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s Daughter-in-law is Inherently Powerful RAW novel - Chapter (29)
악당의 며느리는 권력자 체질입니다-29화(29/173)
“모두 듣거라.”
그때, 이난나 님께서 차분한 음성으로 모두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후계자 관이 망가졌으니 복구될 때까지 모두 임시로 본관에서 지낸다. 침실은 집사가 배정할 것이며 불만은 용납하지 않겠다.”
반발은 허용치 않는 아주 엄격한 말투였다.
“혹 많이 놀라 본가로 돌아가고 싶다면 그리해도 좋다. 이번 건에 대해서는 평가하지 않을 터이니.”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건 부드러운 달램.
나는 강함과 유함을 동시에 갖춘 이난나 님의 모습을 보며 두 손을 가슴 위에 얹었다. 언젠가 내가 되어야 할 모습이었다.
‘아, 그런데…….’
긴장이 풀린 탓일까.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신경끈이 투둑 하고 끊어지는 느낌.
‘눈앞이 가물가물해.’
이안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다른 후계자들과 함께 이동하려는 듯했다. 어차피 지금 다가가 봐야 지긋지긋하단 표정을 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이안에게 한 발 내디뎠다.
“나랑 같이…….”
“……플로린?”
툭. 몸에서 힘이 빠졌던 것 같은데 그다음은 모르겠다.
이안이 성질을 부리지 않고 내 이름을 똑바로 불렀던 것 같기도 한데 꿈이었을까?
‘나랑 같이 자.’
못다 한 말을 입속에서 웅얼거리며 나는 그대로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깊고 깊은 잠이었다.
* * *
그날 밤.
이안의 셔츠를 꽉 쥔 자그마한 손이 놓지를 않아서, 혹은 그러한 핑계를 대고-
이안은 플로린과 같은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물론 코까지 도롱도롱 골며 자고 있는 건 플로린이었다.
이안은 눈을 감고 잠든 척했다가 바깥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모두 사라지자 다시 눈을 떴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어쩔 수 없었다. 그에겐 불면증이 있었으니까.
아직 나이도 어린 주제에 왜 잠을 자질 못하느냐고 하면 대답해 줄 말이 없었다. 의사에게 이 증상을 보인 적도 없기에.
“꽃 연성이라니. 정말 너다운 능력이야.”
작고 연약하면서, 다채롭고 사랑스럽다.
그는 어느 날 소설에서 읽었던 구절을 읊어보았다. 그땐 그게 뭘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는데 지금은 확실히 안다. 그 문장은 플로린을 위해 쓰인 것이었다.
담비에서 사람이 되었음에도 그다지 크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작은 키. 짧고 포동포동한 팔과 다리. 귀여운 발목. 물결처럼 퍼진 은빛 머리칼은 그 끝을 딸기 시럽에 담근 것처럼 붉은빛이었다.
‘알비노 수인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인간화 한다고 했지.’
아까 넌 그만큼이나 무서웠던 거구나.
나는 아니었는데. 아니어서 불길 속에 갇혀도 상관없었는데.
‘너는 그렇게나 무서우면서도 내게 똑바로 달려왔어.’
온 털이 축축하게 젖도록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로 매달렸다. 나가자고. 같이 나가자고.
닿아오는 진심이, 가식 없는 말이 너무 밝고 눈부셔서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저 싫다고만 말했다. 싫다고 하면 그 빛이 그를 집어삼키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런데 네가 나를, 기어코 그림자에서 끌고 나왔어.’
이안은 밤톨만 한 앞발에 잡혔던 제 팔을 내려다봤다. 여태 별 쓸모없다 여겼던 신체 부위가 갑자기 의미를 띠는 건 꽤나 생경한 일이었다.
제 팔을 새삼스레 바라보던 이안의 귀 끝이 발갛게 물들었다.
“비밀 하나 알려줄까?”
바닥에 뿌려진 화약 냄새를 이안은 일찌감치 알아차렸다.
게르드의 수하인 리첸비움 왕국 출신의 남자가 수상쩍은 행동을 한다는 것도 알았다. 후계자 관이라는 협소한 공간에서 그의 후각과 청각을 벗어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안은 내버려 뒀다.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누가 죽든, 다치든. 그 죽음이 그에게 찾아오는 것일지라도.
아비가 천한 용병일 거라며 수군거리던 입들이다. 사생아라고 그를 툭 치고 지나가고 시비를 걸고 음식에 송충이 따위를 집어넣은 손과 발이었다.
괴롭힘에 대응하면 다음 날은 때리러 오는 머릿수가 하나 더 늘었다.
귀찮았다. 약한 주제에 덤비고, 또 덤비고, 그를 짓누를 수 있을 거라 믿는 것들이.
그래서 그는 그냥…….
“나는 원래 거기서 죽으려고 했어.”
살고 싶지도 않았고 살 이유도 없었거든.
“누가 내게 살아달라고 하지도 않았고.”
소곤소곤. 비밀을 알려주는 목소리가 달았다.
지금까지 냉랭하게 쳐내기만 했던 어조와는 퍽 달라 플로린이 들었으면 소름 돋는다고 했을지도 몰랐다.
“살린 건 너야, 애기야.”
한쪽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모로 누운 이안은 여전히 색색거리며 잘도 자는 소녀의 코를 살짝 건드렸다.
“어쩌지. 내일이면 죄다 너랑 결혼하고 싶어 할 텐데.”
인간화한 모습이 이렇게까지 귀여울 줄 누가 알았겠어.
이안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메마른 사막인 채 살았던 아이가 처음 내디딘 오아시스는 지나치게 달콤했다.
경계와 의심으로 뭉쳐 있던 이안은 플로린을 여러 차례 거부했다. 하지만 플로린은 마치 멈추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처럼 그에게 다가왔다. 손을 내밀고, 살자고 했다.
남편이 되라며 바락바락 소리 질렀지.
‘넌 어른이 되면 오늘 일을 아마 까맣게 잊어버리겠지만, 나는.’
어른이 된 플로린을 상상하던 이안의 입가에 미소 비슷한 것이 피어올랐다가 훅 사그라들었다.
잠시 잊고 있던 굉장히 불만스러운 사실 하나가 떠올랐던 탓이다.
‘그런데 왜 나한텐 입 맞춰주지 않았지?’
* * *
투명하고 새파란 공간.
머리 위의 유리천장에서 쏟아지는 볕이 깊디깊은 수조의 안쪽을 비추었다.
본래 태양이 있는 곳엔 이끼가 끼기 마련이나 마법으로 관리되고 있는 이 수조는 깨끗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나칠 정도로, 깨끗했다. 어쩌면 그것은 이 거대한 유리관 안에 사는 생명이 단 하나뿐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수조 안에는 예술적으로 지어진 작은 신전이 하나 있었다. 인형 놀이를 할 때 쓰는 장난감처럼 생활의 흔적이 일절 없는 공간이다. 전설에나 나오는 인어의 쉼터 같기도 했다.
신께서 신성하다 일컬으신 일곱 숫자를 맞추어 세운 기둥과 힘차고 대범한 양식으로 지어진 석조 지붕. 그 아래에는 마찬가지로 돌로 된 의자가 하나 있었다.
푹신하고 보드라운 것은 염도가 짙은 이 물속으로 들어오면 금세 부식되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황자가 쓰기엔 너무 딱딱하지만 어차피 물속에서 완전히 드러눕기란 쉽지 않다. 어느 정도는 떠 있기 마련.
그곳은 황자, 유리 예레반 헬리코프리온 드리블랴네의 쉼터이자 집이자 감옥이었다.
사르르.
물을 투과한 볕이 악마가 빚어놓은 최고의 예술품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누구라도 3초 이상 바라보면 그대로 홀리고 마는 마성의 미모.
예쁘다거나 잘생겼다거나 하는 표현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유리는 절세미인이었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유리는 지금 한 손에 반투명한 형태의 책을 쥔 채 미간을 좁히고 있었는데 그조차 그의 사나운 아름다움을 누그러트릴 수 없었다.
‘짜증 나네.’
유리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이를 갈았다.
기분이 닻에 걸린 듯 아래로 수직 낙하했다. ‘그녀’의 첫 인간화를 보고 축하해 주는 건 자신이 될 줄로만 알았다.
‘그녀’가 지금까지 얼마나 인간이 되고 싶어 했는지 알기에 유리의 마음은 간절함에 가까웠다.
‘그녀’의 처음에 함께하고 싶은 욕심. 그런데 그게 다 틀려버렸으니 애초에 그다지 좋지 못한 심사가 뒤틀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너 내 남편이라니까? 쥭지 말구 살아서 내 남편 하란 말이야!”조그마한 담비는 울상을 지으며 인상을 쓰는 기예를 동시에 선보였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남편 후보 중 하나였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정신이 없었다. 그저 [……]이 죽지 않길 바라서 발을 동동 구를 뿐.
마침내 [……]은 떨구었던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삶에 대한 의지가 샘솟은 것도 잠깐.
“위험해!!!”
담비가 비명을 질렀다. 머리 위에서 불에 탄 대들보가 무너져 내린……]
상어 수인다운 서느런 시선이 괄호 속의 비어 있는 이름을 노려보았다.
‘그녀’와 관련된 대부분의 이름은 이 <책>에 다 적혀 있었다. 그런데 그 <책>에도 보이지 않는 이름이 간간이 나오는데, 일전에 가려졌던 것은 오늘 다시 들춰보니 보였다.
‘전에 가려졌던 놈은 게르드. 분명 게르드였지.’
그런데 이제 게르드는 보이고, 새롭게 안 보이는 이름이 나왔다라…….
유리는 그게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누군지를 알아야 이 심통 난 마음을 가서 풀 텐데.’
딱히 상냥한 방식으로 풀진 않을 것이다.
유리는 ‘그녀’의 모든 것을 독점하기를 원했다. 단 한 조각도 공유하고 싶지 않다.
‘할 수만 있다면 다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내가 물에 사는 것만 아니었다면 만나러 갔을 텐데.
유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책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