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s Daughter-in-law is Inherently Powerful RAW novel - Chapter (59)
악당의 며느리는 권력자 체질입니다-59화(59/173)
“아버님이 제 아빠였으면…… 좋겠어요.”
언제나 꿋꿋하던 아이가 꼭꼭 숨겼던 마음 하나를 털어놓았던 그날이 기억난다.
잠든 척하고 있던 그의 근처로 다가와 한참을 머뭇거리던 소녀는 쥐고 있던 카네이션 한 송이를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다음엔 차마 직접 달아주지도 못하고 책상에 몰래 올려놓곤 달아났지.
굳이 후회라고 할 만한 걸 고르자면 시간을 돌리는 바람에 그 카네이션이 사라졌다는 거였다.
죽는 날 안고 죽으려고 마법으로 보존 처리까지 해두었는데.
‘뭐, 그래도 이번엔 쿠키 조각과 사과 조각, 해바라기 정도를 획득했으니 됐나.’
사과 조각은 강탈한 것이었지만 키락서스는 그런 사소한 사실 정도는 얼마든지 모른 척할 수 있을 만큼 뻔뻔했다.
사관 학교에서 플로린이 만들어주었던 해바라기는 지금도 마탑에 잘 보관되어 있다. 누구도 근처에 다가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보호 마법을 수십 겹 쳐놓았으니 그가 죽는 날까지 싱싱할 것이다.
‘이번 생엔 죽을 때 해바라기와 함께 묻히겠군.’
그거 나쁘지 않은데.
“으음……. 어?”
“언제 잠들었…. 헉. 소가주 님! 여전히 여기 계셨어요?”
이윽고 에반젤린과 린다가 차례로 깨어났다. 강제로 잠들었던 이들이 여기저기서 깨어나는 기척을 밟아가며 그는 플로린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잠시 뒤.
“으응…….”
플로린의 눈꺼풀이 꿈틀하고 움직였다.
바라마지 않던 순간이었다.
* * *
눈을 뜨니 어느새 오후였다.
나는 한낮의 태양이 온 세상을 따사롭게 비추는 걸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지금이 대체 몇 시야?
‘와, 진짜 오래 잤네.’
물론 마지막 기억이 그다지 좋진 않았지만 이상하게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몸이 개운했다.
이대로 벌떡 일어나서 권투라도 할 수 있을 것처럼 기력이 펄펄 난달까?
“내가, 진짜 미안해. 잘못했어, 플로린…….”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꽤나 심각했기에 나는 차마 지금 내가 망아지처럼 건강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양어머니가 팔짱을 낀 채로 서리가 맺힐 듯한 눈빛을 하고 계셨다. 그 앞에는 단테와 이안이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특히 단테 쪽은 거의 혀라도 깨물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음……. 뭘 잘못했는지 알겠어?”
나는 침대에 앉은 채였는데 등 뒤에 유모가 쿠션을 어마어마하게 받쳐주어서 몹시 푹신했다.
프릴이 잔뜩 달린 분홍색 쿠션과 인형 사이에 파묻혀서 분위기를 잡자니 영 힘들지만…… 그래도 이 기회를 잡아서 단테의 버릇을 고쳐야지.
“내가, 내가 널 함부로 대했어. 그러면 안 되는 건데…….”
끼잉.
죽상을 한 단테는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흐르는 눈물을 거칠게 닦았는지 아직 여린 피부가 다 벗겨져서 뺨도 발갛고.
사실 좀 많이 불쌍한 꼴이었다. 옷도 안 갈아입었는지 어제랑 똑같은 데다 제어력을 잃었는지 동물 귀가 솟아 있었다.
아, 정확히는 귀가 축 눕혀져 있었다.
‘아, 귀여워서 좀 웃음이 나.’
만약 일어났는데 몸이 안 좋았다면 기분이 상당히 나빴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용이라도 고아 먹은 것처럼 기운이 솟아서 가만히 있는 게 더 힘들었다.
“크흠. 나는 후계자들이 다퉈서 차지하는 트로피가 아니야. 내가 너희 중 누군가를 선택하는 거지.”
나는 양어머니가 해주셨던 말씀을 냉큼 따라했다.
“……응.”
“선택의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분명히 말해둘게. 난 내가 좋아하는 사람보다 가주 자리에 더 어울리는 사람을 선택할 거야. 그리고 그 사람을 좋아하려고 노력할 거고.”
나는 드리블랴네라는 가문에 얼마나 많은 입이 달려 있는지 잘 알았다.
이 큰 가문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여기서 돈을 받아서 가족을 부양한다.
드리블랴네가 치정 싸움으로 망한 뒤에 그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됐을까?
주방장과 주방 식구들은? 정원사들은? 사서 할아범은? 하녀들은? 유모는?
하물며 그 많은 기사는 다 어디로 갔지?
고용인들과 친해지면서 나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제대로 된 사람을 가주 자리에 앉혀야 한다. 그게 아닐 거면 차라리 내가 공작 자리를 꿰차는 계략을 짜야만 했다.
‘물론 드리블랴네의 핏줄이 아닌 나를 기사들이 공작으로 인정해 주지 않겠지만.’
그러니까 어떻게든 후계자들을 어릴 때부터 사람 만들어서 잘 키워야 한단 말이지.
나는 진지한 분위기를 유지하며 질문을 던졌다.
“고용인들이 왜 친절한지 알아?”
“…….”
“생각해 본 적 없지?”
내 물음에 이안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단테는 움찔했다.
필사적으로 생각하는 게 보여서 좀 애잔했기에 나는 시간을 끌지 않고 답을 내놓았다.
“그들은 믿고 있어. 이 가문에 충성을 바치고 헌신한 만큼 자신들의 삶이 행복할 거라고. 드리블랴네의 가세가 기울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내가, 20대 며느리인 내가…… 올바른 선택을 내려줄 거라고. 그래서 자신들의 삶을 지켜줄 거라고, 믿는 거야.”
단테가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런 쪽으로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듯했다.
“그게 내가 가주라는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을 선택하려는 이유야. 내가 먹고, 입고, 누리는 모든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당연하지…… 않아?”
“응.”
“한 번도 나는…….”
단테가 무릎 위에 놓인 손을 꽉 쥐었다가 폈다가를 반복했다.
사실 사관 학교에 가지 않고 저택에 있었더라면 자연스럽게 배웠을 것이다.
‘부모님이 멀쩡히 살아 계셨다면 내가 이렇게 설명하지 않아도 당연하게 익혔을 텐데…….’
어쨌거나 상황은 이렇게 되었고 단테에게 직접적으로 이런 말을 해줄 사람은 나밖에 없는 듯했다. 아무래도 가주님과 이난나 님은 한 발짝 떨어져서 지켜보시는 걸 택하신 모양이거든.
“존중이 무슨 뜻인지 알아?”
“……아니.”
단테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나중에 사전 찾아봐. 나는 내 남편이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하거든. 아내뿐만 아니라 형제도.”
“응…….”
무슨 말을 해도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으니 화가 나지도 않는다.
잘생긴 얼굴도 엉망이 되고 한없이 작아져선 저러고 있으니…… 에휴.
난 싸늘한 말투를 거둬들이고 좀 더 다정하게 말을 이어갔다.
“나는 모두와 잘 지내고, 모두를 보듬어 안을 줄 아는 사람이 가주였으면 좋겠어.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선택했을 때, 그 선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문을 엎는다거나…… 내 선택을 존중하지 않는다거나 그러면 정말 화가 날 거야.”
이 정도 말했으면 대충 알아들었겠지.
충격 요법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나는 쓰러졌고, 그건 단테에게 꽤 큰 충격을 준 것 같았다.
‘용케 재폭주하지 않고 견디네.’
앞으로도 저렇게만 자기 제어력이 있어주면 좋겠다.
나는 그렇게 바라보며 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흐어엉, 플로린……! 나는, 나는 네가 죽는 줄로만 알고…… 나 때문에……!”
다정한 말을 건네자마자 단테는 눈물을 퐁퐁 쏟아내며 내게 달려왔다.
그래도 나름대로 생각을 하긴 했는지 퍽 안겨들진 않고 내 이불이나 꼬옥 쥐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이안은 언제나 그렇듯 살그머니 다가와 매트리스 한쪽에 앉았는데, 단테에게 가려져서 미처 보지 못했지만 이안 역시 하룻밤 새 수척해져 있었다.
“내가…… 좀 더 어른스러워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이런 사고가 난 거야. 내 잘못이야, 플로린.”
담담한 목소리엔 짙은 자책이 깔려 있었다.
나는 그런 이안을 일단 한쪽 팔로 꼭 안아주었다.
“많이 놀랐지.”
“네가 더 놀랐을 텐데…….”
“나 이제 괜찮아. 자, 단테도 이리와. 너무 세게 달려들지 말고.”
킁, 훌쩍.
벅벅 눈가를 문지른 단테가 아주 조심스럽게 나를 껴안았다.
둘의 체온이 참 따뜻하고 좋아서 나는 배시시 웃고는 양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어머니.”
“아니에요, 따님. 하지만…… 많이 걱정하긴 했답니다.”
내가 이만 용서하고 여기서 일을 마무리 짓길 원하는 걸 알아차리셨는지 양어머니가 낮게 한숨을 뱉으며 다가오셨다.
그러곤 내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어주셨는데 금세라도 부서질 것 같은 유리 공예품을 다루는 듯한 손길이라 내가 다 민망스러웠다.
음, 아픈 척을 더 할 수도 없고.
지금 나 진짜 너무 멀쩡한데.
“따님이 깨어났을 때 혼란스럽지 않도록 우선 세 사람만 있기로 했는데……. 다들 목 빠지게 기다리고 계실 테니 얼른 이 소식을 알려야겠어요.”
가문이 발칵 뒤집히긴 했나 보구나.
나는 멋쩍게 뺨을 긁적이다가 그냥 웃어버렸다.
‘나 이제, 혼자가 아니구나.’
세상천지에 혼자인 사람은 아플 때 가장 서러운 법이다. 누구도 내 안부를 묻지 않고 걱정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울면서까지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
아, 솔직히 가슴이 빠듯해질 정도로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