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s Daughter-in-law is Inherently Powerful RAW novel - Chapter (36)
악당의 며느리는 권력자 체질입니다-36화(36/173)
“흠, 제법이군.”
그리고 플로린과 이안에게서 몇 발짝 떨어진 곳.
가주 임마누엘은 오랜만에 연회에 나온 아내의 손을 꼭 잡은 채 이안을 살피고 있었다.
“이안은 참 당신을 많이 닮았어요. 알고 있지요?”
“암. 알다마다요, 부인.”
아내가 슬쩍 운을 떼자 임마누엘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도 소년처럼 씩 웃었다.
“신성 제국의 피가 반절이긴 해도, 다른 반은 드리블랴네의 피가 흐르니…… 계기만 있으면 얼마든지 타오를 수 있는 녀석이었지요.”
드리블랴네는 직계라고 해서 더 예뻐하거나 귀여워하지 않는다. 모든 후계자를 공평하게 대하는 게 가문의 규칙이니까.
물론 성장이 기대되는 녀석은 몇 있었지만 이안은 그에조차 포함되지 않았다. 항상 죽은 눈을 하고 있는데 무엇이 기대되겠는가.
누군가 짓밟기도 전에 이미 스스로 시들어버린 풀. 그게 이안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안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난나는 저 아이가 자신이 알던 그 손자가 맞는지 잠시 돌이켜 보았다. 플로린의 손을 잡고 두 눈을 맹렬히 빛내는 저 아이는…… 아주 다른 사람 같았다.
“아직도 기억납니다. 부인의 환영 연회 날이요.”
“언제 적 일인데 그걸 기억하세요.”
“언제 적 일이라니요, 부인. 다 늙었어도 여전히 어제 일 같은데.”
임마누엘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옛 기억을 더듬었다.
“그날 부인께서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으셨지요. 다른 놈들이 부인께 다가가 갖은 애교를 떠는데 얼마나 꼴 보기 싫던지. 참느라 힘들었어요.”
“그날 제게 말을 걸지 않은 유일한 후계자가 당신이었죠. 그래서 마음에 들었어요. 너무 시끄러워서 귀가 아팠거든요.”
이난나가 새침하게 대꾸하자 임마누엘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이난나 역시 이내 미소를 지었다.
“시간이 흐르고 너무 지겨워진 저는 정원으로 도망쳤었지요……. 여전히 기억이 나요. 그날의 풀벌레 소리. 그 여름날의 밤이.”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게 분명히 보이는데 주변에서 당신을 가만두지를 않았지요.”
“그래요. 결국 정원까지 다른 후계자들이 따라붙었었고…… 저는 구두까지 잃어버리면서 도망쳤었어요. 그러다 너무 지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던 바로 그때, 당신이 나타났죠. 내가 잃어버린 구두를 들고.”
나이가 들면 옛 기억에 의존하여 살아가게 된다더니 그 말이 딱 옳았다.
이난나는 어느새 주름이 많이 지고 머리칼이 희게 센 제 남편을 다정히 응시했다.
그녀를 안고 나무 위로 도망쳤던 그날의 소년이 여전히 겹쳐 보였다. 섬세하고 자상한, 배려심이 있던 소년이.
아마 이런 게 사랑이겠지.
임마누엘 역시 아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다 마른 손을 가만히 쥐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기왕이면 플로린이 우리 손자를 선택해 주면 좋겠지만…… 어찌 될지 즐거이 지켜봅시다.”
“아직 플로린이 만나지 못한 후계자가 둘 더 있으니까요.”
“그렇지요. 허나 곧 만나게 될 겁니다. 플로린의 첫 외부 일정을 사관 학교로 정했으니.”
사관 학교에는 단테가 있다.
사관 학교는 한 번 들어가면 졸업할 때까지 나올 수 없는 기숙사 제도를 취하고 있었는데 신분이나 재산이 아닌 오직 실력으로만 학생들을 평가한다는 초대 학장의 원칙이 있었다. 따라서 외부의 권력이 학교를 좌지우지할 수 없게 하기 위해 가족 등의 방문은 엄격히 제한된다.
단테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어도 학교 측에 발전 기금을 많이 내는 것 외에는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답답했던 참이었다.
“학부모 참관 일에 어른이 가면 학교 측에서 모든 것을 정돈하여 보기 좋게 해두니 실상을 알 수가 없지요.”
“허나 이번 토너먼트 우승자전에 플로린이 간다고 하면…… 그쪽에서도 방심을 할 테고요.”
“그렇습니다, 부인.”
진짜 잘 지내고 있는 거라면 다행이지만…….
임마누엘의 눈빛이 무거워지던 찰나였다.
“할아버님! 저 이제 선물 풀어봐도 돼요?”
사랑스러운 소녀가 은발을 살랑거리며 쪼르르 달려왔다.
자꾸만 손길이 가는 조그만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임마누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들 얼마나 성의를 보였는지 한번 보자꾸나.”
* * *
마도 제국 사교계는 연회가 열릴 때면 연회장 입구에 선물 담당 하인과 테이블을 두는 게 일반적이었다. 겸손함보다는 오만함을, 정신적인 것보다는 물질적인 것을 우선시하는 풍조가 있기에 얼마나 많은 선물이 들어왔는가가 곧 연회 주인의 위세였다.
“그럼 이제…… 대 마도 제국 연회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즐거운 시간! 선물 개봉식이 있겠습니다.”
사회를 맡은 상급 하인이 큰 소리로 외치고, 드리블랴네에 고용된 마법사가 세 개의 선물 탑을 조심히 옮겨 연회장 중앙으로 가져왔다.
이윽고 어른의 키만큼이나 높이 쌓인 선물 상자 앞에 이 연회의 주인공인 은발의 소녀가 섰다.
“제법 귀엽네요. 알비노인데도요.”
“그러게요. 어찌 됐든 저 아이가 앞으로 드리블랴네를 이끌게 될 테니 잘 보이는 게 좋겠죠.”
사실 소녀는 드리블랴네와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 외양이었다.
체리 같은 눈동자와 조그마한 코. 작은 키가 인형처럼 앙증맞다. 상대를 찍어 누르는 거만한 페로몬이 아니라 그 나이대 아이다운 환한 표정과 연약한 페로몬이 사랑스럽기는 했다.
“부디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해야 할 텐데……. 눈동자가 체리 같다고 들어서 말릭 왕국산 루비를 겨우 구했거든요.”
“성의를 많이 보이셨네요.”
“네. 그러길 잘한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 흉사 이후에 연회가 제대로 열린 게 처음이잖아요.”
귀부인들이 너도나도 부채를 펼치고 입가를 가린 채 소곤거렸다.
선물이 들어오면 그 주인이 손님들 앞에서 열 개쯤은 풀어보는 것이 예의였다.
황금 새장, 다이아몬드가 박힌 오르골, 어른이 되면 쓸 수 있을 만한 부채, 아이용 실크 장갑과 보물 상자……. 갖가지 물건을 꺼내 들며 행복하게 웃는 소녀를 지켜보는 또 다른 시선이 있었다.
‘진작 이리 해줄 것을 그랬군.’
사실 키락서스는 한참 전부터 연회장에 와 있었다. 누군가 말을 걸어오는 게 귀찮아서 모습을 감추고 있었을 뿐.
드디어 선물 개봉식이 시작되자 키락서스는 아공간(마법사가 다른 차원에 만들어두는 개인 창고. 자신의 마력 크기만큼 창고 크기를 키울 수 있다.)을 열어 자신이 준비한 선물을 꺼냈다. 그리고 이걸 줄 만한 적절한 타이밍을 기다렸다.
‘네 삶이 늘 가시밭길이었음을 예전에는 몰랐단다, 플로린.’
없어진 시간 속에서 플로린은 저렇게 활짝 웃지 않았다. 늘 어딘가 주눅 들어 있고 왠지 모르게 불안해 보였지.
플로린이 그에게 잘 보이려고, 그래서 죽지 않으려 애를 썼다는 건 나중에나 알게 된 일이었다.
‘나의 무지는 너를 벼랑 끝으로 몰았고, 너는 결국 다이스를 찾아내 끊임없이 먹어야 했었지.’
인간화를 유지하기 위해.
쓸모가 있어야 하니까.
버림받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플로린은 다이스를 먹었다. 그게 수명을 깎아낸다는 걸 몰랐겠지만 알고 있었더라도 먹었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이제 내가, 네가 그토록 바라던 가족애라는 걸 줄 것이다.’
네가 바라지 않는다 하더라도 쥐여주마. 사랑을 받다받다 질려서 네가 제멋대로에 버릇없는 아이가 될 때까지.
‘언제나 얌전하고 사고를 치지 않는 아이가 아니라…….’
어디서 어떤 일을 저질러도 당연히 어른이 수습해 줄 거라 믿는 그런 아이가 되도록.
키락서스는 자신의 양육 방식을 그렇게 결정했다. 플로린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
그 자격을 누가 정했느냐고 묻는다면 키락서스는 당당히 대꾸할 수 있었다. 미래에서 회귀한 그가 정했노라고.
“플로린.”
“앗, 아버님!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지각쟁이!”
플로린이 밝은 얼굴로 외쳤다.
그런데 플로린의 호칭을 들은 몇몇 눈치 없는 귀족들이 인상을 쓰기 시작했다.
“아버님이라니요? 물론 차후에는 키락서스 님이 19대 공작이 되시고, 저 아이가 20대 공작 부인이 된다지만……. 지금은 아니잖아요?”
“당장은 소가주님이나 키락서스 님이라고 칭하는 게 맞죠. 버릇이 없네요.”
“어쩜. 누가 들으면 키락서스 님이 제 양부라도 되는 줄 알겠어요. 따지자면 시아버지도 아니잖아요.”
“그렇죠. 드리블랴네의 며느리 제도야 ‘가문과 어릴 때부터 결혼했다’라고 하지만……. 키락서스 님은 혼전순결 때문에 자식도 없잖아요. 그런데 막무가내로 아버님이라고 하는 건 이상하네요.”
버러지 같은 것들.
속으로 혀를 찬 키락서스는 놈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집요하게 기억했다.
그가 허락한 일이다. 애초에 그가 허락하지 않았더라면 그 누가 아버님이라 부를 수 있었을까.
키락서스는 플로린의 입에서 나오는 ‘아버님’이란 호칭이 좋았다. 아빠는 될 수 없지만 아버님 정도는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좀 억지이긴 해도 무슨 상관인가. 그가 원한다는데.
키락서스는 자신이 원하는 걸 얻어내지 못한 적이 없었다.
“네 선물을 만드느라 늦었는데 지각쟁이라니. 억울하군.”
키락서스는 능청스레 분위기를 넘기며 늦게 왔다는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플로린의 곁에 서 있던 이안이 묘한 표정으로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마치 그가 오래전부터 연회장에 와 있었음을 안다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