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s Daughter-in-law is Inherently Powerful RAW novel - Chapter (150)
악당의 며느리는 권력자 체질입니다-150화(150/173)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아까부터 줄곧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다정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코끝을 톡 건드리는 이안. 내게 팬케이크를 만들어준 이안.
나와 입맞춤을 한 이안…….
‘그 이안이, 신성 제국 성녀를 마도 제국으로 불러오자고 말해줬어.’
그 덕분에 수월하게 마도 제국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아니었다면 이렇게 평판이 나쁜 상태로 마도 제국에 가겠다고 주장해 봐야 먹히지 않았겠지.
“성녀님. 저녁 식사하세요!”
그때였다.
아까 보았던 그 여자 신관이 낑낑거리며 어깨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내일 여행을 가야 하니까 오늘은 평소보다 좀 더 단출해요. 그래도 불만 갖지 마세요. 기름진 걸 드시면 꼭 배 아프다고 하시잖아요. 자업자득이에요.”
다행히 이 이름 모를 신관은 수다스러웠다. 말이 굉장히 많은 편이었기에 나는 그녀에게서 이런저런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어도 스스로 술술 알려주니 어찌나 편한지.
“참, 이건 성녀님의 일정표예요. 어차피 보지도 않으시겠지만요.”
“일정표?”
식사는 정말 단출했다.
검은 보리빵 두 덩이와 콩알만 한 버터. 그리고 무엇인지 정체 모를 생선찜이 다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건 내게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나는 음식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신관이 내미는 종이를 받아 들었다.
거기엔 라흰, 그러니까 이제는 내가 뒷수습을 해야 하는 수많은 일정이 빽빽이 적혀 있었다.
“마도 제국까지 가는 김에 마을을 몇 군데 들를 거예요. 거부하실 수 없어요. 떼써도 안 돼요. 아픈 척도 안 먹혀요. 교황님이 같이 가시니까요.”
라흰이 평소에 그랬나 보구나…….
또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아 나는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아무튼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거지. 그리고 나는 라흰인 척해야 하고.
‘아냐. 좋게 생각하자.’
성력이라면 내게도 있다. 누군가를 치유해 줄 수 있다면 보람찬 일이지.
라흰 대신이든 뭐든 간에 의미 있는 일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마음을 다스린 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신관이 아주 미심쩍게 쳐다봤다.
“실례되는 발언이지만…… 오늘 뭔가 기분 좋으세요?”
“기분이 좋아 보이니?”
“……네. 욕을 안 하시잖아요. 당연히 욕하실 줄 알았는데……?”
아, 라흰. 너 진짜.
나는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꾹 눌러 감추며 눈가를 휘었다.
“사람이 바뀌기라도 했나 보지.”
“오! 맞아요! 그런 느낌이에요. 사실 아까부터 그랬어요. 제가 아는 플로린 님이 아닌 것 같은?”
억울해!
이 모든 ‘상황’이 내 것이 되는 바람에 저 신관은 당연히 나를 ‘플로린 님’이라고 불렀다.
일의 선후 관계는 다 납득했는데 별개로 자꾸만 울컥하고 분이 올라왔다.
‘하. 아무튼 이 신관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앞으로의 여정이 편할 것 같은데.’
이미 망한 관계라 사이가 몹시 나쁠 법도 한데 이 신관은 나를 꽤 챙겨주려는 기색이었다. 고맙게도 말이다.
‘성녀의 태도가 대단히 실망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녀이기 때문에…… 기대하는 게 있는 거야.’
이 나라 사람들은 신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니까.
즉, 내가 변한 모습을 보여주면 포섭할 수 있다. 가능성이 있었다.
“발목을 다쳤구나.”
신관의 행동거지를 유심히 뜯어보던 나는 신관이 아까부터 한쪽 다리를 절뚝거린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언제부터 이랬니?”
“악! 들추지 마세요!”
“환부를 봐야 치유를 해주지.”
고작 발목 부상인데, 그걸 낫게 해주는 건 내게 숨 쉬듯 쉬운 일이었다. 조금도 힘들지 않거든.
신성력이 있다며 앞장서서 나서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지만, 눈앞에 보이는 사람을 치료하는 건 할 수 있었다.
“어휴, 정말! 왜 안 하던 행동을 하세요.”
하지만 신관은 내 제안을 거절했다.
분명 옷자락 아래로 퉁퉁 부은 발목을 봤는데도 말이다.
“신께서 내려주신 귀한 힘을 저 같은 것에게 쓰지 마세요.”
“……너 같은 것?”
눈썹을 추켜세웠으나 신관은 그런 내 반응을 보지 못한 듯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요! 저한테 잘 해주셔 봤자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다니까요? 전 그놈의 키락서스 드리블랴네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요!”
“!”
아닌데. 이거 완전 아는 사람의 반응인데.
‘만약 아버님을 만나 뵐 수만 있다면……!’
……잠깐.
희망은 빠르게 차오른 만큼 급속도로 꺼졌다.
아버님이 과연 나를 알아봐 주실까?
첫눈에 알아보긴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지금 아버님을 찾아 헤매면 집착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었다.
‘그래. 돌아가고 나서…… 그다음에 아버님을 찾자. 나와 라흰을 가까이 놓고 비교하면 알아채실지도 몰라.’
라흰이 지독한 술수를 부렸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내가 해야 할 건, 라흰처럼 구는 게 아니라…… 누가 봐도 변했다는 말이 나오게끔 성녀답게 행동하는 거야.’
아버님이 내가 진짜라는 것을 알아보실 수 있도록.
어떻게든 눈치를 채실 수 있게끔 말이다.
“에잇.”
“꺅! 뭐, 뭐 하세요!”
“네가 치료를 받지 않겠다기에 내 멋대로 낫게 했어. 그런 발목으로 어떻게 긴 여행을 가겠다는 거니?”
마음 정리를 끝낸 나는 손가락을 가볍게 퉁겨 신관의 발목을 치유했다.
그런 다음, 접어뒀던 종이를 펼쳐서 가장 첫 문장부터 꼼꼼하게 읽기 시작했다.
‘새벽 다섯 시에 눈 뜨자마자 기도부터라…….’
성녀 생활, 굉장히 빡세네.
나는 감동과 의심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하는 신관의 등을 밀어 방에서 내보냈다.
저 일정을 다 소화하려면 지금 잠이 들어야만 했다.
* * *
“헉!”
“서, 성녀님?”
“내가 지금 헛것을 보나?”
이튿날, 새벽 다섯 시 삼십 분.
정갈한 차림으로 기도실에 도착한 나를 보며 미리 나와 있던 신관들이 입을 쩍 벌렸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제일 앞쪽 의자에 가서 앉았다.
신전 내에도 규율이나 서열이 있겠지만…… 난 그것까지는 잘 몰랐다.
다만 성녀니까 상석을 차지해도 될 것 같아서.
‘휴. 무사히 왔네. 라흰이 기도실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라서 다행이지.’
일단 나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두 손을 모은 뒤 고개를 숙였다.
입을 열어서 하는 게 기도가 아니니까……. 뭐, 이러고 있으면 기도하는 줄 알겠지.
‘그 신관은 나중에, 모든 게 제대로 돌아가면 찾아서 내 곁에 두고 싶을 지경이야.’
새벽 다섯 시가 되자 어제의 그 신관이 나를 찾아왔다. 당연히 내가 스스로 일어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깨우기도 전에 옷을 스스로 갈아입은 나를 보더니 신관은 ‘내가 잠이 덜 깼나…….’ 하고 중얼거렸다.
그런 다음 신관은 대충 시중을 들어주고, 여기까지 안내도 해주었다.
책임감이 강하고 정도 깊은 사람 같았다.
‘그래. 라흰 옆에 있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좋은 사람이야.’
빼앗아야지.
라흰이 가졌던 좋은 것이 있다면 작은 거라도 모조리 내가 차지할 것이다.
라흰이 먼저 내 인생을 강도질 했는데 이 정도도 못 할까.
“성녀님, 졸면 안 돼요. 아셨죠?”
“기도 중이란다.”
“아이참, 어제부터 왜 이러세요. 진짜 다른 사람처럼…….”
내 곁에 슬그머니 앉은 신관이 목소리를 낮추어 종알거렸다.
기도실에서도 저리 수다스러워서야.
신관보다는 시녀가 더 적성에 맞을 것 같은데.
약 30분 뒤. 기도실을 나서며 나는 신관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너, 이름이 뭐니?”
“헉!”
“왜 그리 놀라? 내가 여태 네 이름을 몰라서?”
라흰이 과연 이 애의 이름을 알았을까?
그럴 리가 없다.
안하무인에 천방지축, 철이 없고 제멋대로인데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조금도 알지 못하고 오직 저만 위하는 게 라흰이었다.
그런데 제 시중을 들어주는 애의 이름을 알 리가.
그렇게 확신했기에 한 질문이었다.
“어…… 제, 제 이름을 물어봐 주셔서요. 3년 동안 한 번도 안 물어보셨잖아요.”
“3년? 벌써 3년이나 됐어?”
“네. 처음 소개할 때 이름을 말씀 드렸었는데 이후로 성녀님이 야, 라고만 호칭하셨어요.”
“…….”
할 말을 잃은 나를 흘끔 보며 신관이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샌디요.”
“샌디.”
“네. 샌디에요. 그…… 지금이라도 이름 불러주시면 조, 좋을 것 같은데…….”
샌디가 눈치를 보더니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흥미진진하게 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서둘러 할 일을 하러 떠나야 할 다른 신관들이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다들 귀를 쫑긋 세우는 것이, 내가 뭐라고 하는지 듣고 싶은 모양인데-
“그래, 샌디. 앞으로 기억할게.”
“!”
“그간 사람 같지도 않은 걸 모시느라 고생 많았어. 앞으로는 잘 대해줄게.”
이건 진심이었다.
세상의 모든 목숨이 소중하다는데 라흰은 아냐.
어떻게 이렇게 본데없이 자란 애가 다 있지?
“커흠, 저는 룩스입니다.”
“저는 윌라에요.”
“저는…….”
그때였다. 훔쳐 듣고 있던 신관들이 내게 다가오더니 제 이름을 뱉기 시작했다.
모두 이 여정에 함께하는 사람들인지 신관복치고 매우 간소한 여행 복장을 하고 있었다.
“다들 반가워. 나를 어제까지와는 다른 사람으로 생각해 줬으면 해. 사람이 바뀌었다고.”
나는 그렇게 강조했다.
나중에 원위치가 되면 이들이 내 말을 기억하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