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s Daughter-in-law is Inherently Powerful RAW novel - Chapter (99)
악당의 며느리는 권력자 체질입니다-99화(99/173)
마치 왈칵 짜증이라도 내는 것처럼 앞쪽 문이 쾅 하고 열어젖혀지더니 고오오 하고 안에서 기이한 기류가 흘러나왔다.
화이란은 ‘어이쿠’하는 소리를 내더니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혼나겠군요. 이렇게 된 이상 꼭 진짜 따님이시기를 빌겠습니다. 그래야 제가 살 테니까요.”
“혼나? 왜?”
“왕께서는 왕비님 앞에서도 늘 나이 때문에 위축되어 계셨거든요. 두 분이 다투시기라도 하면 왕비님껜 더 젊은 사내가 어울릴 거라며 소심하게 구름을 파고 들어가시기도 했고요. 아, 이걸 말씀드렸다는 건 비밀입니다?”
화이란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뭐어, 다 들으라고 한 말인 것 같긴 한데…….
나는 소심하고, 연세가 많은 할아버지를 떠올려 봤다. 잘 상상이 가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내가 딸이라면 애교를 떨어드려야겠다 싶기는 했다.
“잘 공경해 드려야겠다.”
유리가 내 손을 잡으며 눈을 휘어 웃었다.
나 역시 맥이 탁 풀려선 그저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잘 공경해 드려야지.
‘그런데 그래도 좋으니까-’
저 안에 계신 분이 내 진짜 아빠면 좋겠어.
‘이제 더 망설일 것 없어.’
나는 옹골차게 주먹을 쥐곤 몸을 빙글 돌려 아버님을 꼭 껴안았다.
“여기까지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별말을.”
“그런데 다시 돌아가야 하면 잘 주워서 데려가 주실 거죠?”
여기다 두고 가시면 안 돼요.
장난스레 덧붙이자 아버님이 키득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있을 곳은 드리블랴네가 아니더냐. 이미 가문과 결혼하였으니.”
“네!”
맞아. 내겐 있을 곳이 있는걸. 그러니까 저 안에서 어떤 일이 생겨도 두렵지 않아.
나는 담비답게 용기를 냈다.
작아도 맹수예요. 무엇에든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육식동물 수인이란 말이지.
“가자.”
아버님의 한 마디에 나는 보폭 크게 한 걸음을 뗐다.
그렇게 우리는 다 함께 문간을 넘었고, 그러자마자 나는 주변 공기가 사악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내 옆에 누구도 없다는 것 역시.
“아버님? 유리?”
분명 바로 곁에 있던 사람들인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놀라서 두리번거리던 난 여기가 온 사방이 ‘구름’으로 뒤덮여 있는 공간임을 한 박자 늦게 알아차렸다.
‘아, 설마 아까 화이란이 했던 말이 힌트였던 걸까?’
왕은 소심해서 구름을 파고 들어간다고 했지.
‘그럼 여기는 왕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장소. 혹은 내면의 공간이려나.’
화이란은 나 혼자만 이곳으로 이동될 거라는 걸 이미 알았던 게 틀림없었다.
‘큰일 났네. 내가 없어진 걸 지금쯤 아버님도 아셨을 테고, 가만 계시지는 않을 텐데.’
남의 나라 신성지와 궁전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나를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아버님을 어렵지 않게 상상한 나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끙끙 앓았다.
‘아, 안 돼. 얼른 친자 확인을 하고 돌아가야겠어.’
그런데 왕은 어디에 있지?
“네가.”
찰나, 나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음성에 흠칫하고 멈춰 섰다.
“지상에서 연성술을 썼다는 그 아이가 맞으니.”
어라?
노인이라고 들은 것과는 달리 굉장히 젊은 목소리였다. 심지어 듣기 좋기까지 해.
아버님의 목소리는 따지자면 카발리에 바리톤이었다. 힘 있고, 낮은 저음. 거기에 허스키함이 섞여 있지.
그런데 이분의 음성은 그리 낮지는 않았다. 구분하자면 테너인데, 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비단결 같아.
나는 쭈뼛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 맞아요.”
“보여주렴.”
“매개체가 있어야 하는데…….”
여긴 아무것도 없어서 뭘 가지고 연성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갑작스러운 주문에 눈을 굴리던 나는 일단 구름 벽을 짚어보았다. 구름도 매개체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던 것이다.
‘이얍!’
눈을 질끈 감고 연성술을 펼친 나는 이내 슬그머니 실눈을 떴다.
“!”
분명 아까까지는 오트밀 색, 흰색 구름만 가득하던 공간이었는데!
아주 가볍게 몇 송이만 피워내려 했던 것과는 달리 내가 짚은 곳부터 시작해 천장까지 꽃밭이 확 펼쳐져 있었다.
“이 공간은 수련의 방이라 부른다. 어떤 연성술이든 여기서는 보다 쉽게 펼칠 수 있지. 위력 또한 몇 배로 강해지고.”
혹시 이거, 화이란이 말한 ‘소심해서 구름 파고 들어갔다’에 대한 변명인 걸까? 그게 아니라 수련을 위해 여기 있었던 것뿐이라는……?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재미있어서 쿡 하고 웃음이 터졌다.
진짜 소심하시잖아? 귀엽게!
“그래서 얼굴도 안 보여주시는 거예요?”
“?”
“얼굴, 뵙고 싶어요. 진짜 아빠일 수도 있잖아요. 아닐 수도 있지만.”
내 주변엔 온통 용감한 사람만 있어서 그런지 이런 어른은 몹시 신선했다.
“아니면……. 피 검사 먼저 해요. 그럼 보여주실래요? 근데 제가 딸이 아니라도 보여주시기예요. 그래도 저, 여기까지 왔잖아요.”
“……그래.”
음, 화이란이 그렇게 무서워한 것치고는 굉장히 순한 분인데?
왕이 나를 조심스레 안았다.
난 나를 품에 가두기는 했는데 내게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고 그냥 동그라미만 만든 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소매가 긴 걸 보니 아까 목희라는 사람이 입은 것과 같은 양식의 옷인가 봐. 이곳 옷은 지상의 옷과는 아주 달랐으니까……. 이걸 입고 계신 왕은 어떤 생김새일까?
“저기, 피 검사를 하려면 상처를 내야 하지 않을까요?”
곧 해결될 궁금증은 잠시 눌러놓고 나는 왕의 손등을 톡 건드렸다. 그런데 왕이 내가 다 민망하게 화들짝 놀라지 뭐야.
‘게다가 지금 이 위치에 팔이 있다는 건 무릎을 꿇고 있다는 거 아닌가?’
정말 겁이 많은 분이구나. 하는 수 없지. 2990살쯤 젊은 내가 다가갈 수밖에.
“손가락에서 피를 내요? 빨리 확인하고 싶어요.”
“그래……야지. 따끔할 거란다.”
가늘게 떨리기 시작하는 손이 내 손을 쥐었다. 아버님처럼 크고 단단한 손이 아니라, 굉장히 하얗고 고와 보이는 날렵한 손이었다.
‘아야.’
손 구경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손끝이 따끔하더니 핏방울이 허공에 포르르 떠올랐다. 신기한 건 그러자마자 내 손끝의 상처가 말끔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런 뒤, 왕은 망설임 없이 제 검지를 확 베었다.
“잠시만요! 아니, 저는 손가락 끝에 그것도 폭 하고 살짝 뚫더니 자기 손은 왜 이렇게 무식하게 베어요???”
왕의 손에서 난 피가 아까 내 것처럼 허공에 떠올랐다. 물론 왕의 상처도 금세 나았지만 나는 너무 기가 막혀서 어안이 벙벙해진 상태였다.
“나는 영생을 지녔단다. 이깟 상처로는 죽지도 않고 통증을 느끼지도 못해.”
“아니, 피 보는 제 눈 생각은 안 하시고요?”
차근히 달래려는 듯한 말투에 황당해진 내가 꽥 소리를 지르자 등 뒤에서 크게 움찔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내가 충격을 받을 줄 전혀 몰랐다는 눈치였다.
“다음……에는 조심하마.”
“하아.”
소심한가 싶더니 이런 쪽으로 대범할 줄이야. 오래 살면 원래 저렇게 되는 건가?
아무튼 우리 둘의 핏방울은 허공에서 서로 부딪치고 겉돌기를 반복했다. 역시 아니구나 싶어서 낙담하려던 순간.
포옹. 핏방울이 한데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어?”
저게 왜 저렇게 되지……?
심지어 액체에 불과했던 피가 어느 순간부터 동그란 공처럼 변하더니 서서히 겉면이 굳어 단단해지기까지 했다. 마치……. 마치 우리가 가족이라는 걸 확실시하는 것처럼.
“끄앗!”
멍하니 그걸 올려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왕이 나를 껴안아왔다. 약한 힘이기는 했지만 이번엔 제대로 된 포옹이었다.
‘그런데 손이 아니라, 이젠 아예 온몸으로 떨고 계시네.’
별다른 말이 없어도 알 수 있었다. 내가, 내가 이분의 딸이라는 것을.
내 등에 머리를 댄 채 흐느끼는…….
“……아……빠?”
“!”
스르륵.
미약한 부름에 나를 안고 있던 팔에서 완전히 힘이 빠져나갔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아주, 아주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아빠가 맞으면 얼굴을 봐야지.
어떻게 생긴 분일지 궁금하다.
‘내가 아빠를 얼마나 닮았을지 알고 싶어.’
그렇게 돌아선 나는……. 온 얼굴을 눈물로 적신 어른을 볼 수 있었다.
긴 머리칼이 내 것과 꼭 닮은 색이다. 은발로 시작해서 끝으로 갈수록 붉어지는 특징이 아빠를…… 닮은 거였나 봐.
눈 색은 조금 달랐는데 아빠의 것보다 내가 좀 더 채도가 높았다.
‘하지만 눈썹 모양이 비슷해.’
눈매랑 코는 다르게 생겼고. 엄마 닮은 걸까?
“아아…….”
아빠는 탄식인지 한숨인지 그도 아니면 감탄인지 모를 소리를 쥐어짜냈다. 투명한 눈물이 멈추지 않고 계속 솟아나는 바람에 온 얼굴이 젖어드는데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를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하던 아빠는 어느 순간부터 가슴을 치기 시작했다.
“이리 장하게 자라주었어. 이리 장하게……. 아비가 되어 너를 찾지도 못하고, 그저 죽은 줄로만 알고. 그, 그동안 너는 이리도 의젓하게 자랐어…….”
회한과 고통.
환희와 슬픔.
또다시 기쁨.
어린 내가 다 이해하기에는 너무 깊은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
거기에 휩쓸린 나 역시 코가 알싸해지고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렸다.
“아, 빠.”
안아도 되겠지? 아빠니까.
내 아빠 맞잖아. 내 아빠잖아!
나도 아빠처럼 온몸이 벌벌 떨렸다. 진짜 크게 놀라고 감격하면 이렇게 되는구나.
나는 입술을 꾹 깨물다가 이내 석상처럼 굳어버린 아빠에게 안겨들었다. 그러자 뻣뻣하던 몸에 천천히 혈류가 돈 것처럼 아빠가 삐걱거리며 나를 안았다. 꽉 안지도 못하고 그저 조심스럽게.
이후로는 소리 없는 오열이었다.