이는 것도 재주다.
나를 해치진 않겠지만, 나 외의 모두를 해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라 해야 하나.
‘햇살처럼 생겼는데 햇살캐가 아니라 피폐 흑막 집착남인 게 원래 제일 무서운 건데.’
나는 드레스를 유심히 살펴보는 척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내가 그냥 플로린이었으면 분명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려서 인생 자체가 하드 피폐물이 되었겠지만, 다행히도 난 ‘아르칼리크의 공주’인 플로린이었다.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빠가 아르칼리크의 전군을 데리고 쳐들어올 테니 나는 유리가 무섭지 않았다.
“난 누나에게 모든 걸 다 해주고 싶어. 그러려고 그동안 정말 많이 노력했다?”
“고생 많았겠다.”
드레스가 하도 풍성해서 토르소 너머에 있는 유리의 얼굴이 어떤지 잘 보이지 않았다.
넌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응. 누나는 앞으로 무엇도 스스로 할 필요 없어. 원한다면 그래도 되지만, 그냥 가만히 있어도 내가 다 해줄게.”
“다 해준다라…….”
나는 얼마 전, 단테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오늘 봤듯이 난 어린애 대하는 게 능숙해. 애는 내가 다 키울게. 넌 너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게.”
“응.”
“내가 가문 내에서 버티고 서서 널 평생 지지할 테니까…… 넌 나를 선택하기만 해, 플로린.”
단테도, 유리도 비슷한 궤의 말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의미는 하늘과 땅만큼 달랐다.
‘단테는 내 의지를 존중해. 내가 뭔가 하고 싶다고 하면 그걸 응원하고 지지하겠다는 거야. 그 외의 것을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도록 해주겠다는 거고.’
한 줄로 정리하자면 단테는 내조를 하겠다는 거다. 그러나 유리는…… 내 눈을 가리고, 귀를 막겠다는 뜻이었다.
한 줄로 정리하자면 유리는 수동적인 나를 원하는 거야.
“내가 필요 없다고 해도?”
내가 던진 조용한 물음에 유리가 멈칫했다.
그러더니 유리는 이내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난 누나가 원하는 걸 다 해주려고 좋은 황태자가 된 거야. 권력이 있어야 하니까.”
“…….”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황제의 일을 일찍 받아서 처리한 것도. 골치 아픈 문제들을 손보고 해결해 둔 것도 모두 같은 이유야. 나라가 안정되어야 너와 함께 있을 시간이 늘어나니까.”
아, 호칭 바뀌었네. 기분이 나빠졌나?
얼굴이나 태도에서 불쾌한 티는 전혀 나지 않았지만 나는 왠지 유리가 지금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도움이, 내가 해주는 것들이 필요 없다고 하면…….”
흐리는 말꼬리 끝이 서늘했다.
내가 선 이 자리가 겨울이 된 듯, 어디선가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것 같은 냄새가 났다. 착각이겠지만.
“누나가 말한 대로 백성들에게 사랑받는 황태자가 됐어, 나.”
“……응.”
“칭찬해 줄 만하지 않아요?”
아, 아리아드네 님도 이랬을까.
그래서 황제를 받아들였을까? 그것만이 상어의 흉포함을 누를 수 있는 길이라고 판단해서.
어느새 내게 다가와 부드럽게 손을 쥐는 유리는 세상에서 가장 측은하고 가여운 눈빛이었다.
마치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듯, 내가 자신의 목숨줄을 쥐고 있기라도 하다는 듯 손바닥에 뺨을 비비며 아양을 떠는 모습은 참으로 무해해 보였다.
누군가를 해칠 날카로운 이빨 따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아.
“유리야. 나, 길거리를 다니면서 데이트하고 싶어.”
그래서 이런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유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고 싶어서.
“지금 나한테 데이트 신청한 거예요?”
“응.”
“와, 기뻐라……!”
유리가 내 손에서 뺨을 떼더니 활짝 웃었다.
그늘이 완전히 걷힌 얼굴은 너무나 보송보송하고 귀여웠기에 방금 내가 느낀 서늘함이 망상이 아닐까 싶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거리 말고, 다른 곳에 가면 안 돼요? 내가 준비할게요. 첫 데이트니까.”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나는 장난을 치는 척 연기를 했다.
“그냥 길거리는 싫어? 백성들이 다니는 곳.”
“나를 보면 너무 소란스럽게 굴어서요. 누나랑 둘이서만 있을 수 있는 곳이 더 좋아요. 아! 하지만 누나가 부담스럽다면 오페라 극장은 어때요?”
귀족의 전유물인 공간. 당연히 황족인 이상 평민들과 섞이기 싫을 수 있다. 그걸 비난하는 건 전혀 아니었다.
다만…….
나는 그런 남자의 아이를 낳고 싶진 않았다. 그뿐이었다.
* * *
‘유리는 통제 성향이 극심해.’
그날 저녁, 나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목욕을 좀 즐기고 싶다고 했다.
사실 굳이 목욕이라고 한 건 혼자 있고 싶어서였다. 아니면 유리가 잠들 때까지 옆에 있을 것 같았거든.
‘통제 성향은 황태자라는 신분에는 어울리는 일이야. 하지만…… 남편으로서는 끔찍해.’
내가 아무것도 할 필요 없다고, 자기가 다 해주겠다고 하는 건 순도 100%의 진심이었다.
유리는 손수 나를 노천탕이 딸린 대욕실까지 안내했고, 시중을 들어줄 시녀 다섯 명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근처에 가지 않도록 명령했다.
목욕 하나 하는 걸로 부산을 떠는 게 어찌나 민망하던지.
게다가 시녀가 대체 다섯 명이나 붙어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첫째는 머리를 감겨주고 둘째는 몸에 비누칠을 해주고, 셋째는 물 온도가 적절한지 본다고 치고…… 넷째 시녀는 물건을 정리한다고 가정하자.
그럼 마지막 하나는 무얼 하는데?
내 앞에서 재롱이라도 떨어?
“목욕물 온도는 어떠셔요?”
“너무 뜨겁거나 차갑지는 않으세요?”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셔요.”
시중을 드는 시녀들은 모두 자작가 영애로 나와 비슷한 나이대였다.
내게 조금이라도 더 잘 해주지 못해 안달인 모습이 심히 부담스러웠으나 이건 기회이기도 했다.
내가 모르는 유리의 모습에 대해 알아볼 기회.
“온도는 괜찮아. 그런데 얘들아.”
“네, 플로린 님.”
“황태자 전하 말인데. 평소에도 다정한 분이니?”
재잘거리던 시녀들은 한순간 입을 딱 다물었다.
다섯 명 다 어려운 질문에 능숙하게 대처하기엔 나이가 너무 어렸던 것이다.
“그, 그럼요! 엄청 다정하세요.”
“그런데 사실 저희는 황태자 전하를 근처에서 모시지 않아서 잘 모르겠어요.”
“맞아요. 원래 저희는 황태자비 궁 소속이었거든요.”
“이렇게 플로린 님을 모시게 돼서 영광이에요!”
잠시의 침묵이 흐른 뒤, 시녀들은 마치 내가 지금 당장 황태자비라도 된 것처럼 대했다.
‘아닌데. 그럴 마음 없는데.’
라흰이라면 이렇게 유난 떨며 특별 대우받는 걸 즐겼을까 싶지만 난 아니었다.
“그렇구나. 황궁 내에선 황태자 전하를 다들 좋게 생각하나 봐.”
“당연하지요! 아주 아름답게 생기셨는데 박식하기까지 하시잖아요.”
내가 운을 띄우자 시녀들이 서로를 쳐다보더니 혼신의 힘을 다해 유리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제가 들은 게 있는데요, 황태자 전하는 정치나 외교 쪽으로 천재적인 자질을 지니고 계신대요.”
“거기다 플로린 님을 아주 사랑하고 계시잖아요.”
“결혼하시게 되면 행복하실 거예요.”
“옷도 잘 입으시고, 목소리도 맑고 예쁘시고, 눈웃음은 또 어떻고요.”
나는 시녀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현혹되지 않고 그들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말을 할 때 파르르 떨리는 눈꼬리, 입가를 매만지는 버릇, 머리칼을 꼬며 딴청을 피우고 있는 시선 등. 거짓말을 하거나 진실을 숨기고 적당히 둘러대고 있는 게 명백히 드러나는 징후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