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s Daughter-in-law is Inherently Powerful RAW novel - Chapter (97)
악당의 며느리는 권력자 체질입니다-97화(97/173)
침대는 어린애가 네 명은 누워도 될 만큼 커다랬기에 나는 유리의 옆에 가만히 앉았다.
“이거, 선물이야.”
“선물이요?”
“응. 상자가 찌그러졌지만 안에 든 건 멀쩡할 거야. 꼭 주고 싶어서 샀어.”
갈망이 뭔지 사실 다 이해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딱 하나만큼은 제대로 알아들었는데, 내 말이 유리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었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그렇게 큰 영향력을 지녀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누나니까…….
누나답게 행동하면 되겠지!
“우와! 귀걸이……!”
“너랑 오팔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았어.”
이 정도 말은…… 해도 되겠지?
나는 약간의 불안감을 가지고 입을 열었다.
“여러 색으로 반짝이는데 이쪽으로 보면 하얗고, 저쪽으로 보면 연보랏빛이 돌아서…… 유리 같다고 생각했거든.”
“나를 생각하면서 사 준 거구나. 기뻐요!”
유리는 좋은지 계속 귀걸이를 쓰다듬다가 갑자기 제 귓불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다, 당장 끼려고?”
“누나가 준 건데 그래야죠.”
“아니, 아니. 나중에 귀를 뚫으면 그때 해. 지금은 말고!”
당황한 나는 곧바로 유리를 말렸다.
남성용 오팔 팔찌가 없었기도 하고, 그렇다고 발찌나 머리핀을 줄 수도 없으니까 무난하게 귀걸이로 고른 건데 이렇게 바로 귀를 뚫으려 하다니.
이안도 이러진 않았는데!
“에이, 지금 바로 끼고 싶은데!”
“예쁜 귀에 상처 내지 말고, 열다섯 살 되면 끼자. 어때? 게다가 지금은 열도 나잖아.”
이마를 짚어보니 아직도 미열이 있는 상태였다.
나는 얼른 내 안의 신성력을 끌어 올려 물거품이 퐁퐁 솟게 만들었다.
“시원해…….”
“조금 있으면 금세 괜찮아질 거야. 한숨 푹 자고 일어나자.”
나는 유리를 눕힌 다음 그 옆에 누웠다.
그러자 내 손을 꼭 쥔 유리가 이내 느리게 눈을 감으며 웅얼거렸다.
“실제로 손을 잡을 수 있어서 좋아요.”
나를 기다리느라 오랫동안 깨어 있었던 게 힘겨웠는지 유리는 머지않아 잠이 들었다.
나는 그런 유리를 하염없이 보다가 이 애가 내 남편이 되는 걸 잠깐 상상해 보았다.
‘음……. 역시 알아온 시간이 너무 짧아서 그런 걸까.’
당장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위엄 있는 황제가 된 모습은 이렇게 잘 상상되는데 말이야.
‘나는 내가 어느 나라 출신이든 상관없이 이 가문의 며느리이고 싶고……. 딱히 황후가 되고 싶은 건 아냐.’
내게 벌써 각인을 해버렸다는 유리를 어떡해야 할까?
골똘히 생각하던 나는 슬슬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걸 깨닫고 조심스레 침대에서 벗어나 내 방으로 돌아갔다.
‘진짜 아리아드네 님이 아르칼리크에 계시기라도 하면 좋겠다.’
그럼 황제의 각인을 어떻게 받아들이셨는지 들어볼 수나 있을 텐데…….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꿈에선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이 나왔는데, 다른 건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딱 하나는 희미하게 기억에 남았다.
“네 몸은 원래 네 거였단다. 그러니 네 가족도 본디 네 가족이지.”
눈물이 날 정도로 포근하고 따스한 빛. 나를 감싸 안던 비단결 같은 목소리……. 하지만 그건 아마 내 기대가 만들어낸 환상이었으리라.
꿈은 종종, 기대를 반영한다고들 하니까.
* * *
비행정이 아르칼리크 공국에 도착한 건 그날 아침의 일이었다.
햇살이 눈꺼풀을 두드리자 나는 인상을 쓰며 일어났다. 그러다 문득 여기가 어딘지 불현듯 깨달으며 그대로 튕겨 올랐다.
“도착하는 거 보고 싶었는데!!!”
서둘러 창가로 달려가 유리에 코를 붙인 나는 사방에 안개가 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버님!”
가져온 짐 가방에서 요술봉을 꺼낸 나는 휙 휘둘러서 딱 3초 만에 옷을 갈아입은 뒤 미친 듯이 달려 나갔다.
응접실을 지나 입구까지 가자 거기엔 이미 차려입은 아버님은 물론이고 황제와 화이란, 유리까지 다 모여 있었다.
맙소사, 내가 꼴찌네!
“왜 안 깨워주셨어요, 아버님!”
“곤히 자기에. 게다가 어차피 하선 허락이 나오는 걸 기다리는 중이었단다.”
“이미 허락은 한 것 아니었어요?”
“저쪽 말로는 안개가 심할 때는 혼령이 날뛰니 걷힌 다음에 하선하는 게 낫다더군.”
혼령? 유령을 말하는 걸까?
오싹해진 나는 아버님의 뒤로 슬그머니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런 나를 보던 화이란이 목을 울려 웃었다.
“공주님은 아무 걱정도 안 하셔도 됩니다. 혼령의 영향을 받는 건 지상 사람들뿐이니까요.”
어째 내가 여기 사람이 아니면 혼령들이 달려들 거라는 말로 들리는데.
나는 짜게 식은 눈으로 화이란을 흘긋 보고는 아버님의 소매를 더욱 꼭 쥐었다.
“오, 안개가 걷히는군요.”
다행히 10분 정도 흐르자 안개가 서서히 사라지며 끝에서부터 새파란 하늘이 돌아왔다. 동시에 입구 쪽에 설치된 너른 옆 창이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비춰주었다.
‘내 아빠라는 분이 여기에는 나와 계실까? 물론 아빠가 아닐 수도 있지만 그래도.’
저 많은 사람 중에 누가 내 아빠일까?
심장이 팔딱팔딱 뛰어댄다.
어제까진 아무렇지 않았는데, 그냥 실감이 안 나서 그랬나 봐.
끼이이.
커다란 입구가 천천히 열리며 바깥공기를 안으로 훅 당겨왔다. 입구 바로 앞까지 가서 서 있던 나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가 폈다가를 반복했다.
“그럼 가실까요?”
고향에 온 게 좋은지 화이란이 히죽 웃으며 제일 먼저 하선했다. 그 뒤로 황제와 유리가 나서고, 나는 아버님보다도 한 발 더 늦게 움직였다.
‘기대감이 물씬 오른 만큼 상처받을까 봐 무서워.’
공주를 기대하는 눈으로 나를 보았던 사람들이 내가 공주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고 실망으로 바뀔 그 눈빛과 태도가 두려웠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는 건 내가 겁이 많기 때문일까?
“지상에서 오신 객들을 환영합니다.”
우리를 맞이하러 온 아르칼리크 사람들이 보였다. 모두 나와 같이 은발을 지녔고 붉은 눈을 가진 이들이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내 아빠일 것 같은 사람들을 찾아 헤맸다.
‘저 사람은 눈매가 나랑 안 닮았고, 저 사람은 턱이 너무 뾰족하고. 저 사람은 코가 안 닮았는데.’
그 외에는 대부분 여자고…….
“저는 왕의 명을 받들어 객을 모시러 온 목 섬의 주인, 목희라 합니다.”
때마침 가면을 쓴 한 여성이 앞서 나와 자신을 목희라 소개했다. 아마 화이란과 비슷한 위치의 사람인 것 같았고……. 그렇다면 마중 인원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라는 의미인데-
‘아.’
안 왔구나.
‘안 온 거야.’
나는 같은 말을 속으로 두 번 되뇌었다. 담담하게, 하지만 또렷이.
가슴 어귀가 알싸하게 아픈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어차피 얼굴 한 번 본 적 없던 사람이잖아. 확실하지 않으니 데리러 오지 않은 것도 당연한 거고.’
그런데 난 왜…….
갑작스레 울컥하는 바람에 나는 혀를 아프게 깨물며 울음을 참았다.
그런 뒤, 몰래 심호흡을 몇 번 했는데 그런 나를 아버님이 스윽 훑어보는 게 느껴져서 난 괜히 헤헤 웃었다.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그런 의미를 담아서.
“여독을 먼저 푸시겠습니까? 혹은 왕이 계신 곳으로 바로 모실지요.”
목 섬의 주인, 목희의 차분한 말이 이어졌다.
황제는 그에 대해 짧게 고개를 내저었다.
“짐과는 미리 약속된 바가 있을 텐데.”
“허면 손님께는 날개 가마를 대령하겠습니다.”
목희의 말이 끝나자마자 수행인들이 딱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을 듯한 사이즈의 가마를 가져왔다. 마차가 아니라 가마인 이유는 들고 있는 게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왕께서 배려하신 안내자입니다. 어느 섬이든 객이 원하시는 대로 모셔다 드릴 것이며 날개 가마에서 내리시면 어떤 여관에서든 편히 묵으실 수 있습니다.”
오……. 그거 좋게 말해서 배려지 실상 감시인 거잖아.
“그럼 즐거운 유람되시기를.”
나도 알아들은 걸 황제가 모를 리 없을 텐데, 황제는 별다른 말 없이 가마에 올랐다. 자신의 목적만 달성되면 다른 건 아무것도 상관없다는 투가 여실히 묻어났다.
“자, 그럼 공주님과 그 외는 이쪽으로.”
남은 우리는 어쩌나 했더니 화이란이 헤죽거리며 입가에 손을 말아 쥐고 후욱 숨을 불었다. 그러자 거기서 거대한 구름 같은 게 튀어나왔는데 놀랍게도 그게 또 다른 교통수단인 듯했다.
“방금 그건 연성술?”
“예, 공주님. 아르칼리크에서는 세 살짜리도 하는 기초 연성술이죠. 자신의 특성을 찾기 전에 제일 먼저 배우는 거요.”
그런 것도 있구나.
나는 퍽 신기해하며 구름에 올랐다.
푹신거려서 서 있는 게 힘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발을 딛는 곳은 견고한 게 의외였다.
“태양 섬에는 아무나 갈 수 없기 때문에 외부에서 온 이런 비행정 역시 목 섬에 먼저 내린 겁니다. 여기에서 왕께서 계신 곳으로 슝 갈 거랍니다.”
짤막하게 설명하는 화이란 역시 언제 꺼냈는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아마도 여기에선 ‘섬의 주인’들은 반드시 가면을 써야 하는 규칙이 있나 봐.
지금껏 화이란은 내가 공주가 아니면 낭패라고 여겼는지 아르칼리크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모든 걸 그저 유추할 뿐이었다.
‘각 섬은 무슨 의미인지, 가면은 왜 쓰는지, 혼령은 왜 지상 사람을 공격하는지. 그리고 이 사람들의 언어와 우리의 언어가 어째서 같은지……. 궁금한 게 너무 많아. 왕이 어째서 신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지도.’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여기에 왔다.
이제, 내 뿌리에 대한 답을 찾을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