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s Daughter-in-law is Inherently Powerful RAW novel - Chapter (78)
악당의 며느리는 권력자 체질입니다-78화(78/173)
헌데 공주님이 진짜 공주님이라면 왕비님을 확실히 많이 닮은 성품이다.
아무래도 아까 그 오렌지색 머리칼의 지상 것을 벌하기 위해 ‘곡예사’를 들인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결론적으로 대부분의 백성에게 즐거움을 주지 않으셨나. 상냥하고 다정한 방식의 일 처리다.
화이란은 그래서 당시, 왕비님을 꽤나 흠모했다.
따님께서 왕비님을 많이 닮았다면 좋은 일이지.
“흐음, 흐으으음. 헌데 어쩐다. 쉽게 내어줄 것 같지는 않았는데.”
대충 정원으로 나온 화이란은 기지개를 쭉 켜곤 그대로 쪼그려 앉았다.
하늘에는 식물이 없다. 이 푸른 이파리들은 오직 땅에 내려와야만 볼 수 있는 것.
화이란은 기왕 황궁에 들어온 김에 실컷 풀을 구경할 셈이었다.
“너는 누구지?”
허나 그런 여유는 얼마 가지 않았다.
황궁의 근위기사. 그중에서도 대장인 듯한 자가 화이란의 뒤를 점했던 것이다.
“에휴, 요즘 아이들은 왜 이리 버릇이 없는지. 예의를 가르치던 도인들이 물러간 탓인지……. 매해 더 성질이 나빠지는 것 같구나.”
“헛소리하지 말고 신원을 밝혀라.”
강아지풀을 뜯어 우물거리며 화이란은 한숨을 뱉었다.
제 목에 닿은 날붙이는 명백한 살기를 띠고 있었다. 대답을 하지 않으면 정말로 벨 심산인 게다.
‘황궁에 들어온 이상 들키지 않을 수야 없었지만.’
그래도 정원 구경할 시간은 좀 주지.
화이란은 손을 들어 흐느적흐느적 흔들었다.
“황제 폐하. 네 기사에게 흉흉한 날붙이 좀 치우라고 하시지요.”
바스락.
그때, 풀숲이 흔들리더니 그 사이에서 황제가 나왔다.
화이란은 읏차 하고 몸을 일으키더니 공연 내내 쓰고 있었던 인피면구를 벗었다. 환한 달빛 아래 새하얀 머리칼이 드러났다. 짙붉은 눈동자를 목격한 근위대장이 날카롭게 외쳤다.
“알비노!”
“알비노인 건 맞는데, 그보단 다른 호칭으로 불리고 있지. 안 그런가요? 황제 폐하.”
화이란이 씩 웃으며 몸을 돌리자 늘 무료하기만 하던 황제의 얼굴에도 변화가 일었다.
“다음 교류는 한참 뒤의 일이었을 텐데.”
무거운 저음이 스산한 공기를 갈랐다.
황제가 입을 열어 대화를 할 의사를 표현하자 근위대장은 한 발 물러섰으나 여전히 영 찜찜한 얼굴을 했다.
근위대장이 보기엔 너무나 수상한 자였던 탓이었다.
“그랬지요. 지금은 개인적인 일 때문에 와 있는 거라서요.”
“아르칼리크의 사절단 대표께서 무려 곡예사로 변장을 하고 온 연유에 대해 짐이 꼭 들어야겠다면.”
“뭐, 이유는 알려드릴 수 없어도 대화는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공주님이 어디에서 왔고 언제 어떻게 나타났으며 지금 이 자리에 있는가.
누가 공주님을 보호하고 있고 그자의 성품은 어떠하며 지금껏 어떤 역사를 거쳐왔는가.
화이란이 원하는 건 그런 정보들이었다.
공주님이 맞다면, 공주님을 보호하고 있던 자에 대해 왕께서 알고자 하실 테니 미리미리 알아보는 게 좋겠지.
“따라오라. 마침 짐이…… 그대에게 묻고자 하는 게 있으니.”
입매를 삐뚜름하게 올린 황제가 먼저 몸을 돌렸다.
화이란은 넉살 좋게 헤죽 웃으며 뒤를 따랐다.
“이거 우연이네요! 저도 드리블랴네 가문에 대해 좀 궁금했지 뭡니까!”
정보의 대가는 정보로.
음모의 밤이 깊어졌다.
* * *
누군가에겐 고소했고, 누군가에겐 슬펐으며 또 누군가에겐 운명적이었던 밤이 지나고 어느덧 새벽.
술잔을 나누던 황제가 ‘아르칼리크 공국에서 회담을 열기를 원한다’는 뜻을 전하고, 화이란이 왕께 의사를 여쭙되 그 전에 ‘드리블랴네 가문에 대한 모든 정보’를 원한다고 할 때쯤.
홀쭉한 배를 껴안은 황후가 울다 지쳐 쓰러지고 그 황후를 보살피던 사람들도 곯아떨어졌다.
그로부터 오 분쯤 뒤에는 온갖 곳에서 떠드는 사람들의 말소리 탓에 뒤척거리던 이안과 이난나가 비로소 잠이 들었으며 복도의 경비병들마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렇게 풀벌레 소리조차 잦아든 고요의 순간이었다.
허나 여전히 잠들지 못한 키락서스는 독한 궐련을 태우며 자신이 바꾼 미래에서 파생된 새로운 미래에 대해 고뇌하고 있었다.
플로린이 셀리나와 이렇게까지 반목한 건 과거에는 없었던 일. 따라서 곡예사를 불러들인 것 역시 없었던 일이다.
얼핏 생각하면 별일 아닐 터이나 키락서스는 그자가 감추고 있던 힘을 생각하며 이것이 길이 될지 흉이 될지를 점쳤다.
무언가 미래가 크게 바뀌려 하고 있었다. 그조차 모르는 방향으로.
“아, 유성이 떨어지는군.”
역시 답은 흉인가?
‘내게 흉일지언정 네게 길하다면.’
그걸로 족하다.
메마른 웃음기가 연기에 휩싸여 스러졌다. 아무리 봄이라 하더라도 여름은 아니니 새벽 공기는 차가웠다. 맨발로 복도에 깔린 대리석 타일을 밟을 만한 기온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키락서스마저 잠깐 눈을 붙이러 침실로 향한 바로 그 찰나. 아주 잠깐, 우연이 만들어낸 빈틈.
그사이에, 플로린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 * *
‘어…… 나 또, 홀린 듯이 움직이고 있지 않나…….’
발바닥이 너무 차가워서 한순간 정신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몸은 움직이고 있었다. 어디론가로…… 어디론가로.
휘청휘청 걷던 나는 아무도 없는 복도를 지나 보들보들한 카펫이 깔린 길로 향했다.
‘단테처럼…… 이번에는 유리를 만날 수 있는 건가……?’
저항할 수 없기도 했지만 만약 그렇다면 더더욱 저항할 이유가 없다.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유리를 만날 수 있다면야.
‘졸려…….’
방금까지 또렷한 생각을 했지만 눈 깜빡할 사이에 졸음이 몰려와 머릿속이 혼몽해졌다. 눈앞도 흐려져서 떠밀리듯 움직이곤 있지만 여기가 어디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손님방에서 한참 온 것 같은데…… 여긴…… 1층?
그때였다.
나는 밋밋하고 평범한 어느 문 앞에서 멈추어 섰다. 보통이라면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가버릴 만한 그런 곳인데 어째서인지 지금은 지극히 중요하게 느껴졌다.
뭔가 보글보글하는 귀여운 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
달칵.
잠겨 있으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문은 쉽게 열렸다.
나는 그 안으로 홀린 듯 들어갔다. 수조의 푸른 음영이 공간을 가득 비추고 있는 곳으로.
그리고-
‘아. 아름답다.’
압도당할 만큼 아름다운 광경을 본 적 있는가. 마주한 순간 숨이 쉬어지지 않고 가슴이 빠듯하게 조여오는 낯선 경험을 해본 적은?
거대한 수조 속에 한 소년이 있었다.
‘물의…… 정령?’
마치 인어처럼 몸을 휜 채 먼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그 애는 나를 발견하자 사르르 눈웃음을 지으며 유영해 왔다.
새파란 물과 그 속의 커다란 신전과 유리.
거장이 혼신의 힘을 다해 내놓은 작품을 본 것처럼 비현실적이다. 아름다움이 극에 달하면 저렇게 되는 걸까.
눈부신 백금발과 창백하리만치 흰 얼굴. 깊게 팬 보조개와 물에 온통 젖은 긴 속눈썹.
흰 셔츠 차림의 유리는 꼭 진주와 산호에서 태어난 요정 같았다.
[안녕, 어서 와요.]꿀처럼 달콤하게 미소를 지은 유리가 수조 벽에 대고 뽀득뽀득 글씨를 썼다.
나는 떠밀리기라도 한 것처럼 황급히 그 앞으로 다가가 차가운 벽면에 손을 댔다.
만났다. 드디어!
“유리!”
[응, 나예요. 나를 드디어 찾아줬네.]“이 안에서…… 계속, 계속 갇혀 있었던 거야?”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어떻게.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공간이라는 건 곧 현실의 삶을 살지 못했다는 뜻이다.
나는 생활감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깨끗한 수조 안을 돌아보며 덜덜 떨었다.
찬물을 뒤집어쓰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이 확 돌아왔다.
너는 설마 여기서 계속, 계속……!
[난 오랫동안 누나를 기다려왔어요. 나를 여기서 구해줄 사람을.]“아…….”
[울지 말아요. 아직은 내가 닦아줄 수 없잖아.]처참하다.
눈부신 미(美)의 절정을 앞에 두고 나는 그저 눈물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유리는 이곳에 전시되어 있는 거야.’
수조 바깥에서 본 나는 그 의도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상어 수인은 태어난 즉시 바다에서 자라야 해요. 그러니까…… 수조라도 괜찮았어요. 하지만 이제는 나가보고 싶어.]마지막 문장까지 쓴 유리가 수조에 하염없이 대고 있는 내 손에 제 손을 가만히 가져왔다.
서로의 체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나는 이내 이마마저 댔다. 그러자 보조개가 패도록 웃던 유리가 내 행동을 따라 했다.
“꺼내줄게.”
괜찮을 리 없잖아, 너.
어떤 미지의 힘이 나를 여기로 이끈 건지는 모르겠다. 유리가 어떻게 내게 메시지를 보내온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어른들은 알고 있는데도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걸까?
황족인 상어 수인이 바다에서 살아야 한다는 건 상식인 것 같은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떻게 통용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황궁이 돌아가는 방식에 대해선 이해할 수가 없어.
‘아. 내가 행복하게 웃고 있는 동안 내게 메시지를 보내면서 유리는 무슨 기분이었을까.’
머릿속이 너무 복잡하고 가슴이 뜨거웠다. 코도 매웠고 눈물이 방울방울 흐르는 탓에 유리의 얼굴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화가 나.’
충격이 격랑처럼 나를 휩쓸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지금 이 순간 명확한 게 있다면…….
나는 이 차가운 벽을 넘어 유리의 손을 꼭 잡고 싶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