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s Daughter-in-law is Inherently Powerful RAW novel - Chapter (57)
악당의 며느리는 권력자 체질입니다-57화(57/173)
키락서스의 집념 어린 뒷모습에 임마누엘은 침음성을 삼켰다.
‘어째서 저렇게까지……. 늦게 본 딸처럼 느껴지는 모양이군.’
하긴, 임마누엘 역시 흰 담비가 눈에 밟히더랬다.
처음에는 그저 쓸모 있겠다 싶었고 그다음에는 정말로 유능해서 놀랐다. 이후로 플로린은 놀라운 일들을 계속해서 보여주었는데 그러고도 자신은 대단치 않게 생각하는 듯했다.
소탈하고 소박한 성품을 지닌 아이.
욕심이랍시고 내봤자 맛있는 디저트를 하나 더 먹으면 그저 행복한 얼굴을 한다.
그러다 플로린이 인간화를 했을 때, 임마누엘은 조금 충격을 받았다. 드리블랴네의 이름을 입은 아이들과는 너무도 달라서.
지나치게 예뻐하면 후계자들이 외려 플로린을 질시하는 일이 생길까 싶어 적당히 데면데면 대했는데 사실 속으로는 귀엽다는 생각을 몇 번이고 하고 있었다.
그래서 임마누엘은 플로린을 대할 때면 저도 모르게 페로몬을 최대한 쑤셔 박아 감추었다.
그가 솔선수범하여 그리하니 다른 이들도 눈치껏 플로린을 대할 때 보다 조심하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플로린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 이 집안 식구는 물론이고 가신이며 장로들에게까지 나름대로 배려를 받고 있었다. 알비노이지만 이토록 강력한 힘을 지닌 가문 내에서 아무 문제 없이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어린아이들에게 따로 경고를 할걸 그랬네요.”
“아닙니다, 부인. 경고를 했어도 한 번은 이런 일이 벌어졌을 거예요.”
이윽고 임마누엘은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정원으로 나섰다.
오래전, 그가 후계자였던 시절에는 지금의 상황보다 더 심각한 싸움이 여러 차례 벌어졌었다.
그러니 이번 싸움은 사실 별것 아니지만…….
“아이들이 크게 혼이 났으니 이번 기회를 딛고 성장하기를 기다려 봅시다.”
플로린이 깨어나면 보약이 될 만한 것이나 잡아다 먹여야겠다.
임마누엘은 턱을 쓸며 눈을 빛냈다.
어디에 용이라도 있으면 한 마리 잡아다 고아 먹이는 건데.
‘무얼 먹이는 게 좋을꼬?’
* * *
새벽 다섯 시 삼십 분. 여명이 밝아오는 시각.
플로린의 이마에 물수건을 갈아주던 린다의 고개가 툭 떨구어졌다.
옆에서 뻑뻑한 눈을 문지르며 플로린의 손톱과 발톱에 혈기가 사라지진 않는지 살피던 유모 역시 어느 순간 눈을 감아버렸다.
옆방에서 대기하며 졸다 깨다를 반복하던 의사도, 방문 앞을 지키던 호위 기사 존과 심지어는 살로네스조차 소리 소문 없이 의식을 잃은 바로 그 시점.
거만하게 느껴지는 자세로 다리를 꼰 채 턱을 괴고 있던 키락서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빨리도 나타나는군.”
어조에 묻어나는 빈정거림에 상대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도 가벼워서 그대로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너무 화내지 마, 자기야. 그래도 이리 왔잖니.”
사륵, 사르륵.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존재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빛으로 된 별가루가 폴폴 날렸다.
신성 제국의 황족들과 같이 바다를 닮은 새파란 머리칼과 눈을 지닌 ‘존재’는 만면에 의뭉스러운 미소를 띤 채 키락서스를 스쳐 지나갔다.
“잘 컸구나. 다행이야.”
목소리가 비단결처럼 매끄럽다. 인간의 것이 아닌 듯 혼몽하고 매혹적이며 동시에 맑았다.
“이리 잘 클 줄이야……. 뿌듯한걸.”
몇 센티 정도의 허공에 둥둥 뜬 채 플로린을 내려다보고 있는 존재는 인간의 육신과 비슷한 형체를 지녔으나 그게 본 모습은 아니었다. 인간계에 간섭하기 위해 흉내를 내었을 뿐.
키락서스는 저 존재의 본 모습을 단 한 번, 본 적 있었다.
“가엾게도. 많이 아픈가 보구나.”
‘존재’가 플로린의 위로 허리를 가만히 숙이자 마치 강의 물줄기처럼 길고 긴 머리칼이 사르르 흩어져 내렸다.
‘존재’는 거추장스러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플로린의 둥근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대기가 가볍게 떨리더니 존재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정순한 빛의 조각이 플로린에게 가만히 스며들었다.
이윽고 플로린의 숨소리가 나아지는 걸 확인한 존재는 활짝 웃으며 몸을 돌렸다.
“당장 나타나지 않으면 내 신전만 골라서 부수겠다는 기도를 올리다니. 너무하잖아, 자기.”
“그러게 진작 나타날 것이지, 엉덩이가 무겁군.”
“세상천지에 그리 신을 꼬나보는 건 자기뿐일 거야.”
‘존재’가 서글픈 척 한숨을 폭 내뱉었다. 물론 그래 봤자 키락서스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만.
신성 제국의 멍청이들이었다면 천신을 만났다는 사실에 눈물을 줄줄 흘리며 숭배하느라 제정신이 아니었겠지만 키락서스는 신앙이라고는 개미 눈물만큼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 위대한 신이라는 존재를 만능 치료제 정도로 사용했다. 저자는 플로린의 상태를 빠르고 확실히 나아지게 할 수 있으니까.
집요한 눈길로 플로린의 안색을 살피던 키락서스는 상태가 확실히 괜찮아졌음을 확인하고서야 꽉 쥐고 있던 손아귀에서 힘을 풀었다.
이 정도로 죽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머리가 아는 것과 아픈 걸 직접 지켜보는 마음은 별개의 것이다.
이대로 두었다면 플로린은 분명 일주일은 넘게 앓아야 했겠지.
이후로 체력도, 기운도 많이 떨어져서 오래 고생했을 게 분명하다.
‘다행이군.’
긴 호흡과 함께 키락서스는 악물고 있던 어금니에서도 힘을 뺐다.
그런 뒤, 제 앞의 존재에게 느슨한 물음을 던졌다.
“할 말이 있다. 이번엔 과거보다 더 빨리 힘을 돌려주었던 모양인데.”
플로린이 말한 ‘비눗방울인지 물거품인지 알 수 없는 힘’은 다름 아닌 신성력이었다. 그것도 천신이 직접 내린, 교황이 가진 것보다도 더 순수한 힘.
그러나 그 힘을 플로린이 가지게 되는 건 키락서스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회귀 이전보다 더 일찍 갖는 건 더더욱 바라는 바가 아니었고.
“아아. 과거엔 이 아이가 혹여 미움받을까 싶어 저어했던 것뿐이란다. 이번 생에는 네가 이미 이 아이를 사랑하고 있으니 조금 더 일찍 힘을 깨달아도 좋지 않겠니.”
천신이 긴 소매로 입가를 가리며 살풋 웃었다.
실로 신성한 광경이었으나 키락서스는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으르렁거릴 뿐이었다.
“경고하지. 이번에는 계시 같은 거 내리지 마라. 또 그딴 짓을 해서 귀찮게 만들었다간 교황청을 가루로 만들 테니.”
“이잉, 너무해.”
천신이 또다시 눈가를 닦으며 슬픈 척을 했다.
존경심이라고는 좁쌀만큼도 들지 않는 태도에 키락서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런 자가 신이라는 걸 신성 제국 놈들이 알아야 하는데.
“하지만 알잖아. 이 아이는 내가 신들의 풀무에서 수억 번 담금질하여 간신히 탄생시킨 가장 깨끗하고 아름다운 영혼이라는걸.”
천신은 한쪽 눈을 찡긋하며 키락서스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빛이 모여들어 필요한 것을 형성해 주니 의자가 없어도 충분히 허공에 앉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아이를 몹시 사랑해. 그러니 내 사랑을 한껏 쏟아부어 줄 수밖에.”
팔랑팔랑.
빛으로 이루어진 눈부신 나비 떼가 날아올라 플로린의 머리맡에 무엇인가를 두었다. 그게 경전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본 키락서스는 깊은 한숨을 삼켰다.
회귀 이전, 플로린은 열일곱 살쯤 신성력을 각성했다. 가장 최악의 순간에, 가장 최악의 방법으로.
신성 제국의 고위층과 마도 제국의 고위층이 모두 모인 회담.
이 빌어먹을 신은 바로 그때, 교황의 눈앞에서 플로린에게 계시를 내려버렸다. 교황이 눈이 뒤집혀서 플로린을 가지려 한 건…… 글쎄. 당연한 결과였지.
“그래도 계시는 내리지 않을게. 내 아이가 행복한 게 가장 중요한데……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으니.”
“알긴 아는군.”
“그러니 성력을 좀 더 이르게 갖는 건 봐줘, 자기. 내가 창조한 영혼이니 마땅히 가져야 할 힘인걸. 애초에 한참 전에 성녀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하필 그때…….”
천신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려다 만 것인지 그는 눈치챌 수 있었다.
라흰.
신성 제국에서 성녀랍시고 떠받들었던 그 여자.
하긴 악신도 신이니 성녀라는 호칭에 틀린 점은 없나.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여자는 악신에게 성녀가 되고 싶다는 소원을 빌었다고 했다.
“내 형제의 화신이 먼저 성녀가 되고 싶다는 소원을 빈 바람에 내 가여운 아이는 세계 바깥으로 튕겨져 나가고 말았어. 자신이 존재해야 하는 세상이 아닌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며 얼마나 힘들었을까.”
“…….”
“다행히 내 형제가 선택한 아이가 두 번째 소원으로 탐욕스러운 것을 빈 덕에 내가 다시 이 아이를 데려올 틈이 생겼지만.”
라흰이 영원한 겨울을 빌어 봉인당하자 악신의 영향력은 줄어들고 천신은 영향력은 커졌다.
그에 천신은 곧바로 힘을 펼쳐 세계를 둘로 나누었다.
수면 아래의 세계와 수면 위의 세계.
수면 아래의 세계는 ‘라흰’만이 유일무이한 성녀로 존재하는 세상이었다.
반면, 수면 위의 세계는 플로린이 존재하게 될 세계다.
천신이 그렇게 세계를 나눈 건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보고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플로린의 영혼을 거두어 오기 전, 수면 아래의 세계를 책이라는 형태로 만들어 먼저 읽도록 유도했다.
그게 그가 자신의 화신에게 해줄 수 있는 축복이었다.
원래 존재했어야 할 세계에 대한 부담감과 거부감이 줄어들도록. 대적자 ‘라흰’에 대해 미리 알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