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s Daughter-in-law is Inherently Powerful RAW novel - Chapter (169)
악당의 며느리는 권력자 체질입니다-169화(169/173)
세상이 멸망하기 직전인데 이렇게 느긋해도 되나 모르겠다.
이안에게 안긴 나는 망가져 버린 수도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자연스레 내가 해야 하는 것.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떠오른다.
‘성력으로 모두를 치유하고, 드리블랴네 가문을 움직여서 피해 복구를 주도해야 해.’
나의 의무와 책임을 하나하나 손꼽던 난 어느 순간 중력이 아래로 잡아끄는 것을 느끼고 움찔했다.
“소멸하고 있네.”
이안이 담담하게 속삭였다. 그러면서 나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쿵.
이안 덕분에 아주 안전하게 바닥에 내려앉은 나는 블랙홀이 작은 점처럼 변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교황의 모습도.
참으로 볼품없고 초라한 끝이다.
자신이 만들어낸 것에 잡아먹히는 꼴이라니.
‘그리고 초라하기로 따지면 이쪽도 만만치는 않지.’
퍼억.
허공에서 추락한 라흰이 내 앞에 쓰러졌다.
다른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내려오는데 라흰만 대충 내던져지는 걸 보니 아빠가 일부러 그런 듯했다.
헌데 라흰은 뼈가 부러지고도 여전히 숨이 붙어 아까부터 외던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내 거야……. 내…… 거, 다…… 전……부.”
이쯤 되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건 아닐까. 아니면 죽음 이후에 영혼이 겪어야 할 수많은 업화가 두려워 애써 숨을 붙들고 있는 걸까.
어느 쪽이든 깔끔하지 못하다.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잠자코 라흰에게 다가갔다.
비록 증오스러운 상대였지만 그럼에도 사람이므로, 마지막을 사람답게 보내주기 위함이었다.
착한 척을 하려는 게 아니다.
그저 원수가 사람다운 끝을 맺게 해주는 것이 나의 격을 올려준다고 생각할 뿐.
‘그리고…… 내 손으로 결국 끝을 맺어야 진정한 승리인 거잖아.’
라흰은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나는 그런 라흰의 앞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물론 잡아주겠다고 내민 건 아니다.
“안녕히.”
사람, 혹은 사람에게 속한 것으로 연성술을 하는 것은 금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인도적인 차원에서 하는 연성은 허락되었다.
새하얀 국화의 꽃잎이 흩날린다.
라흰은 다리부터 시작해 하얀 꽃으로 변해갔다.
그래도 교황보다는 나은 결말이다.
비록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그럼, 이대로 끝인 건가?’
천신이 원하는 대로 내가 이겼다. 이번에는 죽지도 않았고, 나의 인생을 빼앗기지도 않았다.
완벽한 승리였다.
“고생했구나.”
“내 딸! 저리 비켜라, 내 딸에게 가겠다!”
왼쪽에서 아버님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오자마자 오른쪽에서 아빠의 목소리가 닿아왔다.
아빠는 이안이나 아버님 등,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을 완전히 무시하고는 나를 품에 넣어 꽉 끌어안았다.
“내 아가. 우리 딸. 내 사랑하는 플로린……!”
“으븝, 아빠! 수, 숨 막혀.”
“지상에 내려보내는 게 불안하더라니! 이리 고생하라고 내려보낸 게 아니란 말이다!”
아빠의 긴 은발이 내 코를 간질였다. 아빠가 흘리는 뜨거운 눈물도 내 이마에 떨어졌다.
아르칼리크를 떠나온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10년은 지난 것 같을까.
나는 떨고 있는 아빠를 끌어안고 몇 번이고 같은 말을 속삭였다.
괜찮다. 다 괜찮다고.
그런 우리의 머리 위로 흰 국화가 흩날렸다.
“아, 아빠. 그런데 지금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어.”
나는 그렇게 말하며 아빠를 잠깐 밀어냈다.
“나를 하늘로 올려줘. 내 신성력이 닿는 곳에 있는 사람들은 다 치유해 주고 싶…….”
……바로 그때.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 나는 무언가를 들었다.
[꺄아아아아아악!!!]영혼이 찢어진다면 이런 소리를 내지 않을까.
손톱으로 철판을 긁는 것보다도 더 섬뜩한 괴성이 대기를 갈랐다. 뒷목의 솜털이 쭈뼛 서고 척추 마디마디에 서리가 끼는 듯한 감각이 소름 끼쳤다.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듣고야 만 귀가 용암을 들이부은 것처럼 아프다.
그와 동시에 마른하늘에 벼락이 내리치더니 ‘무언가’가 나타났다.
그 ‘무언가’는 라흰으로 보이는 것에 쇠사슬을 채운 채 어디론가 내달렸다.
‘저게, 저게 뭐야.’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보다도 처참하고 끔찍하며 징그러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 그 이상의 공포가 해일처럼 덮쳐왔다.
보아서는 안 될 피안 너머의 무엇을 목격한 듯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 나는 저도 모르게 혀를 씹었다.
이런, 흉한 것을 보았구나.
아마 부드러운 음성과 함께 두 손이 내 눈을 가리지 않았더라면 선 채로 기절하지 않았을까.
‘저게 악신…….’
그래, 악신이지. 네 덕에 승리하게 되었단다. 감사함을 담아…… 네 기억을 살짝 휘저어도 되겠니? 악신의 형상 같은 건 기억하지 않는 게 좋단다.
나는 대부분의 것을 기억하기를 희망하는 쪽이었다.
하지만 방금 것은 아니다.
기억을 박박 문질러 지울 수 있다면 부디 그렇게 해주기를.
너를 비롯해 악신을 본 모두가 그 형상을 잊을 거란다. 악신의 존재 자체가 이 세계를 떠났으니 그와 관련된 모든 기록 역시 지워질 거야.
천신의 음성엔 뿌듯함과 만족감이 절절히 어려 있었다.
어지러워서 약간 비틀거린 나는 문득 뭔가를 깨닫고 크게 외쳤다.
“잠시만! 아버님! 그러고 보니, 아버님은?”
“여기 있다.”
라흰이 끌려가는 바람에 나는 아버님도 끌려갈 줄 알았다.
소원을 두 개나 쓰셨으니까.
하지만 아버님은 멀쩡하게 서 계셨다.
언제나처럼 느긋하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어떻게…….”
너무 다행인지라 가슴을 쓸어내린 나는 눈물이 툭 터질 뻔했지만 입술을 깨물어 버텼다.
하지만 아버님은 이미 내가 우는 걸 보았다는 듯 내 눈가를 닦아주셨다.
“간단하지. 네가 무사할 것 같으니 마지막 소원으로는 아무 대가 없이 악신의 계약자에서 풀려나게 해달라고 했다.”
“!”
“라흰은, 글쎄. 탐욕의 결과이지 않겠니.”
아버님이 특유의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키득 웃었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온 세상이 우뚝 멈춰 서 있음을 깨달았다.
움직이고 있는 건 나와 아버님 그리고 아빠뿐.
아빠는 콧방귀를 뀌며 나를 놓아주려 하지 않으셨다.
“딸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이 아빠가 악당을 물리쳤다.”
“으, 으응. 아빠 멋져.”
“진짜야. 아빠가 제일 세. 그러니까 아빠랑 아르칼리크로 돌아가자.”
아빠는 괜히 아버님을 의식하는 듯했다.
나는 그런 아빠를 토닥여주고는 여전히 내 근처에 있음이 느껴지는 천신에게 물었다.
“이렇게 대단한 일을 해냈는데, 보상 없어요?”
으음, 보상이라.
“솔직히 뭘 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 세상의 유일신쯤 되면서 은혜를 홀랑 잊어버릴 심산은 아니죠?”
세계의 유일신에게 뭔가를 요구할 수 있는 일이 두 번은 없을 테지.
그러니 나는 뻔뻔하게 보상을 달라고 했다.
사실 이미 보상으로 몇 번인가 생각한 것도 있었다.
딱 한 가지는 들어줄 수 있겠구나. 그게 무엇이 되었든 상관없으니 말해보렴.
천신의 대답은 내가 예상한 것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는 아빠를 흘끔 올려다보았다.
아버님도 아빠도 내가 무슨 소원을 빌든 상관없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여기서 내가 끔찍한 반전으로 세상이 망하게 해달라고 하면 어쩌려고, 정말이지. 두 분 다 나를 너무 믿으신다니까.’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정상인이었다.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을 너무나 사랑하고.
그러니 처음부터 빌고 싶은 소원이라고는 단 하나뿐이었다.
“아빠에게 엄마를 돌려줘요.”
내가 없어도 쓸쓸하지 않으시도록.
“엄마를 되살려줘요.”
이거야말로 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사실 신이라도 하면 안 되는 일 같지만…… 떼를 좀 써보면 해줄 것 같아.
“플로린, 너를 위한 소원을 빌어야지…….”
아빠가 감격한 듯 눈물을 글썽였다. 나는 고개를 내젓고는 아빠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계속 아빠 옆에 있어줄 수가 없어. 난 더는 아이가 아닌걸. 하지만 그러면 아빠는 점점 더 외로워질 거잖아. 게다가 나도 엄마를 보고 싶어.”
나는 욕심쟁이다.
어쩌면 라흰보다 내가 더 욕심이 많을지도 몰랐다.
아빠도 아버님도 양어머니도 계신데 친모까지 만나고 싶어 하잖아.
그러나 이런 내 바람이 잘못되었다고 누가 탓할 수 있을까.
원래는 절대 안 되는 거긴 한데……. 허, 참. 나를 아주 곤란하게 할 작정이로구나.
“그것 외엔 내가 바라는 게 없어.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거든.”
천신은 곤란한 척했지만 목소리만 들어봐도 알았다. 이건 된다는 걸.
보상이라고는 하지만 죽은 자를 아무 대가 없이 다시 살려줄 수는 없고, 어찌한다.
아마 몇 가지 단서가 붙기는 하겠지.
예를 들면 엄마는 아르칼리크에서 나올 수 없다거나, 아빠가 죽을 때 같이 저승으로 돌아가야 한다거나 그런 거.
그러자 천신이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이따금 인간의 상상력이란 놀라울 때가 있지. 네가 생각한 그런 단서를 달아야겠구나. 그게 좋겠어. 이외에는…….
내 청을 들어주겠노라는 천신의 말에 아빠가 짧게 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