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s Daughter-in-law is Inherently Powerful RAW novel - Chapter (149)
악당의 며느리는 권력자 체질입니다-149화(149/173)
제 12장. 라흰의 세 번째 소원
“또 늦잠이세요?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아이고, 답답해!”
뭐지? 내가 지금…… 어떻게 된 거야?
“제발, 성녀면 성녀답게 좀…… 체통 좀 지켜주세요. 배를 그렇게 다 내놓고 침 흘린 자국까지!”
그게 무슨 소리야?
머리가 지끈거린다. 누군가가 귀 옆에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뇌진탕이 올 것 같았다.
욱신거리는 관자놀이에 손을 대고 엉거주춤 상체를 세운 나는 눈살을 확 찌푸렸다.
전신의 감각이 깨어나자 제일 먼저 어디서 나는 건지 모를 묵은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거기에 더해서 물이 고여 썩어가는 퀴퀴한 냄새도.
여긴 내 방이 아닌데.
“에휴. 내 신세야. 어쩌다가 이런 망나니 같은 분을 떠맡아서는…….”
몸을 일으켜 두통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정신이 차츰 돌아왔다.
나는 이끼 낀 돌 천장과 그 아래 달랑 붙어 있는 작은 창문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심지어 창틀의 나무는 좀 썩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감옥인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는 없는 환경이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 사람은 누구지?
간수는 아닌 것 같은데.
뭣보다 고개를 돌려 보니 좁은 방 한쪽에 쇠창살이 아니라 나무로 된 문이 보이긴 했다.
‘정말로 여기가 침실……이라고?’
나는 황당해하며 시선을 미끄러트려 여자를 응시했다.
내 앞에서 무어라 짹짹대는 여자는 일단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입고 있는 옷은 새하얗고 발목을 다 가릴 만큼 길었는데, 결코 질이 좋은 천은 아니었다.
나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이 옷차림이 어느 나라의 것인지 깨달았다.
신성 제국!
“제 이야기 듣고 계신 거예요? 성녀님!”
벼락과도 같은 충격에 눈을 커다랗게 뜬 내게 여자가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그러고는 또 한숨을 팍 내쉬었다.
“아무튼 제가 짐 못 싸드리니 그렇게 아세요. 반나절 안에 알아서 다 싸시고요. 아무거나 다 들고 갈 거라고 떼쓰지 마시고요!”
“짐?”
나는 무심코 반문했다.
여자는 도끼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았지만 꾹꾹 눌러 참는다는 표정을 하며 설명을 덧붙였다.
“마도 제국에 가져갈 짐이요! 설마 내일이 출발인 것도 잊으신 건 아니죠?”
순간, 나는 모든 것을 깨달았다.
눈앞의 이 여자는 신관이다. 그리고 내가 있는 곳은 신성 제국. 아마도 라흰의 거처일 테지.
믿기지 않았지만 나는 최대한 차분하려고 노력하며 아무거나 집히는 대로 꽃을 연성하려 해보았다.
‘안 돼.’
내 안에서 뿌리가 뻗어나고 줄기가 피어오르더니 꽃잎이 만개하는 그 느낌이…… 사라졌다.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할 수 없었던 것처럼.
‘왜, 왜 안 되지?’
설마 라흰이 빈 소원이 몸을 바꿔 달라는 건가?
그래서 안 되는 거야?
“거, 거울. 거울은 어디에 있어?”
“여기……요?”
후다닥 침대를 벗어난 나는 신관이 내미는 거울을 받아 들고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부릅뜬 두 눈과 경악이 어린 낯은 어색했지만 동그란 눈매, 동그란 코, 동그란 턱은 그대로다.
그대로인데.
“밤색 머리…….”
아르칼리크의 상징인 내 자랑스러운 은발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충격적인 일이었다.
* * *
그 날 저녁, 나는 모든 상황을 분석하고 파악했다.
받아들이진 못했지만 일단 파악은 했다는 소리다.
나는 커다란 종이에 두 명의 여자아이를 그렸다. 그리고 거기에 각기 ‘라흰’과 ‘플로린’이라고 이름을 썼다.
‘내가 라흰이 남긴 저주 물품 같은 걸 보면서도 느낀 거지만…… 이 애, 정말 독창적이야.’
생각이 남다르다.
물론 칭찬은 아니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몸이 바뀌어야 하는데…….’
나는 내 몸 그대로였다.
그럼 왜 머리 색이 바뀌고 연성술을 사용하지 못할까? 어째서 얼굴은 그대로고?
‘아르칼리크의 공주라는 상황을 빼앗겼기 때문이야.’
즉, 라흰의 세 번째 소원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는 거였다.
너무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오지만 그건 실제로 이뤄졌다.
나는 ‘라흰’이라 쓴 이름 밑에 몇 가지를 더 적어 내렸다.
아르칼리크의 공주.
연성술사.
드리블랴네의 20대 안주인.
이게 내가 가지고 있었던 사회적 지위였다. 지금은 라흰의 것이 되었지.
기가 막힌 일이었다.
나는 내 이름 밑에도 몇 가지를 적어 내렸다.
키락서스 드리블랴네에게 추근댄 성녀.
그러다 전 세계에 겨울을 불러옴.
깨어나서도 뉘우치는 기색 없이 안하무인으로 군…… 성녀, 플로린.
한 자, 한 자 쓰는데 손이 떨렸다.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나서 팔짝 뛸 것만 같았다.
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라흰의 악명을 그대로 뒤집어썼잖아!
오물에 빠진 것만 같은 기분이다. 너무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하아.”
나는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종이를 구겨버렸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라흰이 나인 척하는 동안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굴어댈지!
분명 평판이 나빠질 거야.
그 뒷수습은 내가 또 해야겠지.
‘게다가 선택은? 선택은 어떡해?’
마지막에 라흰과 눈이 마주치면서…… 쓰러졌던 것 같다.
내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면 가주 할아버님은 분명 선택의 시간을 미루겠다고 하실 터였다.
몸이 안 좋은 아이에게 바로 다음 날 다시 선택하라고 강요하진 않으실 거야.
‘제발. 내가 마도 제국으로,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이봐요, 천신 씨.
듣고 있으면 뭐라고 말이나 좀 해 봐요. 멱살 잡기 전에!
그러나 야속하게도 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씩씩거리며 입에서 불을 뿜기는 했지만 나는 천신이 지금 내게 나타날 수 없는 이유를 알고 있기는 했다.
‘천신이 이 세상에 간섭하면 악신도 그럴 수 있어.’
지금 상황은 명백히 내가 한 방 먹은 거다. 그런데 악신이 자유롭게 움직일 여지를 더 줄 수는 없었다.
‘내가 알아서 해야 해.’
무엇보다, 내겐 믿는 구석이 있었다.
다름 아닌 유리였다.
내가 무엇으로 환생했는지까지 다 아는 유리라면, 분명 지금 이 상황을 알 것이다.
아니, 알아야만 했다.
천신이 나를 위해 유리를 안배했다고 했잖아.
‘하아. 유리가 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게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이야.’
나는 깃펜을 내려놓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자부심 넘치는 은발이 아니라 밤색 머리칼이 쥐여지는 게 기분이 참 뭣 같았다.
‘라흰. 네가 뭔데 감히 내 것을 탈취해.’
이건 강도질이었다.
그냥 소리소문없이 나타나서 원래 함께 살던 사람처럼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이딴 짓을 해?
‘두고 봐. 용서하지 않을 거야.’
이가 갈린다.
내가 내 자리를 허무하게 놓칠 것 같아?
어떻게 거머쥔 행복인데.
내가 그간 헤실헤실 웃고 살았던 건 드디어 찾은 행복에 푹 잠겨 헤어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 웃는다고 해서 그게 내가 가진 걸 송두리째 빼앗겨도 그저 웃을 만큼 나약하다는 의미는 아냐.
‘어차피 이 세상에 너 아니면 나. 둘 중 하나만 살아야 한다면.’
사는 건 내가 되어야지.
아버님이 어떻게 해주셨는데…….
나는 두 눈을 꾹 눌러 감았다.
라흰에 대한 분노와는 별개로 마음이 괴로웠던 것이다.
아마 악신이 만들어냈을 영혼의 통로, 혹은 그 비슷한 무언가 너머에서 라흰을 마주했을 때. 바로 그 순간에 내 안에서 정보가 터져 나왔다.
그건 그간 천신이 보물 상자에 꾹꾹 눌러 담아 내게 보여주지 않았던 정보들이었다.
예를 들면, 이게 플로린으로서 내 두 번째 삶이라는 것. 그리고 첫 번째 삶에서는 이미 한 번 라흰을 이긴 적 있다는 것.
하지만 내가 다이스 중독으로 죽는 바람에 모든 게 어그러졌다.
‘악신은 내 아빠와 계약했고, 아빠는 게이트를 열어서 세상을 멸망시켰어.’
크게 후회한 아버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시간을 돌렸다.
하지만 거기서 끝내지 않고 이번엔 자신이 먼저 악신과 계약을 해버리셨다.
게이트가 열리는 것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그리고 세상의 모든 다이스를 찾아 감추셨어.’
오직 내가 행복하게, 오래 살기를 바라셔서.
나는 그 거대한 사랑의 깊이를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스스로 악신의 계약자가 되시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러고도 어떻게 생색 한 번 내지 않으셨을까.
나는 아버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다가 내 가슴을 움켜쥐었다.
마음이 찌릿거리고 너무 아팠다.
아버님은 분명 강한 분이시지만, 이 모든 걸 혼자만 짊어지고 계셔야 했다니.
‘아버님이 소원을 쓰셨을지 아닐지는 모르겠어.’
천신은 분명 소원을 빌게 되면 영혼이 불구덩이에 처박힌다고 했다. 영원의 고통에 빠질 거라고.
설마 아버님이 소원을 빌었을까 싶지만…… 만약에 그러셨다면.
나는 더더욱 라흰을 꺾고 이 세계에서 악신을 쫓아내야 했다.
아버님의 영혼이 고통받게 둘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신들이 형제 싸움을 도대체 왜 세계 단위로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분노와 슬픔. 그리고 감동이 뒤섞여 눈물이 났지만 울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나중에, 집에 돌아가고 나서 해도 된다.
‘그래, 집.’
내가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된 건 모두 이안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