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s Daughter-in-law is Inherently Powerful RAW novel - Chapter (5)
악당의 며느리는 권력자 체질입니다-5화(5/173)
그렇게 아기 담비가 지쳐 잠든 뒤.
스르륵. 반투명한 장막이 거두어지며 벽난로에 기대어 서 있던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강대한 마력이 들끓는 청록빛 눈동자는 털공 같은 조그마한 존재에게서 한 소녀를 보았다.
끝이 붉게 물든 반짝이는 은발과 하얗고 통통한 동글 귀. 아직 살이 찌기 전인지라 마른 티가 나는 작은 손과 매끄러운 발.
한때 그를 향해 ‘아버님’이라 불러주었던 총명하고도 사랑스러운 아이.
솔직하고, 정직하고, 이따금 지나치게 대범해서 그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던…….
그는 그 아이를 되찾았다.
‘아니, 아직 완벽하게 찾은 것은 아니다.’
방심해서는 안 된다. 키락서스는 제 손안에 담긴 주사위처럼 생긴 보석으로 눈길을 미끄러트렸다.
그의 소중한 며느리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끔찍한 물건. 이번 생에 그는 그것을 미리 회수했다.
그러지 못한 것이 그의 첫 번째 후회였으므로.
–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네가 누군가를 위해 ‘소원’을 쓸 줄이야.
순간, 키락서스의 그림자가 울렁거리더니 서서히 일어서며 사람 형태를 갖추었다.
이마에 두 개의 커다란 뿔이 돋은 그것은 분명 사람의 형태를 취하고는 있으나 사람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만큼 불온했다.
– 정말 그 소원이면 되겠나? 세 개 중 하나인데.
“상관없다. 그걸로 해.”
– 받아들이겠다. 네가 원하는 대로 모두의 기억을 바꿔주지.
다각다각.
손안에 거머쥔 보석이 거칠게 부딪쳤다.
이로써 그는 두 번째 후회를 없앨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 하녀로 들어왔던 과거가 이 아이에게 끈질기게 들러붙어 떨어져 나가질 않았지.’
저택 안에서는 그러한 과거가 있었더라도 상관없었다. 누구도 플로린을 무시할 수 없도록 그가 지킬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사교계에 나가게 되자 누군가가 플로린의 뒤를 캤고 약점을 잡았다. 결국 첩자였던 것까지 들키게 되어 플로린은 큰 곤욕을 치렀어야 했다.
지난 후에야 키락서스는 그 일 또한 후회했다.
그의 능력으로 과거를 없애 놓을 것을.
그랬으면 그 작은 아이가 상처받아 몰래 울 일도 없었을 텐데.
‘그래, 처음에는 이용해 먹기 좋아서 데려왔었다.’
첩자라는 약점을 쥐고 있으니 배신할 수 없고, 경거망동할 수도 없다. 신성 제국 출신이라 마도 제국 내에 가족도, 친구도 없으니 고립시키고 감시하기에 알맞았다.
그는 말 그대로 며느리 노릇을 할 ‘인형’이 필요했고, 그래서 눈에 띈 플로린을 데려왔다. 사실 플로린이 아니었더라도 비슷한 조건이면 누가 됐든 상관없이 데려왔으리라.
‘……그랬었는데.’
저 작은 아이가 그에게 얼마나 다채로운 감정을 알려주던지.
그는 자신이 평생 부성애를 가질 수 있을 리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플로린을 볼 때면…… 이상하게 자신에게도 그런 사람다운 감정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저 아이 하나를 못 잃어서 이렇게까지 했으니…… 이런 걸 보고 부성애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키락서스의 입매가 조용히 말려 올라갔다.
– 끝났다.
째깍.
지금 이 순간 플로린의 과거는 그와 플로린을 제외한 모두의 기억에서 삭제되었다.
이제 이 세상의 그 누구도 플로린이 첩자였던 것도, 하녀였던 것도 기억하지 못하리라.
‘플로린은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데려온 아이. 그거면 된다.’
그의 다짐은, 그 누구도. 심지어는 플로린조차 몰라도 상관없었다. 알아달라고 시간을 돌린 것이 아니었으므로.
* * *
다음 날, 나는 니나가 가져다준 따스한 우유와 산양젖 치즈, 고소한 빵으로 아침을 든든히 먹었다.
배가 부르니까 이제 좀 살 것 같아.
“묻히고 먹으면 못 쓴다.”
내 곁에 서서 커프스단추를 끼우던 키락서스가 손수건을 뻗어왔다.
그가 손을 내밀 때마다 움찔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피하진 않았다. 날 슥삭 할 생각이었으면 벌써 했을 테니까.
‘게다가 세계 미남 지수를 한 단계 더 높인 미모…….’
깔끔한 정장으로 갖춰 입고 머리를 넘긴 키락서스는 너무나 눈부셨다. 저 얼굴에 적응될 날이 오긴 할까 싶을 정도로.
‘하지만 속으면 안 돼. 원작에서 키락서스는 죽은 동족들의 사체로 군대를 만드는 짓도 한 미친놈이야.’
그리고 그는 라흰에게 푹 빠져 있는 제 친척 조카들을 하나씩 사냥하기까지 했다. 무심하고 냉정하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어쩌면 날 금세 내쫓을 수도 있어.’
아니면 오늘 가문 회의에서 나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할 수도 있지.
‘아마 가문 회의에서 내가 이곳에서 살아도 될지 말지를 정할 거야.’
원작에서도 드리블랴네 가문은 여러 큰 안건들을 가문 회의를 통해 결정했다. 그러니 알비노를 며느리로 삼는 것도 당연히 가문 회의에서 결정이 나리라.
‘지금 내 처지상 가장 좋은 건 이곳에 며느리로 눌어붙어 있는 거야.’
하지만 그게 안 된다면 최대한 오랜 시간 동안 머물면서 독립 자금도 모으고, 뭔가를 배우기도 해야 한다. 그래야 나가서 뭘 하더라도 해 먹고 살지.
그런데 이 방은 어떻게 된 게 그 흔한 보석 하나 없네.
‘좀 사치스럽게 살란 말이야! 장식장에 보석이라도 있으면 좀 좋아?’
그럼 내가 하나쯤 슬쩍 베개 안에 숨겨놓을 수도 있잖아.
“아. 서류상으로 네 이름은 플리더군.”
“힉!”
그때, 자기 욕을 하는 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아주 가까이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삐걱거리며 돌아보니 키락서스가 몹시 태연한 자세로 내 머리 위에 상체를 숙이고 있었다.
“널 여기 밀어 넣은 신성 제국 놈도 찾았단다. 사지를 찢어 개밥으로 던져줬으니 놈들이 접근해 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단다.”
“……뀩!”
밤새 신성 제국까지 가서 깽판치고 오셨냐고요!
‘역시 악당! 무서워요, 무서워요!’
속으로 호달달 떨었지만 겉으론 억지로 의연한 체하는 나를 훑으며 키락서스가 말을 이었다.
“네 서류를 처리한 하녀도 죽여 없앴으니 네 출신에 대해 알 만한 자는 이제 없고.”
“네, 네에.”
“하지만 그 이름을 그대로 쓰긴 싫으니 내가 플로린으로 고치마. 앞으로 네 이름은 플로린이다.”
와, 막무가내…….
하지만 그에게 초면부터 약점을 잡힌 나는 아무런 항의도 할 수 없었다.
뭐, 이름이 예뻐서 싫지 않기도 하고.
‘플로린.’
무려 빙의 7회차 만에 생긴 이 세계 이름이었다.
어쩐지 가슴이 찡해서 콧잔등을 찡그리고 있자니 악당 놈이 내 감동을 와자작 부쉈다.
“미트볼에 주름이 졌군. 며칠 사이 육즙이 빠졌나.”
“갸악! 나 꼬기 다짐! 아, 아니거든요……!”
발끈해서 버럭 소리를 내지른 나는 상대가 누구인지 한 박자 늦게 깨닫고 목소리를 스르르 줄여 웅얼거렸다.
키득 웃던 키락서스는 내 말을 무시하고 헛소리를 이어갔다.
“좀 더 지방이 많고 영양이 풍부한 식사를 먹여야겠군.”
헉, 혹시 저녁엔 고기 주나?
그럼 좋겠다.
사실 계절을 빼앗아버린 성녀 탓에 생태계가 파괴된 지 오래다. 초식계 수인들이 농사를 지을 수 없어지고, 들판에선 초식 동물들이 굶어 죽고. 자연히 육식 동물들도 사라져 가고 있는 요즘.
드리블랴네야 거대한 가문이니 크게 문제는 없다지만, 먹일 입이 많으니 평소 식단이 그리 대단할 수야 없는 법이었다.
그래서 나는 고기가 빠진 아침 식사에 아무런 불만을 가지지 않고 있었다.
하녀들 사이에서 간신히 얻어먹었던 콩 껍질 같은 것에 비하면 진수성찬이었거든!
‘뭐어, 조금 더 달콤한 걸 먹을 수 있으면 좋긴 하겠지만 말이야.’
과자라거나 초콜릿이라거나 케이크 같은 거.
나는 디저트를 엄청 좋아했는데 지금껏 빙의한 대상이 다 미물이어서 여태 강제 디저트 금욕 중이었다.
소금쟁이가 쿠키 같은 걸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바스락.
그때였다.
“…….”
달콤한 냄새?
설탕과 버터, 밀가루의 적절한 조화가 느껴지는 향에 코를 옴씰거리며 돌아보자 키락서스가 허공 어딘가를 더듬는 게 보였다.
마치 오븐이라도 여는 것처럼 허공에서 끼익 하는 소리가 나더니 이윽고…….
“꾸끼……?”
갓 구워져 김이 모락모락 나는 쿠키가 그의 손바닥 위에 놓였다. 그러더니 멍하니 쳐다보는 내 앞에 그 귀한 걸 내려주는 게 아닌가!
“먹어라. 살이 좀 쪄야겠군.”
“내, 내 거……?”
까딱.
그가 눈썹을 추켜세웠다.
“열을 식히는 마법을 걸었으니 단단해졌을 거다. 바로 먹어도 좋다.”
“꾸끼…….”
내게 쿠키가 주어졌단 사실이 믿기지 않아 넋을 빼고 쳐다보던 나는 아주, 아주 소중히 그걸 품에 안았다.
꼴깍. 버터의 풍미가 입안에 침이 돌게 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앙 하고 입을 벌리고 쿠키를 조심스레 한입 물어보았다.
“!!!”
순간 눈물이 비죽 났다.
“마, 마이떠…….”
“다 먹으면 또 주마.”
“디짜……?”
“그래. 대신 그걸 먹는 동안 잠깐 이야기를 들어라.”
끄덕끄덕. 저도 모르게 꼬리가 살랑 흔들렸다.
‘사실 좋은 사람일지도 몰라, 키락서스는.’
절대 내가 쉬운 담비가 아니다.
쿠키 하나에 넘어가는 어, 그런 담비 아니야.
나는 쿠키가 바스러질까 싶어 정말 조심조심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던 키락서스의 눈매가 아주 잠깐 온화하게 풀린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