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s Daughter-in-law is Inherently Powerful RAW novel - Chapter (58)
악당의 며느리는 권력자 체질입니다-58화(58/173)
하지만 안타깝게도…… 영혼을 거두어 미리 점찍어둔 육신에 넣으려 할 때마다 악신이 훼방을 놓았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실패한 끝에 겨우 성공했을 땐 제아무리 감정에 초월한 천신이라 하여도 기뻐서 춤을 출 지경이었다.
“쯧.”
그런 천신의 맹한 표정을 꼬나보던 키락서스는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이미 일어난 일, 어쩔 수 없다. 이번 생에는 플로린을 지킬 수단을 더 강력하게 마련하는 수밖에.
“아, 인간계에 간섭할 수 있는 시간은 어찌나 짧은지. 네 곁에 더 있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구나.”
천신이 플로린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대며 탄식했다.
키락서스는 벌써 신체가 투명해지기 시작하는 천신을 흘긋 보고는 시간을 계산했다.
신이 이 세계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시간은 몹시 짧다. 길어봐야 십 분 남짓.
‘이제 오 분쯤 남았나.’
키락서스는 남은 시간을 알뜰하게 써먹기로 했다.
“플로린이 단테를 기억하는 모양이던데.”
“그때도 말했지만 회귀라는 건 완벽한 게 아니야. 일종의 눈속임 같은 거지. 시간은 돌아갔고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었지만…… 그래도 회귀 전의 강한 충격이나 기억은 무의식 깊숙한 곳에 남아 있을 거야. 첫 번째가 없어지고 다시 첫 번째가 시작되는 게 아니라, 이건 두 번째이니까.”
“그렇군.”
쉬이 이해하기 힘든 농담 같은 말이었으나 키락서스는 알아들었다.
첫 번째 삶이 없었던 것처럼 소멸하고 다시 첫 번째로 돌아간 게 아니었다. 회귀라고는 해도 이건 두 번째 삶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해야 한다.
새하얀 새 캔버스가 아니라, 이미 한 번 그림을 그린 적 있는 캔버스에 흰 칠을 하여 덮어놓고 다시 그리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전의 발자취가 무의식 저편에 남아 있다는 거군.’
대충 이해한 키락서스는 턱을 까딱였다.
그리고 그 순간, 천신의 음성이 여러 공간에서 동시에 울리는 것처럼 크게 파문을 그렸다.
“첫 번째 싸움에선 나의 플로린이 이겼지만 하필 다이스 중독으로 죽는 바람에……. 내 친애하는 형제가 다시금 세상에 간섭할 수 있게 되었지.”
그와 동시에 마치 공간이 분리되는 것처럼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키락서스는 의자에 앉아 있는 자신을 보았고 동시에 서 있는 스스로를 인지했다.
인간의 세계와 천신의 영역. 그 중간을 잇는 다리에 선 그는 새파란 공간 가득히 떠오르는 장면을 보았다.
어린 플로린이 웃는다. 조금 자란 플로린이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무심코 안아주었으나 그건 환상일 뿐.
빛무리에 휩싸인 나비 떼가 날아오르며 또 다른 기억을 보여주었다.
라흰이 나타났을 때, 플로린은 우선 벗이 되려 하였다. 그러나 라흰에겐 그럴 생각이 없었고 끝내 둘은 반목하여 맞서게 되었다.
어느새 숙녀가 된 플로린의 첫 데뷔당트 날, 키락서스는 기꺼이 자신이 에스코트를 했다. 그게 라흰을 크게 자극했고 이후 벌어진 사건들은 플로린을 좀 더 힘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라흰의 여러 죄를 밝혀내며 플로린은 승리를 거두었다.
여기까지였으면 이제 행복한 결말만이 남아 있어야 했다. 불행의 그림자는 드리워져선 안 되는 거였는데.
“아버……님. 너무…… 너무 아파……요.”
이윽고 플로린은 뼈마디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하게 마른 채 숨을 쉬지 못하고 그를 부여잡았다…….
“이건 지난 생이로군.”
키락서스가 무감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어깨를 짚은 채 둥둥 떠오른 천신은 귓가에 대고 나른히 속삭였다.
“라흰이 죽었을 때, 나의 형제는 이 세계에서 영구히 추방될 예정이었다. 나와의 내기에서 졌으니까. 하지만…….”
“플로린도 죽었지. 거의 동시에.”
그러니 두 신의 내기에 승자는 없었다.
이후, 악신은 빠르게 계약자를 찾았다. 그 계약자는 온 세상에 다 차원의 게이트를 열어 멸망을 초래했다.
그에 천신은 키락서스에게 접근했다. 악신의 계약자와 동등한 힘을 지닌 인물은 오직 그 하나뿐이었으므로.
허나 키락서스는 천신과 계약하지 않았다. 그저 천신의 도움을 좀 얻어 시간 역행 마법을 완성했을 뿐.
마침내 시간이 빠르게 되감겨 플로린을 처음 만난 바로 그날이 다시 찾아왔을 때-
키락서스는 그날 밤.
기꺼이 악신과 계약했다.
“신에게도 제약이 있다는 게 우습지 않아? 한 번에 화신 하나, 계약자 하나. 그 이상은 둘 수 없지.”
“네가 알려준 것이지 않나.”
“그렇다고 정말 시간을 돌리자마자 내 형제와 계약을 할 줄이야. 자기는 내가 본 인간 중에 가장 미친놈이야.”
게이트가 열릴 것을 원천 차단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게이트를 열 수 있는 놈과 악신이 계약하지 못하게 하면 된다.
‘만에 하나, 플로린이 살아 있는데도 그자가 게이트를 연다면?’
키락서스는 불안했다.
자신이 죽은 뒤에도 그자는 영생을 누릴 텐데, 어느 날 갑자기 미쳐서 게이트를 열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막을 자가 아무도 없을 때, 플로린의 삶이 엉망이 된다면…….
따라서 키락서스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결론에 따라 제 영혼을 걸고 악신에게 계약을 청했다.
이성보다는 본능을, 미래에 대한 대비보다는 당장의 쾌락을 좇는 성격상 악신은 그라는 탐스러운 먹잇감을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키락서스의 예상은 적중했다.
‘누님이 숨겼던 다이스를 미리 빼돌려 섭취할 수 없게 했고 인간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플로린이 사랑받을 수밖에 없도록 가문 내의 여론을 교묘히 조작했고 큰 뒷배가 되어줄 살로네스 아이다호를 데려왔다.
악신은 그와 계약을 한 상태로 게이트를 연 그자와도 계약할 수는 없으리라.
둘을 감당하기에는 버거울 테니.
이 정도면 충분히 미래를 바꾼 것이 아니겠는가?
그의 죽음 이후 영혼이 일곱 지옥 가장 깊은 곳에 처박힌다고 한들, 이제 키락서스는 후회 한 점 없었다.
방해물은 미리 모두 치워두었으니 이번 생에도 플로린이 이길 것이다. 그리고 플로린은 행복하게 살아가겠지.
“아, 이제 가봐야겠네. 더 지체하면 내가 너와 만났다는 걸 형제에게 들키겠어.”
신이 제 화신을 만나러 강림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이 자리에 플로린이 있다는 걸 핑계로 잠시간 악신의 눈을 속일 수 있었지만 더 시간을 끌면 분명 이상한 점을 눈치챌 테니 이제 물러가야 할 때였다.
“누님은 잘 지내나?”
“응?”
“시치미 떼지 마라. 다시 살아보니 알겠더군. 누님의 죽음은 석연찮다는 걸.”
마지막일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 신과 마주할 일은 두 번 없을 테지.
이번에 천신이 강림한 것 역시 플로린에게 신성력을 건네주기 위함이니…….
그래서 키락서스는 물음을 던졌다. 그건 오랫동안 제 가슴 한켠에 머물러 있던 질문이었다.
“으음.”
그에 천신은 아주 잠깐 고민했다.
키락서스는 세계의 진실과 비밀에 굉장히 가까이 접근한 인간이었다. 그 힘 역시 무한에 이르렀으니 이제는 인간이 아닌 반신(半神)이라 불러야 옳은 수준이었다.
“뭐, 네겐 감춰진 이야기를 알려주어도 되겠지. 그러나 네가 살아 있는 동안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을 거란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지도 몰라.”
“상관없다.”
“그렇다면야……. 보여줄게.”
앎은 고통이 된다. 나눌 수 없는 것은 업보가 되고 그렇게 긴 생 내내 괴로우리라. 그럼에도 진실을 바로 보기를 택한다면 보여줄 수밖에.
“아리아드네는…….”
키락서스의 시야에 낯선 건물이 비쳤다. 잿빛으로 흐린 하늘과 쇠락한 땅의 기운과 차갑고 이질적인 바람의 맛이 들어찼다.
“……쌍방 교환이었어. 저 아이의 영혼을 다시 불러들이려면 이 세계에서 같은 무게의 영혼이 나가야 했으니.”
설명은 거기까지.
다만 키락서스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저 세계는 누이가 온 곳이다.
누이는 자신이 비롯된 곳으로 돌아갔구나.
차라리, 잘된 일이다. 남겨진 이들을 돌아보지 않는 건 참으로 누이다웠다. 그러니 저곳에서도 분명 잘 지낼 테지.
“이 모든 진실은 자신의 대적자를 만나는 그 순간, 이 아이도 알게 될 거란다. 그때가 되면 넌 덜 외로울지도 모르겠네.”
천신의 마지막 속삭임은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 아스라이 울려 퍼졌다.
그걸 마지막으로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키락서스는 현실로 밀려났다.
‘……돌아왔나.’
갑작스레 다시 입은 육신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굉장히 불쾌한 감각이 닥쳐왔으나 그는 아무런 티를 내지 않았다.
그가 계약한 악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오직 천신의 영역에 있을 때뿐이다. 천신의 힘으로 악신의 시야를 혼동시키는 그 찰나 외엔 단 한순간도 지켜보는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살 때도, 죽어서도 영원한 감옥.
그럼에도 키락서스는, 진실로 후회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