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s Daughter-in-law is Inherently Powerful RAW novel - Chapter (77)
악당의 며느리는 권력자 체질입니다-77화(77/173)
목소리가 어딘가 익숙하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정체 모를 호위는 나를 조심스레 정원 바닥으로 옮겼다.
“이안 도련님은 어디 계시고…….”
“이안도 친구를 사귀어야지. 내 옆에만 붙어 있으면 안 되잖아. 그치, 니나?”
“!”
호리호리한 체격, 큰 키. 늘씬한 다리까지. 시커먼 복장으로 온몸을 가리고 있지만 나는 대번에 알아보았다.
이 사람은 니나다!
“알아보실 것 같긴 했지만…….”
“니나의 다른 얼굴, 모른 척할게. 쉿, 비밀!”
어쩐지. 이번에 황궁에 갈 때 린다만 데려간다고 했는데도 얌전하더라니. 애초에 호위로 지켜보고 있었잖아?
나는 니나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는 반짝반짝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벨라디. 어디에 있는지 알지? 주홍색 머리칼이야.”
“……데려다드릴게요.”
결국 니나가 나를 번쩍 안아 들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어디론가로 쏘아져 나갔다.
거의 바람 같은 속도였다.
그리고 마침내 정원의 구석 중에서도 구석에 도착한 나는 잔가지 정리를 미처 다 하지 못한 커다란 나무를 발견했다. 그 위에서 스케치북을 끌어안고 뭔가를 그리고 있는 벨라디도.
“올려드리겠습니다. 조심하세요.”
“으응.”
니나는 탁탁 하고 몇 번 발을 구르더니 한 번에 점프해서 나를 벨라디의 옆에 내려놓았다.
그 경이로운 도약 능력에 감탄하며 나는 니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못 찾을 만도 하네. 여기 있는데 어떻게 찾아내.’
니나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허탕이나 쳤겠는걸?
“안녕, 벨라디. 뭐 그리고 있어?”
“…….”
“나는 플로린이라고 해. 열 살이야!”
일단 벨라디랑 친해지는 게 중요하니까, 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예쁜 미소를 보였다.
벨라디는 보고서 내용대로 정말 조용하고 유순했다. 그리고 엉뚱했고.
보통 이렇게 갑자기 누가 나타나면 놀라서 비명이라도 지를 텐데 벨라디는 그저 하던 걸 계속할 뿐이었다.
내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나를 밀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혹시 그림, 봐도 돼?”
바로 옆에 앉아 있는지라 안 보려 해도 보였지만 나는 일단 허락을 맡았다. 그런 뒤 벨라디가 사각사각 그려나가는 것을 어깨 너머로 슬그머니 훑었다.
“추상화네!”
“……!”
“음, 어떤 대상을 분석해서 재조립한 거야? 여기서 잘 보이는 거라면…… 달?”
아무리 내가 미술에 대해 아는 게 없다 해도 지금 벨라디의 손에서 뻗어지는 선들이 구상회화가 아니라 비구상인 건 알았다.
왜냐면 풍경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뭔가거든.
추상화는 기본적으로 어떤 대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않는 것이다.
화가의 마음이나 직관에 따라서 분해하고 재조립하고 면이나 선, 혹은 도형으로 나타내는 등 얼핏 봐서는 달을 그렸어도 그게 달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 내가 벨라디가 달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한 이유는 단순히 오늘이 만월이었기 때문이다.
하도 예쁘고 둥근 달이라서 나도 저걸 그려보고 싶을 정도거든.
‘뭐어, 내가 그려봤자 크레용 들고 색이나 칠하는 정도겠지만.’
그런데 정말 대단하다. 이 나이에 벌써 추상화 개념을 이해하고 그린단 말이야?
“달은 좋아. 달은 매일 달라져.”
그때였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벨라디가 처음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벨라디를 휙 돌아보았다.
“달의 파장은 참 예뻐…….”
“달을 그리고 있던 것, 맞구나!”
“그런데 넌 더 예쁜 빛을 내.”
“그, 그래?”
뭐지. 내가 벨라디를 꼬셔야 하는데 벨라디가 나를 꼬시고 있잖아?
난 뺨을 긁적이다 조심스레 스케치북을 가리켰다.
“혹시 예전에 그렸던 거, 보여줄 수 있어?”
“응.”
팔락팔락.
스케치북이 한 장씩 넘어갔다.
완성된 그림, 아직 미완성인 스케치들.
그 모든 걸 지켜본 나는 벨라디가 진심으로 그림을 그리는 걸 좋아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한 장마다 집요한 애정이 묻어나. 섬세하고 얇은 선이 모여 달을 만든다.
나는 저도 모르게 벨라디의 그림에 빠져들었다. 잘 볼 줄도 모르면서 그냥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멋지다.”
이 세계에도 추상화 개념이 있나? 없다면 벨라디가 그 시작인 건 아닐까?
나는 그림을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온 진심이 담긴 칭찬을 뱉었다.
“멋……져?”
“응. 출품은 해봤어? 대회 같은데 말이야.”
이건 인정을 받을 만한 실력인데. 출품하기만 하면 내가 손을 쓰지 않아도 상을 받겠어.
물론 여기서 ‘대회’라는 건 평민 화가들이 신분이나 지위 상승을 위해 나서는 대회가 아니라 앞으로 드리블랴네 가문에서 특별히 열 귀족 대상의 대회라고 보면 된다.
그 대회에 참가하는 게 굉장히 품위 있고 귀족다운 일이라는 식으로 여론을 조작하는 건 아버님이 알아서 해주실 터였다.
“드리블랴네 가문에서 곧 회화랑 조각 대회를 열거든. 거기 내보면 어떨까?”
“대회처럼 대단한 건…… 내가 나갈 곳이 아닌데…….”
“왜 아니야! 이렇게 훌륭하게 그릴 줄 아는데!”
“…….”
스케치북을 꼭 껴안은 벨라디가 볼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우물쭈물하며 속삭였다.
“언니가, 쓸모없다고……, 이런 건.”
“아니야! 세상은 쓸모로만 돌아가지 않는다고 했어!”
셀리나와 똑같은 주홍색 눈인데 벨라디의 것은 어쩜 이렇게 순수한 느낌인지. 색이 같아도 풍기는 분위기가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나는 벨라디를 똑바로 바라보며 콧김을 팡 뿜었다.
“네 그림은 멋져. 따라 해보세요. 내 그림은 멋지다!”
“내…… 그림은.”
“멋지다.”
“멋지……다.”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기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잘했다.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사실 네 언니랑 싸웠어.”
“!”
“그런데 너랑은 잘 지내고 싶어. 우리, 친구 하지 않을래?”
내 당당한 질문에 벨라디는 제 곱슬머리를 쥐더니 그대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난 네 곱슬머리도 좋고, 네 그림도 좋고, 네 눈동자 색도 좋아!”
“언니는…… 다 싫다고 했는데…….”
“너랑 내가 친구가 되는데 셀리나가 무슨 상관이야? 난 다 좋아. 나랑 친해지자!”
벨라디는 환하게 웃는 제 앞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사실 지금 벨라디의 눈에는 상대의 얼굴이 보이진 않았다. 태어났을 때부터 그랬다.
벨라디는 사람을 얼굴로 구분할 줄 몰랐다. 의사는 그런 그녀에게 안면인식장애라는 진단을 내렸다. 옷이 아니면 아버지나 언니를 구분할 수조차 없고 하녀들은 누가 누군지 아직까지도 몰랐다.
그래서 벨라디는 걱정되었다.
못 알아보면 화를 낼 텐데.
지금까지 그런 일은 몇 번이고 있었는데.
‘하지만…… 이 애는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아…….’
반짝거렸다. 파랑, 분홍, 노랑, 연두빛의 빛이 마치 폭죽처럼 터져 나오고 있었다. 눈이 부셔서 처음엔 쳐다보지도 못했을 만큼.
대부분의 사람은 영혼의 빛깔이 어두운 재색인데, 정말 가끔 특별한 빛을 지닌 사람이 있다.
따듯한 빛을 보면 저도 모르게 이끌리고 마는 불나방처럼 벨라디는 빛을 향해 손을 뻗고 말았다.
‘언니는 나 같은 거랑 친구를 해줄 애는 아무도 없다고 했는데…….’
셀리나는 집안의 폭군이었다. 그런 셀리나가 하는 말은 다 옳았다. 그러나 태어나 처음으로, 벨라디는 셀리나가 틀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 애는 제 그림을 보고 좋다고 말해주었으니까.
“친구…… 하고 싶어…….”
이 사실을 알면 언니가 또 발톱으로 쥐어뜯고 머리칼을 당기고 뺨을 걷어차겠지.
동물화한 언니는 정말로 무서웠다. 감히 거역할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그렇지만 언니는 내게 친구가 생기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친구를 만들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
아, 따뜻하다.
빛이 저를 폭 끌어안았을 때, 벨라디는 직감했다. 자신이 이 빛을 그리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 거라는 것을.
그래, 이건…… 운명이었다.
* * *
한편, 공연을 마친 화이란은 붉은 머리 소년의 눈길을 피해 슬쩍 몸을 감추는 중이었다.
이름은 모르겠지만 공주님과 함께 있었던 그 녀석은 꽤나 끈질겼다. 뭘 원해서 따라붙는 건진 몰라도 귀찮으니 피해 다녀야지.
“흐음, 흐음. 그보다…… 만일 진짜 공주님이 맞다면 여기에 둘 수는 없겠는데.”
당연히 본래 계셔야 할 저 하늘 위로 모셔갈 생각이긴 했지만 오늘 화이란이 본 장면들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 것뿐이었다.
올해로 412살이 된 화이란은 괜히 오래 산 게 아니었다.
그에겐 지금 이 연회장 내부의 세력 구도가 명백히 보였다.
‘아까 그 지상 것이 한 주축, 공주님이 또 한 주축이라 이거지.’
그냥 받들어 모셔도 모자랄 판에 감히.
화이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만약 공주님인 게 확실했다면 화이란은 공주님께 무례를 범하는 자들을 그냥 두지 않았으리라.
아르칼리크에서 왕족이란 곧 신이다. 고귀하신 분께 반목하는 자에게 내려져야 할 것은 오직 처단뿐. 단지 아직 확실하지 않기에 자중할 따름이었다.
직접 모셔가서 몸에서 흐른 귀한 피를 왕의 피와 섞어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얼굴을 보면 맞는 것도 같지만…… 그래도 모든 건 확실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