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s Daughter-in-law is Inherently Powerful RAW novel - Chapter (134)
악당의 며느리는 권력자 체질입니다-134화(134/173)
* * *
‘오래 기다렸다니?’
잠시 후, 나는 시녀들에 의해 다시금 완벽한 차림으로 바뀌었다.
새하얀 드레스는 예술 작품에 비견할 만한 했고, 거기에 맞추어 장신구와 구두까지 다 마련이 되어 있었기에 다 꾸민 내 모습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까와 옷차림이 달라졌어도 사람들은 아마 내가 애초에 두 벌을 준비했노라고 여기겠지.
게다가 입장할 때 이미 붉은 것을 입고 그 뒤에 흰 것으로 갈아입은 거라 웨딩 드레스 같다고 한들 딱히 의미 부여가 될 것도 아니었다.
‘요술봉을 항상 가지고 다녀서 다행이지…….’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치맛자락을 살짝 쥐었다. 이제 유리가 있는 곳으로 갈 시간이었다.
‘그보다, 이안이 한 말. 내가 듣고 싶은 대로 해석해도 되는 걸까?’
단순하게만 생각하자면 데이트 순서가 가장 끝이라서 오래 기다렸다는 말이리라.
하지만 이안이 한 말이니까 분명 속뜻이 있겠지.
‘어쩌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나만 기다려 왔다는, 그런 의미일지도 몰라.’
또각또각. 새틴 구두에 박힌 다이아몬드 굽이 대리석 바닥에 닿자 맑은 소리가 울렸다.
복도로 나가니 이안이 벽에 느슨히 기대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담비 모습일 때야 어깨에서 앞구르기도 할 수 있다지만 이렇게 갖춰 입고 나니 조금 부끄러워져서 나는 괜히 눈길을 돌렸다.
물론…… 이안이 나를 그대로 내버려 둘 리는 없었다.
“아까도 안 쳐다보더니. 섭섭한걸.”
“어, 어색해서 그래. 어색해서! 아하하.”
누가 들어도 어색함에 몸부림치는 사람의 웃음이었다.
이안은 ‘흐응’하는 콧소리를 내더니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나를 향해 상체를 슬쩍 숙였다.
“빨개졌네. 예쁘게.”
“!!!”
귓가에 입김이 닿자마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댔다.
내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이 나 스스로조차 너무나 당혹스러웠다.
‘왜 눈을 못 쳐다보겠지……?’
머리를 거쳐서 생각을 한번 하고 나오는 반응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속수무책일 뿐.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어째서 나를 만나러 오지 않았느냐고 원망을 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그런 건 쑥 들어가 버렸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어른이 된 걸 축하해. 내가 많이 늦었지.”
“으응, 아니…… 괜찮아.”
“많이 보고 싶었어, 플로린.”
담백하면서도 진중한 한 마디였다.
무게감이 실린 그 부드러운 말에 나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아, 그런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단테랑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잘만 나눴던 것 같은데.’
쿵. 쿵.
심장에 무게추라도 달린 것처럼 자꾸 가슴이 내려앉는 탓이리라. 입을 떼기가 힘든 건 말이다.
이안은 차마 못 쳐다보고 복도에 깔린 그림자만 흘긋대던 나는 그가 갑작스레 멈춰 서자 움찔하며 돌아보았다.
“왜, 왜?”
“벽을 뚫을 기세로 힘차게 걷는 건 좋지만, 황태자와 교황은 여기에 있어서.”
“아……!”
그제야 정신이 확 든 나는 이 복도에 우리 둘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거대한 문 앞에는 근위 기사들이 지키고 서 있고 복도 끝에는 시종들이 대기 중이다.
‘조금만 주의 깊게 봤어도 카펫의 문양과 색이 달라진 것으로 유리가 있는 곳에 왔음을 알아차렸을 텐데!’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나는 손부채질을 하다 너무 요란스럽나 싶어 그만두었다. 그러자 더위가 몰려와 얼굴이 점점 붉어지는 게 느껴졌다.
“애기야.”
근위 기사가 문을 열어 준 순간, 이안이 나직이 나를 불렀다.
자연스레 이안을 바라보게 된 나는 무심코 그의 눈이 참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 주에 여행 가지 않을래?”
……아.
이안은 자꾸만 나를 여름 한가운데 데려다 놓는다.
찬란한 그 계절이 내 안에 쏟아지는 것만 같아서, 나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 아직 견디는 법도 모르는데 중독될 것만 같았다.
* * *
‘나, 이안에게 반했나 봐.’
머릿속을 채운 생각 하나가 점점 부피를 키우는 바람에 나는 자리에 앉아서도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했다.
아마도 교황은 끈질기게 나를 신성 제국에 초청하겠노라 했고 유리는 개소리하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분명한 건 교황 개인뿐만 아니라 교황청 전체가 라흰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라흰을 깨운 것으로 광신도들이 지펴 놓은 불은 껐는데, 문제는 그 이후에 라흰이 큰 쓸모가 없었다.
신의 말씀을 듣고 전하는 것도 아니요, 열심히 봉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하물며 정치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결론적으로 지금 라흰은 ‘골칫덩이’ 그 자체였다.
사소한 문제라면 그래서 교황청이 나를 데려가는 것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거였다. 대체할 사람이 있어야 기존의 성녀를 내쫓을 명분이 생기는 거니까.
“다시 돌려보내지 않을까 봐 그리 걱정되시면 아르칼리크의 왕과 함께 오시면 되지 않습니까?”
어차피 신성 제국에 가 줄 생각 따위, 조금도 없었기에 대충 흘려듣고 있던 나는 그 순간 눈을 치떴다.
저게 무슨 뻔뻔한 소리야?
“그저 오셔서 라흰이 가짜 성녀라고 말씀만 해주시면 됩니다. 진짜라니까요.”
“……허.”
“그런 김에 신성 제국 구경도 하시고, 아르칼리크인들과 함께 오시면…… 뭐, 세 나라의 화합이 이룩되는 거죠. 어떠십니까? 제 뒤통수를 친 값으로 적당할 것 같은데요.”
말이 말 같아야 상대를 하지.
그냥 이안의 말대로 몇 대 더 때려서 아예 기억을 잃게 만들걸 그랬나 봐.
‘어디 감히 우리 아빠더러 오라 가라야?’
대꾸할 가치가 없는 말이라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대답을 하긴 해야 했다.
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턱을 치켜들었다.
“교황께서 관에 들어갈 때만 보인다는 본 얼굴을 보여주시면, 기꺼이 제 아버지이자 아르칼리크의 위대한 왕께 말씀을 드려보지요.”
그런데 그 순간. 눈 한 번 깜빡이는 것보다도 더 짧은 찰나에, 교황의 표정이 무너졌다. 뭔가 못 들을 말을 들은 사람처럼 몹시 기분이 상한 듯한 느낌.
금세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돌아왔지만 나는 똑똑히 보았다.
‘어느 부분에서 무너진 거지?’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본 얼굴을 보여주라는 말? 아니면, 아르칼리크의 ‘위대한’ 왕이라는 말?
어느 쪽이든 시험해 봐야겠지.
나는 일부러 비꼬는 듯한 어조를 유지하며 툭 던졌다.
“왜요. 제가 필요하다며 이렇게 긴 시간 내내 귀찮게 구셨으면서 본 얼굴 한 번 못 보여주시겠습니까?”
“아아, 그게 말입니다. 저도 정말 보여드리고 싶은데…… 교황청의 법은 신께서 직접 만드신 거랍니다. 그걸 어찌 깨겠습니까?”
교황은 곧바로 받아쳤다.
나는 속으로 진짜 천신에게 물어나 볼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다가 묻어두고 다음 미끼를 던졌다.
“그렇다면 이해하시겠네요. 제 아버지는 아버지이기 전에 위대한 왕이세요.”
실룩. 교황의 입매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거슬려 하는 게 이쪽이구나.’
제 진짜 얼굴을 내보이지 않고 살아가는 만큼 교황은 포커페이스에 능했다. 천성이 능글맞고 연기도 잘하는 것 같고.
그렇다면 지금 이 반응은 ‘죽는 것보다도 더 싫어서’ 참지 못해 꾹꾹 누르고도 툭 튀어나온 거라는 뜻이 되었다.
‘설마 지금까지 그렇게 집요하게 군 게…… 내가 아니라, 나를 미끼로 아빠를 끌어내기 위해서?’
하지만 왜?
교황이 그럴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빠를 부를 때 ‘위대한 왕’이라고 하는 건 너무 당연한 거였다. 아르칼리크 인들은 아빠를 진심으로 위대하다고 생각했고 사랑과 존경을 담아 그렇게 불렀다.
근데 신성 제국 사람인 교황이 어째서 그걸 배알 꼴려 하지?
“그런데 그쪽 사정에 맞춰 오라 가라 한다니……. 아르칼리크의 공주로서 몹시 불쾌합니다. 방금 발언은 사과해 주셔야겠어요. 제가 아닌, 제 아버지께요.”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나는 교황의 정체를 알아내고 싶었다.
부디 본색을 좀 더 드러내면 좋겠는데.
‘교황은 죽을 때까지 본 얼굴을 결코 보이지 않다가…… 죽어서야 얼굴을 드러낸다.’
지금까지 딱히 의심한 적 없는데, 그거 말이야.
시신 바꿔치기를 하기에 딱 좋은 설정 아닌가? 무슨 얼굴이든 진위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잖아. 죽었으니 신성력이 나오는 것도 아닐 테고.
나는 다리를 탁 꼰 채 허벅지에 팔꿈치를 대고 불량한 자세를 취했다.
내가 이렇게 오만불손하게 굴면 저쪽에서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눈앞에 계신다면야 얼마든지 사과를 드리지요. 그게 뭐가 어렵겠습니까? 하지만 보이지 않는 분께 죄 사함을 청하는 건…… 오직 신께만 하는 일이어서요.”
혓바닥이 참 잘도 굴러간다.
나는 이제 진심으로 저 낯가죽 아래에 있을 교황의 진짜 얼굴이 궁금해졌다.
어떤 증오를 담고 일그러져 있을까?
‘화이란은 얼굴을 바꿔 쓰는 것을 일컬어 인피면구라고 불렀어. 마법이 아니라, 가죽 같은 것으로 만든 가짜 얼굴이었지.’
흔한 삼, 사십 대가 아니라 몇백 살은 먹은 듯 유들거리는 태도.
능구렁이나 다름없는 말솜씨.
바뀌는 얼굴.
아빠에 대한 알 수 없는 증오심.
나는 그 모든 단서로 한 가지 사실을 유추해 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