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s Daughter-in-law is Inherently Powerful RAW novel - Chapter (163)
악당의 며느리는 권력자 체질입니다-163화(163/173)
“성녀의 보호자가 현재 교황이라 들었는데, 맞나요?”
“네, 맞아요.”
“헌데 보이지 않는군요. 더 긴 대화는 잠시 후에 나눠야겠습니다.”
라흰이 고개를 팩 돌린 채 건들거리자 이난나 님은 결국 대화를 종료하기로 결심하신 듯했다.
보호자니 교황이니 하는 핑계를 대지만 물이 줄줄 새는 집안의 바가지를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게 진심이다.
‘차라리 다행이야.’
가슴이 아파서 더 보고 있지 못하겠으니까.
“제국의 태양! 바다의 주인이자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지배자. 황제 폐하 드십니다!”
사교계의 웃어른이 타국의 손님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니 이제 슬슬 다른 이들도 내게 말을 걸러 올 때였는데 황제 폐하의 입장을 알리는 외침이 들려왔다. 고맙게도.
‘아, 유리다……!’
황제 폐하의 뒤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듯 아름다운 사내가 함께였다.
‘찾아오겠다고 한 뒤로 유리에게는 아무런 소식이 없어서 걱정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유리는 멀쩡해 보였다.
“모두 편안히 있도록.”
황제 폐하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제야 귀족들은 허리를 폈다.
그와 동시에 여기저기 흩어져 질문 공세를 받고 있던 신관들이 한숨 돌릴 틈이 생겨 내 근처로 모여들었다.
“아니, 글쎄요. 성녀님. 저희가 평소에 보리 빵을 먹는다고 했더니 비웃는 거 있죠?”
“좀 기가 막혀요. 신전은 낭비를 지양한다고 했더니 이해를 못 하는 거예요. 예술은 본디 낭비에서 나오는 거라면서요.”
“으어…… 피곤해요.”
“교황님은 어디 계시는 건지, 원.”
처음에 맛있는 요리를 먹을 때야 좋았지, 지금은 다들 지쳐버렸다.
우리에 갇힌 곰 취급을 받는 것도 한두 시간까지지, 이렇게 길게 구경거리로 세워 놓을 건 없지 않나.
나는 신관들을 안쓰럽게 생각하다가 문득 움찔했다.
‘어, 이거…… 예전의 나였으면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철저히 마도 제국의 입장만 따졌을 것이다. 그리고 황제 폐하의 이런 처사가 마땅하다고 여겼겠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신관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알았다.
그저 뭉뚱그려서 ‘신성 제국에서 온 자들’이 아니라 각 개인이 어떤 얼굴을 하고,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를 알았다.
‘그렇구나. 안다는 건 중요한 거야. 미움은 모르는 것에서 시작하니까.’
나는 내 주변을 호위하기라도 하듯 둘러싼 신관들을 한 명 한 명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원위치가 된다면. 그리고 성녀가 이 세상에 한 명만 남게 된다면…….
신성 제국의 신관들과도 연락을 하고 지내야겠다고.
“갑자기 음악이 좀 바뀌었네요.”
“경쾌해지지 않았나요?”
신관 두엇이 피곤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그걸 듣고 있던 나는 드디어 연회의 꽃인 댄스 타임이 도래했음을 알아차렸다.
장성한 황태자가 존재하니 당연히 첫 춤은 유리가 주도해 나갈 것이다.
하지만 춤이라는 건 혼자 추는 게 아니니까.
다 큰 딸을 데리고 나온 귀부인들 사이에서 술렁거림이 크게 일었다.
라흰 역시 기대로 부푼 얼굴을 하며 턱을 홱 치켜들었다.
자신이 파트너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듯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오, 내려왔다.”
“근데 이쪽으로 오는 것 같지 않아?”
신관들이 그렇게 속삭이며 흥미진진한 눈으로 유리의 움직임을 좇았다.
나 역시 주변에 반짝이 가루가 흩날리는 듯 찬란한 유리에게 눈길을 줄 수밖에는 없었다.
‘꼭 결혼식장에 들어가는 새신랑처럼 입었네, 오늘. 하여간…….’
나와 결혼하고 싶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법도 다양하다.
나는 실소를 짓고는 조용히 내 승리의 순간을 기다렸다.
오늘 유리가 입은 건 잔잔한 무늬가 들어간 새하얀 예복이었다.
한쪽 귀에만 채워진 오팔 귀걸이가 눈에 띈다.
언제였나. 내가 선물한 바로 그 귀걸이였다.
세상의 모든 빛을 아로새겨 만든 듯한 백금발에서 시선을 미끄러트려 모양새 좋은 코와 입술까지 바라본 나는 어느덧 유리가 라흰의 근처에 도달했음을 알아차렸다.
“…….”
라흰의 흥분한 숨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승리감에 도취되어 제정신이 아니겠지.
내 자리를 빼앗고, 나를 자신의 자리에 처넣은 꼴을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 기쁘기도 하리라.
‘그런데 어쩌지. 첫 춤의 영광은 네 것이 아닌데.’
라흰이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면 유리가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추리라 의심치 않는 모습이 제법 재미있었다.
“뭐, 뭐야?”
하지만 다음 순간.
유리는 라흰을 그대로 스쳐 지나버렸다.
당황해서 큰 소리를 낸 라흰은 주먹을 움켜쥐며 유리의 등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마침내 유리가 내 앞에 멈춰 서자 라흰의 표정은 정말 볼만해졌다.
“성녀님의 정결함과 고운 마음씨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가르침을 청하고자 하니 부디 제게 손을 잡을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황태자가 유려한 말씨로 춤을 신청하자 내 곁의 신관들이 입을 떡 벌렸다. 그러더니 서로 팔꿈치로 상대방을 밀며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 공간을 만들었다.
마도 제국의 귀족들 역시 충격받은 표정이었는데, 다들 이 사건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해석하기 위해 여념이 없을 터였다.
황제는 신성 제국을 배척하지만 황태자는 우호 관계를 맺겠다는 뜻인가? 하면서.
“기꺼이 그럴게요.”
나는 당황하지도, 기뻐하지도, 움츠러들지도, 거만해지지도 않았다.
그렇게 유리의 손에 내 손을 얹은 채 플로어로 나가는 길.
나는 양어머니와 눈을 마주쳤다.
양어머니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눈으로 나를 보고 계셨다.
라흰이 아니라 나를 말이다.
* * *
황태자와 신성 제국의 성녀가 느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주고받는 건지 웃음을 터트리는 성녀를 황태자가 자애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에 샘이 나서 숨이 넘어가기 일보 직전인 것은 다름 아닌 라흰이었다.
‘왜! 대체 왜 거기에 관심을 갖는 건데?’
이건 라흰이 ‘유리 예레반 헬리코프리온 드리블랴네’를 처음 만나는 날이었다.
그동안 황태자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찾아온 적 없었다.
그래도 뭐, 황태자니까 바쁘겠거니 생각하며 이해를 하려 했다.
어차피 만나면 제게 끔뻑 죽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황태자는 그녀의 기대를 완전히 배신했다.
‘나를 선택하지 않을 거면 왜 내 옆에 잠깐 멈춰 서는데? 그 탓에 내가 비웃음거리가 되었잖아!’
귀족들이 저를 흘끔거리는 게 아주 잘 느껴졌다.
라흰은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이 되어 서둘러 문가를 살폈다.
그러자 이제 막 들어온 단테가 보였다.
사실 라흰이 단테가 함께 입장하지 않은 건 다 그놈의 ‘첫 춤’ 때문이었다.
만약 단테가 옆에 있는 걸 보면 황태자가 질투해서 첫 춤을 아무나와 출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라흰은 단테더러 조금 늦게 연회장에 오라고 했다.
단테는 기사답게 큰 의문을 갖지 않고 시키는 대로 했고.
허나 이렇게 된 이상 단테라도 꼭 붙들고 있어야 했다.
그래야 더 우스워 보이지 않지!
‘저 신관들도 다 너무해! 내겐 저렇게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았잖아……!’
어째서 저 애는 내가 얻지 못하는 걸 쉽사리 갖는 거지?
왜? 뭐가 그리 잘나서?
게다가 요즘 라흰은 돈이 모자라다고 느끼고 있었다.
용돈이 있긴 하지만 원하는 걸 다 사들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오늘 같은 날도 제 뒤를 졸졸 따라오는 저 두 여자가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
‘내가 황태자비가 되면 아무도 나한테 뭐라고 못할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라흰은 씩씩거렸다.
“저 사람이 마도 제국의 성녀인가?”
“응! 엄청 못됐어! 원래 내 자리였는데 빼앗아 가지 뭐야!”
제게 다가온 단테의 말에 라흰이 화를 내며 칭얼거렸다.
이러면 평소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저를 달래주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대를 담아 고개를 든 순간, 라흰은 등골을 타고 오르는 오싹함에 주춤했다.
‘뭐야. 저 표정, 뭐냐고!’
단테는 거의 넋을 놓은 채 플로린을 보고 있었다.
가라앉은 두 눈에 날카로운 열망이 휘몰아친다.
저에겐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던 그런 갈망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된다고.’
이럴 거면 뭐 하러 마도 제국의 성녀가 되었느냔 말이야.
키락서스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고?
‘어?’
순간, 라흰은 인파 속에서 아주 익숙한 인영을 발견했다.
훤칠한 키에 흉흉할 정도로 사나운 눈. 매끈하게 잘 빠진 콧날과 턱.
잘생겼다는 말로도 모자란 남자.
주변의 사내를 죄 풋내기로 만들어버리는 분위기를 지닌…….
‘키락서스!’
라흰은 저도 모르게 키락서스를 향해 다가갔다. 가슴이 두근거려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아아, 세상에.’
갖고 싶다. 갖고 싶다. 갖고 싶다. 갖고 싶다. 갖고 싶다. 갖고 싶다. 갖고 싶다. 갖고 싶다. 갖고 싶다. 갖고 싶다. 갖고 싶다!
크게 뜨인 라흰의 두 눈에 오래 묵어 더더욱 질척하게 졸아든 욕망과 집착이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