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s Daughter-in-law is Inherently Powerful RAW novel - Chapter (157)
악당의 며느리는 권력자 체질입니다-157화(157/173)
* * *
‘저급하기는.’
그렇게 방을 빠져나온 이안은 그보다 더 싸늘할 수 없는 표정으로 창문을 응시했다.
‘나와 그녀가 간 곳은 소박한 바닷가의 마을이었어. 제일 처음 먹은 음식은 파르페가 아니라, 내가 만든 팬케이크였지.’
역시나 저건 가짜다.
이렇게 덫을 놓고 확인하기 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진실을 마주하니 입이 썼다.
“어, 벌써 끝났어?”
그때였다.
그림자가 짙게 진 복도. 책 한 권을 손에 쥔 채 읽어 내리고 있던 사내가 이안을 향해 흘긋 시선을 던졌다.
온 세상의 반짝거림을 모아 빚어놓은 듯한 유리의 행색은 이안과는 정반대의 의미로 눈에 띄었다.
이안은 복도 끝에서 유리를 훔쳐보고 있는 하녀들을 눈짓하고는 이내 턱짓을 했다.
“헉, 어디 갔지?”
“사, 사라지셨어!”
먼저 신형이 사라진 건 유리 쪽이었다. 이어서 이안 역시 그 자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에 구경꾼들이 당황하며 소리를 질렀다.
“저것들도 전부 목을 비틀어 놓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되겠지.”
눈 깜짝할 사이에 저택의 지붕에 올라선 유리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안은 유리의 개소리를 능숙하게 넘기며 할 말을 꺼냈다.
“협력하지.”
단출한 한 마디지만 지금 필요한 건 사실 그뿐이었다.
유리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까딱였다.
“저게 가짜라는 걸 나만 알아챈 게 아닌 건 좀 아쉽지만, 뭐. 중요한 건 진짜를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되돌려 놓는 거니까.”
“진짜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나?”
“뭐어, 글쎄.”
빙글빙글 웃는 유리와 입꼬리를 슬쩍 올린 이안이 서로를 탐색하듯 응시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유리였다.
“그래서. 저 멍청이는 어떡할 거지?”
유리는 제 이부 형을 향해 ‘멍청이’라는 표현을 쓰는 데 거침없었다.
이안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지만 사실 그 역시 반쯤은 동의하고 있었기에 부정하지 않았다. 안됐지만 당장 단테가 해야 할 역할이기도 하고.
“저 가짜가 의심하지 않게 하려면 단테는 저대로 둬야 한다. 가짜가 하는 짓을 단테가 일일이 다 받아주어야 해. 가짜가 이상 행동을 하거나 의심받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아. 단테는 사실을 다 알고도 연기할 성격이 못 되겠지.”
“아무래도 기사니까.”
이안은 그렇게 단테를 두둔했다.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는 게 기사의 덕목 아니던가. 황태자인 유리나 조커의 단장인 그는 연기를 숨 쉬듯이 할 수 있지만 단테는 불가능했다.
‘만약 저게 가짜라는 걸 알면 곧바로 칼부터 빼어 들 녀석이지.’
그러니 단테는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다.
‘단테를 라흰의 옆에 쐐기처럼 박아두고 그사이 진짜의 행방을 찾아야 한다.’
한데 의아한 점이 있었다. 바로, 상어의 애착에 관한 것이었다.
‘진짜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면 저렇게 태연할 리가 없어. 황궁을 뒤엎어서라도 모든 병력을 수색에 끌어다 썼을 놈인데.’
그러므로 이안은 유리가 ‘진짜’의 행방을 안다고 생각했다. 혹은…… 이 사태를 만든 것이 유리 본인이거나.
후자라면 그는 기필코 유리를 죽이고 말 터였다.
젊은 시절에는 못 죽이더라도 나이가 들고 노인이 되어서까지 강할 수는 없지 않은가. 꾸준히, 지속적으로, 오래, 인내심을 가지고.
이안은 그렇게 누군가를 괴롭힐 수 있는 인물이었다.
“아, 표정 살벌하네. 나한테도 연기 좀 해주면 안 돼?”
유리는 그런 이안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물론 이안 역시 속이 읽힌다는 걸 알면서도 표정 관리를 하지 않는 거다.
둘은 너무도 비슷하게 닮아 있었고 그래서 서로를 잘 알았다.
“연기를 해봤자 먹히지도 않을 건데 시간 아까운 짓을 뭐 하러.”
“형제간에 계산 참 알뜰하기도 하지.”
“언제부터 네가 나를 형으로 여겼다고.”
이안은 무심히 대꾸하고는 한발 물러났다.
어차피 오늘쯤 수하가 조사를 명한 자료를 가지고 올 것이다. 그걸 보면 확실해지겠지.
‘신성 제국의 성녀와 마도 제국의 성녀가 바꿔치기 된 건지 아닌지.’
초조하다. 입이 바짝 말랐다. 그녀가 무사할지, 괜찮을지. 어디 아픈 건 아닐지.
‘유리가 가만히 있는 걸 보면 무사히 있기는 한 모양인데…….’
가장 귀한 자리에서 가장 좋은 것만을 누려야 하는데 고생이라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그리고 그 걱정만큼 가짜가 증오스러웠다.
“진짜가 돌아오면 가짜의 처리는?”
“그건 생각을 좀 해봐야겠어. 죽이는 건 너무 간단한 일이잖아?”
유리는 냉엄하게 굳은 이안의 입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꾹꾹 눌러 위로 올렸다.
“웃고 지내. 광대가 할 일은 웃는 건데 울상이면 어째?”
“내가 웃음을 파는 건 한 명뿐이어서.”
이안은 같잖은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유리의 손을 탁 쳐낸 그는 서늘한 어조로 결론을 뱉었다.
“보아하니 넌 처리할 생각이 없는 듯하니 내 쪽에서 맡지.”
“잠시만. 너무 그리 급하게 굴지 말고. 죽일 거면 그 전에 나한테 물어나 봐. 내가 제일 확실한 구분법 아냐?”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유리가 싱글거리며 되물었다.
짜증은 나지만 솔직히 맞는 말이다. 상어의 애착은 결코 애착 상대가 죽게 두지 않을 터였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수단이 유리다.
순식간이 이성과 감정을 분리해 낸 이안은 무언으로 동의했다. 단테만 빼놓고 두 이부 형제의 결탁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 * *
솔직히 유리로서는 플로린이 신성 제국의 성녀가 되었다는 걸 알려줄 이유가 없었다.
물론 이안과 손을 잡을 이유도 없다. 그는 진짜가 누군지 확실하게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굳이 이안과 이야기를 나눈 건 신중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지금 플로린의 상황은 쉽지 않았다. 유리는 플로린의 심장에 교황이 신성력 폭탄을 박은 것도 알고 있었다.
‘플로린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면 그 폭탄의 행방은 어떻게 되고?’
플로린이 폭탄을 달고 오게 되는 건가? 아니면 다시 신성 제국의 성녀가 된 라흰의 몸에 폭탄이 심기는 건가?
그게 우선 중요한 부분이었다.
‘신의 힘으로 이뤄진 일인데 플로린을 어떻게 다시 제자리로 돌려보낼 건지. 그것도 문제야.’
라흰에게 제 물방울을 붙여두기만 하면 <책>에 행방이 나오니 죽이는 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 유리는 신중하고 싶었다. 플로린을 상처 하나 없이 무사하게 돌려받고 싶으니까.
그래도 곧 플로린이 마도 제국에 도착한다. <책>에서 알려준 바에 의하면 새벽녘에 도달할 예정이었다.
* * *
‘하, 진짜 힘들었다.’
넓은 침대에 풀썩 누운 나는 뜨끈하게 열이 오르는 이마에 손등을 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국경을 벗어나자마자 마차는 미친 듯이 빠르게 내달렸다. 이전의 멀미는 장난이었다는 듯 거세게 뒤흔들리는 마차에 나는 영혼이 탈탈 털렸다.
정신을 붙잡고 있지도 못했기에 수도에 대체 언제 들어왔는지도 몰랐다. 어떻게 황성에 들어와서 배정받은 침실에 당도하자 나는 끈이 끊긴 인형처럼 침대에 쓰러지고 말았다.
“우우……. 우아.”
“괜찮…… 괜찮아.”
“우아…….”
다람쥐 수인, 레티나가 내 곁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수건을 들어 올렸다.
마음 써주는 게 기특해서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내버려 둔 나는 그리웠던 고향의 공기를 천천히 들이마셨다.
기분 탓이겠지만 그간 마음 한구석을 갉아먹던 초조함과 예민함이 한껏 누그러지는 기분이었다.
‘이 황궁에는 유리가 있어. 멀지 않은 곳에 이안이 있고. 그리고 아버님도…….’
그러니까 나는 괜찮아.
난 그렇게 되뇌며 샌디가 내일 입을 옷이라며 두고 간 정갈한 성녀복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이 방을 나가서 황태자의 방에 가고 싶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아주 익숙한 뽀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얼른 눈을 천장으로 치뜬 나는 거기에 살랑거리며 쓰이는 글자를 보고 왈칵 울음을 터트릴 뻔했다.
내일 아침 식사 후에 데리러 갈게, 누나.
‘유리! 역시 나를, 나를 알아보는구나!’
당연하지. 걱정하지 마. 내가 방법을 찾아보고 있어.
‘다행이다.’
믿고 있었지만 솔직히 걱정도 했었다.
‘가슴이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는데…… 여기 도착하자마자 이렇게 연락을 해주다니.’
사실 더 빨리 연락을 해서 안심시켜 주고 싶었어. 그런데 그 빌어먹을 신성 제국에서는 누나가 혼자 있는 일이 거의 없더라. 미안해.
‘아냐.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나는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코가 알싸하게 매웠다.
그러고 있는데, 유리가 몇 마디를 덧붙였다. 이번에는 중요한 말이었다.
라흰을 엿 먹이려면 누나의 도움이 필요해. 연기 잘 할 수 있지?
‘물론이지.’
좋아. 라흰 앞에서 스킨쉽을 좀 할 거야. 적당히 받아줘. 내가 보기에는…… 라흰이 스스로 원래대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할 것 같거든.
지금 유리가 하는 말은 나도 몇 번인가 생각한 적 있는 거였다.
라흰은 인내심이 짧고 참을 줄을 모른다. 게다가 욕심이 너무 많았다.
라흰은 좋은 건 전부 자신이 가져야 하는 성격이더라. 그러니까 우리가 다정하게 굴면 아마 폭발할걸?
유리가 악동처럼 키득거리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했다.
“고마워. 내일 봐, 유리.”
그렇게 속삭인 나는 레티나가 준 물수건을 눈가에 대고 조금 더 울었다.
‘다음 날 눈이 퉁퉁 붓겠지만 예뻐 보이려고 온 거 아니니까.’
그렇게 몇 시간 까무룩 잠든 나는 레티나가 살며시 흔드는 손길에 눈을 떴다.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