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s Daughter-in-law is Inherently Powerful RAW novel - Chapter (22)
악당의 며느리는 권력자 체질입니다-22화(22/173)
* * *
흰 담비가 귀여운 꼬리를 꿍실꿍실 흔들며 사라진 뒤. 폼폼을 부서트릴 듯이 쥔 라피렌이 이를 갈았다.
“제가 언제 제 수업에 참관을 허락했습니까?”
– 아아, 미안.
그러자 놀랍게도 폼폼에서 빛이 나더니 주변으로 확 퍼져 나갔다. 그 빛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만년설로 뒤덮인 어느 산맥을 비추었다.
키락서스는 머리에 묻은 눈을 털어내며 라피렌을 향해 넉살 좋게 인사했다.
– 우리 집 며느리가 잘 배우고 있는지 궁금해서. 자네가 괴롭히지 않나 지켜도 볼 겸.
“안 괴롭힙니다. 한 번만 더 이러시면 가주님께 가서 지도를 맡지 않겠다고 할 겁니다.”
– 미안, 미안. 안 할게.
“키락서스 님 쪽에서 지켜보실 수 있다고 작은 마님께 알려드렸습니까?”
– 음, 아니.
“그럼 제가 말하겠습니다.”
라피렌이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
잘못한 것은 아는지 키락서스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어깨만 으쓱했다.
여전히 불만스럽긴 했으나 키락서스가 순순히 사과하는 건 드문 경우이므로 라피렌은 여기서 이만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 얀테로사십니까?”
– 응. 아이다호 경이 도저히 보이질 않네.
“아무래도 기사단장이시니까요. 아리아드네 님을 지키지 못했다며 반성하는 의미로 단장직도 내놓고 칩거하신 것이니 찾기 어려우실 겁니다.”
– 음, 맞아. 근데 난 어서 돌아가서 우리 집 며느리를 보고 싶거든.
키락서스가 눈매를 휘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라피렌은 소름이 오소소 돋는 듯해 폼폼을 꽉 움켜쥐었다.
“미친 짓 하지 마십시오!”
– 무슨 미친 짓?
“산맥을 날려버린다거나! 거기 쌓인 눈을 죄다 증발시켜서 아이다호 경의 보호색을 없애버린다거나! 아니면 나무를 태운다거나 하는 짓이요!”
모두 키락서스가 할 법한 일이다.
그리고 키락서스는 지금, 확실히 ‘재미가 없는 죽은 눈깔’을 하고 있었다.
– 그쯤은 해야 아이다호 경이 내 엉덩이를 걷어차러 나올 텐데…….
“만약 그러시면 모두 작은 마님께 일러바치겠습니다.”
– 그건 곤란하지. 자네는 유능한데다 아버지의 심복이니 함부로 없앨 수도 없어.
머리를 쓸어 넘기는 키락서스의 어조는 평이했으나 듣는 라피렌은 인내심이 닳기 직전이었다.
– 이 산맥에 사는 설표란 설표는 전부 소환하는 대 마법진을 그릴까…….
“그게 그나마 가장 온건한 방식이군요.”
서식지에 잘만 있던 설표들에겐 미안한 일이 되겠다만 그들도 눈이 증발하거나 얀테로사 산맥 전체가 불타는 것보단 낫지 않겠는가.
지금 키락서스가 찾고 있는 수인의 이름은 살로네스 루 아이다호.
드리블랴네의 기사단인 <흑륜>의 단장이자…… 한때 아리아드네의 맹우였던 사람이었다.
* * *
“대화하는 걸 들었을 텐데. 슬슬 나오세요, 경.”
잠시 뒤, 폼폼과 연결되었던 마법을 툭 끊어버린 키락서스는 사람 좋은 음성으로 입을 뗐다.
으르릉.
꺼지라는 듯 낮고 위협적인 울음이 저 먼 곳 어디선가 들려온다. 키락서스는 그게 익숙한 사람의 울음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들었다.
‘플로린에겐 아이다호 가문이라는 뒷배가 반드시 필요하다.’
마도 제국의 명문가이자 충신인 아이다호가 나선다면…… 이번 생에선 그 누구도 그 아이의 출신을 가지고 함부로 입방아를 찧지 못하리라.
플로린은 순백의 은발을, 살로네스는 푸르스름한 기운이 도는 은발을 지녔지만 어쨌거나 은발이란 공통점도 있다.
사교계에서 플로린을 보호해 줄 수 있을 터.
‘내겐 더할 나위 없이 귀하였으나 세상은 그 아이를 천시했었지.’
키락서스는 아둔하지 않았다. 같은 일이 두 번 벌어지도록 내버려 둘 생각도 없다. 만약 아이다호 경이 가지 않겠노라고 끝까지 버틴다면 정말 짐승을 끌고 가듯 강제로 움켜쥐어 이지를 없애버릴 수도 있었다.
목표물을 꼭두각시로 만드는 마법은 편리하다. 지금도 사실 그의 욕심대로라면 그리 해버리고 싶으나…….
‘안 돼. 플로린에겐 제대로 어머니 노릇을 해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저렇게 고집을 부려도 그 애를 한 번만 만나보면 아이다호 경도 생각이 달라지리라.
“살로네스.”
제 안에서 불쑥 치미는 짜증을 꾹 누른 키락서스는 어조를 다정히 꾸며냈다.
눈 쌓인 곳의 메마른 덤불 어귀가 바스락거리는 걸 보아하니 아이다호는 근처에 있다.
“백작이 다시 한번 지켜주어야 할 아이가 있어요. 아리 누님이 안배해 둔 아이입니다.”
이건 새빨간 거짓말. 허나 꼭 진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모든 것을 다 밝히려면 그가 어느 시간대까지 살아보고 겪었는지도 털어놓아야 할 텐데, 키락서스는 절대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없어진 미래는 없어진 것이다. 다시 들출 이유가 없다. 그가 현재를 하나둘씩 바꾸고 있으니…… 같은 미래가 오진 않으리라.
플로린이 다이스 중독으로 죽은 뒤, 갑작스레 열린 수백, 수천 개의 게이트. 타 차원에서 밀려든 마물들이 세상을 멸망시키는 데는 단 일주일이면 충분했다.
처음 보는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 그간 마탑에서 개발했던 모든 무기가 사용되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아무리 없애도 게이트를 닫는 속도보다 새로 열리는 속도가 더 빨랐으므로.
신성 제국과의 오랜 싸움으로 인해 전국민이 총이나 칼을 다룰 줄 아는 시점이었다면 차라리 어떻게든 해볼 만했을까.
하지만 게이트 사태가 벌어진 것은 신성 제국과 마도 제국 간의 오랜 전쟁이 끝나고 모두가 평화를 바라고 있던 시점이었다.
총 대신 갈퀴를 들고 땅을 갈고 칼 대신 비료 포대를 짊어졌던 때. 전 세계의 사람들이 전쟁의 상처를 딛고 모두 행복해져 보려는 바로 그때쯤…….
키락서스는 잘게 고개를 흔들어 이 세상에 오직 그 혼자만이 기억하고 있는 장면들을 지워냈다.
잊어도 좋을 것이다.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질 이유가 없으니.
“그분은 가장 낮은 곳에서 너희에게 오시리라.”
경전의 어느 구절을 읊은 키락서스의 앞에 마침내 거대한 설표가 모습을 드러냈다.
태양을 가릴 만큼 커다란 설표가 내뿜는 격렬한 우성 페로몬은 마치 이 산맥의 주인과도 같았다.
“돌아갑시다. 가서 아리 누님이 남긴 것을 보세요.”
오직 아리아드네 한 사람에게만 충성을 바쳐왔던 살로네스가 구슬프게 울었다. 이제부터 설득의 시간이었다.
* * *
요즘 드리블랴네 저택의 분위기는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아리아드네 님의 죽음 이후로는 숨조차 조심해서 쉬어야 했던 고용인들이었지만, 작디작은 플로린 님이 며느리로 들어온 뒤로는 가문 내의 공기가 좀 더 가벼워졌던 것이다.
게다가 플로린 님에겐 뭔가 모를 특별한 능력이라도 있는지, 아리아드네 님이 감춰두신 선물까지 찾아냈다는 소문은 벌써 저택을 다섯 바퀴쯤 돌았다.
솔직히 처음엔 ‘그래도 알비노는 좀’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다수였으나 그런 의견은 시간이 흐르며 점차 쑥 들어갔다.
플로린 님이 기습 공격에 대한 걸 예지로 알아차려 주신 게 못해도 다섯 차례.
출신보다야 능력이 우선시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게 마도 제국인들의 보편적인 사고방식이었으므로 지금은 플로린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아니, 앞장서서 칭찬하는 ‘플로린 님 칭찬위원회’까지 생겼을 지경이었다.
그 주축은 다름 아닌, 저택에 사는 고용인이라면 모두 잘 보여서 간식 하나쯤 얻어먹고 싶어 하는…… 이런 대 굶주림의 시대의 실세.
주방장과 요리사들이었다.
“플로린 님은 아주 남다르시거든! 언제나 맛있게 식사를 싹싹 비워주시지.”
“맞아요. 일할 맛이 난다니까요? 게다가 어제도 그제도 잘 먹었다고 카드를 보내주셨어요!”
“귀하신 분 중에 우리 처지를 알아봐 주시는 분이 몇이나 되겠어. 그리 말씀 한 번 해주시는 게 우리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아시는 게야.”
“나, 플로린 님이 게르드 도련님께 호통치는 장면을 보고 반했잖아! 아직도 기억난다고!”
게르드는 물론이고 여태 음식을 함부로 버려댔던 후계자들은 큰 마님에 의해 색출되어 벌을 받았다.
사치를 하는 것 또한 드리블랴네의 후계자로서 타당한 소양이지만 음식을 만들어 준 사람 앞에서 쓰레기통에 버리는 건 혼이 나야 할 일이라 판단하셨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간 상처받았을 고용인들을 위로하는 의미가 있기도 했다.
큰 마님이 고용인의 편을 들고, 후계자들을 벌하셨다는 건 즉 작은 마님의 행동이 옳았다는 것.
인간화도 못 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작은 마님이 게르드 님 앞에서 조금도 숙이지 않고 야무지게 혼을 내셨다는 것도 과장 좀 더해서 부풀려 졌다.
“오늘 밤! 드디어 연회야!”
그런 와중에 던져진 ‘작은 마님 환영 연회’에 대한 이야기는 드리블랴네의 고용인 전체에게 큰 이슈였다.
“간만에 배부르게 먹겠어. 큰 마님은 너그러우셔서 연회가 끝나고 남은 음식은 우리더러 다 먹으라고 해주시잖아.”
“기대된다, 정말!”
“작은 마님 말이야. 참 고마우신 분이야. 키락서스 님이 데려오셨다지?”
“암. 출신은 비밀이라지만 뭔가 귀족님네들만 아는 사정이 있으시겠지.”
“사실 아주 귀한 가문의 따님이셔서 비밀인 게 아닐까? 발상의 전환으로!”
“그럴지도 몰라. 키락서스 님이 말씀을 다 안 하셔서 그렇지. 높으신 분들이야 다 아는 내용일 테고, 굳이 우리에게까지 알리셔야 할 이유가 있나!”
“그렇지. 그리 인품이 훌륭하신 분인데 틀림없이 귀한 댁 따님이실 게야.”
약간의 오해가 더해지긴 했지만 좋은 쪽이니 바로 잡을 이유는 없다.
오랜만에 떠들썩해진 저택은 여기저기 웃음꽃이 피었으나 딱 한 군데. 그러지 못한 곳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